[특파원수첩] 모스크바의 ‘배고픈 봄’
  • 모스크바 태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0.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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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점 등에 장사진 여전… 택시기사 루블 대신 달러 요구

모스크바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다는 것은 공항에 내리자마자 벌써 느낄 수 있었다. 입국 수속 창구의 젊은 직원이 여권을 돌려주면서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 아닌ㄴ가. 기자의 모스크바 방문은 이번이 세번째인데, 지난번까지만 해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전에는 군복 비슷한 차림의 출입국 관리들 눈매가 유난히 쌀쌀했으며, 표정이 칼날같이 차가워서 무슨 트집을 잡혀 입국을 거부당하면 어쩌나 지레 겁을 먹을 정도였었다.

글르스노스트(개방)가 위세를 떨쳐 소련이 많이 달라져가고 있는 모습은 그밖에도 사방에서 볼 수 있다.

모스크바의 큰 길인 고리키 대로의 지하철 입구에서 20세 전후의 여성이 무어라 소리치며 신문을 팔고 있었다. 사보니 민주당 기관지였다. 새로 생긴 개혁 추진그룹이다. 값은 1루블(공정환율로 약 1천1백60원). 타자를 쳐서 인쇄한 엉성한 체제의 소형 6페이지 신문이다. 미국의 《타임》지 기사도 하나 번역돼 전재되어 있었다. <프라우다>지 한 부가 5카페크(1백카페크=1루블)인 것에 비하면 대단히 비싼 값이다. 그러나 기자가 한 부 사니까 호기심이 동했던지 옆에 있던 사람들이 덩달아 모여들어 당장에 여러 부가 팔렸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봄은 일면 처량한 계절이다. 크고 작은 건물과 도로가 흰눈에 포근히 덮여 있던 겨울의 모스크바가 차라리 아름다웠다. 특히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황금색 돔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설경은 잊을 수 없는 모스크바의 절경이다. 눈이 사라진 지금, 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의 모습은 처참할 지경이다. 몇몇 대로를 제외하고는 도로가 크게 패인 곳이 많아 성급한 택시기사들도 조심조심 피해다녀야 한다. 길가의 엷은 파스텔색 건물들에는 흙탕물이 튀어 얼룩진 곳이 많다. 잘 차려입은 젊은 여성들은 흰 장화에 묻는 진흙 때문에 살펴 걸어야 한다.

“경제위기가 날로 더 심각해지고 있다”

대중교통 수단의 하나인 트롤리 버스도 낡은 것들이 많다. 승객들의 옷차림도 호텔 주변과는 판이하게 매우 초라해보인다. 그러나 말이 없어도 착한 마음씨들을 가졌다는 느낌은 쉽게 받는다. 표를 미리 사지 못한 채 현금을 손데 들고 만원 트롤리에 올라탔더니 누군가가 재빨리 돈을 빼앗아 릴레이식으로 운전기사에게 전해주었다. 10회용회수권과 거스름돈이 곧 되돌아왔다.

표 한 장 값은 5카페크. 지하철 요금도 똑같이 싸다. 공중도덕도 잘 지켜지고 있다. 지하철 통로나 주변에 껌을 뱉은 흔적이 전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고대하는 경제개혁은 깜깜 무소식인가. 소련 기자들은 “경제위기가 날로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이구동성이다. 따라서 군축이니 동유럽 해방이니 하여 고르바초프가 해외에서는 갈채를 받고 있는지 몰라도 소련 시민들의 지지는 별로 못받고 있다고들 말한다.

고리키 대로의 가게를 돌아보니 과자가게와 육류점은 물건을 제법 갖추고 있었으며 그렇게 붐비지도 않았으나, 대중식당 · 의류점 등은 몹시 붐볐고 문밖으로 줄이 길게 벋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였다. 소비물자의 공급이 여전히 고르지 않고 품질이나 선택의 폭이 몹시 안좋은 것이 현실이다.

택시기사들은 관광객들에게 달러를 요구하고 루블은 안받으려 한다.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5달러~10달러를 부른다. 달러 대신 미국담배를 받기도 한다.

호텔내외 바도 대개 외환 전용이다. 바에 앉으니, 거리의 여인같은 소련 여성이 다가와서 “루블을 줄테니 콜라를 사줄 수 없겠느냐”고 영어로 속삭인다. 심지어는 배가 고프니 샌드위치를 사달라기까지 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모스크바에서 가장 긴 줄은 레닌묘 참배객 행렬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푸시킨 광장에 생긴 맥도널드 식당 앞 줄이 경쟁자로 등장했다. 영업시간은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평균 고객수 4만5천명. 좌석이 7백석이나 되는 초대형 햄버거 식당으로 카운터 길이가 30미터, 현금계산기 27대. 캐나다 사람인 지배인 마크 와이너씨는 소련의 젊은이들 8백명을 훈련하여 교대 근무를 시키고 있는데 그들의 능률이 훌륭하다고 자랑한다.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줄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수가 2천명은 될 듯하다. 한 사람이 대개 5루블을 쓰게 마련이라니 월평균소득이 2백루블인 소련 시민들에게는 비싼 음식이다.

14년간 끈질긴 합작투자 교섭을 벌인 끝에 최근에 개점한 맥도널드의 선풍적 인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소련 당국도 몇몇 동유럽 국가들의 뒤를 따라 시장경제를 과감히 도입하는 대담한 경제혁신을 시도하리라는 말이 한창 나돌고 있는 요즈음이라 흥미로운 현상이다. 사람들은 맛보다도 호기심 때문에 맥도널드에 끌리고 있다고들 평한다. 그러나 개혁을 기다리며 말할 수 없는 인내심으로 처량한 봄과 씨름하고 있는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색다른 심심풀이가 되어주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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