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류] 공중에 뜬 박연銅像
  • 네덜란드 드레이프시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0.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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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기증 약속했으나 비용 때문에 제작중단

한국과 네덜란드간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는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서양이능로서 최초로 한국에 귀화했던 네덜란드인 朴淵(1595~? · 본명 얀 얀츠 벨터브레 Jan Janse Weltevree)의 동상을 둘러싸고 한국과 네덜란드간에 지금 동문서답이 벌어지고 있다. 네덜란드가 문화교류의 하나로 우리나라에 박연동상을 기증하려 했었으나 경비부족으로 동상제작이 중단된 채 아틀리에에 처박혀 있는 반면, 서울에서는 어린이대공원 안에 장소까지 마련해 놓고 동상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박연은 네덜란드의 작은 시골도시 드레이프(De Rijf)시에서 태어나 1628년(조선조 인조 6년) 일본으로 항해하다 제주도 근해에서 표류, 물을 구하러 상륙했다가 붙잡혔다. 임진왜란 이후 국방강화가 필요했던 때에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근무하면서 서양식 군대훈련, 전술, 대포제조기술 등을 전해 우리나라의 국방강화에 크게 기여했고,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얻어 한국인으로 귀화해 살았다.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 표류했을 때에는 통역을 담당히가도 했다. 이런 박연이 네덜란드에서 새삼스럽게 떠오르게 된 것은 88올림픽이 계기가 돼 한국 · 네덜란듯간에 우호증진을 위한 민간문화교류의 기운이 싹텄기 때문이다.


한국선 건립장소까지 마련

박연의 출생지 드레이프시는 네덜란드 수도인 암스테르담 북쪽 약 40㎞ 지점에 위치한 주민 5천5백여명의 작은 시골 도시다. 그곳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7세기에 건설된 운하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고색창연한 이 마을에는 뾰족지붕, 수선화, 운하에 떠다니는 배 등이 서로 어울려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1630년에 건축됐다는 시청건물 앞에 서 있는 박연 동상은 이 도시를 상징하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 있다. 높이 1백38㎝에 무게 1백50㎏의 이 동상은 한국 갓을 쓰고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제복에다 구명조끼와 닻 등 항해도구를 휴대한 모습이다. 자동차와 배 모양을 한 신발을 신고 어께에는 장총까지 메고 있다.

88올림픽을 앞두고 드레이프시는 최초로 한국과 네덜란드간의 교류를 튼 박연을 기리는 동상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한국대사관에 이같은 계획을 제의했다. 그 결과 총제작비 4만4천길더(2만2천달러 상당)중 한국교민측이 1만8백길더를, 네덜란드중앙정부와 지방정부측이 3만여길더를 부담해 88년 8월26일 동상이 시청앞에 세워졌던 것이다. 동상건립을 주도했던 부시장 함순씨는 “동상제막식에 이어 박연이 표류한 것을 상징하여 내부를 배의 내부처럼 꾸민 오스트아인드(Oosteinde) 거리의 ‘얀 얀츠 벨테브레’라는 음식점에서 잔치를 열기도 했다”면서 “박연동상과 식당은 이제는 이 도시의 명물이 됐다”고 덧붙였다. 함순씨는 한국에서 네덜란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한국과 네덜란드간의 유대가 두터워지기를 희망하는 뜻에서 ‘드레이프시가 한국에 동상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던 것인데 서신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의사소통에 차질이 빚어졌다고 전했다. 드레이프시에서는 기존의 동상을 놔두고 동상을 하나 더 만들어 기증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서울시에서는 기존동상이 오는 것으로 판단, 환대준비만 했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엠 데 용 시장은 “작가인 엘리 발튀스가 두번째 동상의 제작에 임했다는 사실과 재정적인 문제로 작업이 중단된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도 “재정적인 문제는 시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고 강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에 뛰어난 감각을 지닌 작가로 알려진 엘레 발튀스의 아틀리에에는 시청앞에 세워진 것과 유사한 동상이 외형만 잡혀진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처음 제작때와 마찬가지로 제작비를 지원받는 줄 알고 이 일을 맡았다는 작가는 “하멜표류기를 읽고 그가 한국에서 생활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현대적 재료를 가지고 과거를 재현, 동서양간의 문화차와 함께 시간차를 극복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꾀하면서 동서양 정신을 혼합하는데 역점을 두었다는 그녀는 “비용문제로 제작을 중단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도 “빨리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어 동상을 한국에 보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서울시 李相鎭문화과장은 “현재 드레이프시에 세워져 있는 동상을 한국으로 이전해 오는 줄 알고 그 위치까지 선정했음은 물론 그에 상응할 답례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어이없어 했다. 李과장은 89년 2월 외무부를 통해 드레이프시에서 동상기증 의사를 전달받은 후 몇차례에 걸친 서신교환을 통해 오는 4월중순에 동상이 이전되는 줄 알고 각 분야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동상기념비자문위원회’까지 구성하는 적극성을 보이면서 “이미 건립장소까지 물색했다”는 것이다. 李과장은 “앞으로 외무부와 협의해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주재 한국대사관 嚴勤燮참사관은 “필립스, 네덜란드왕립항공사(KLM) 등의 서울사무소 직원들이나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한국교민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양국 교민들의 자발적인 문화교류 차원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과 네덜란드간의 문화협정이 없는 상태에서 시도되었던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3백60년만에 다시 이 땅을 찾아오기로 한 손님이 또 한차례 격랑을 만나 표류하고 말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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