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통신망에 '냉전 바이러스'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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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안에 '이적단체'견해 게재… 통신 윤리.국가기관 통신 개입 논쟁



 천리안에 눈병이 발생해 시력이 뚝 떨어졌다. 난데없는 눈병의 원인은 80년대판 '냉전 바이러스'들이었다.(주)데이콤에서 제공하는 컴퓨터 통신마인 천리안에 80년대 증후군이 등장한 것은 지난 11월 15일, 이 통신망에서 활동하는 '현대철학동호회'의 게시판이 20시간 가까이 중지되면서 이다.

 데이콤측은 이동호회 회장 김형렬씨(20.《진보저널》편집제작부)가 공개게시판에 올린 환경 캠페인을 비판한 글이 '장관을 인신 공격하는 등 과격하다'라고 판단해 이글을 지우고 김씨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김씨는 동호회를 소개하는 글을 다시 올렸고, 데이콤은 동호회 게시판에 올라 있는 몇가지 글이 문제가 있다고 보고 15일 오후 5시께부터 두차례에 걸쳐 동호회란을 폐쇄했다. 다음날 게시판은 다시 열렸지만, 검찰.경찰이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가면서 문제는 통신 윤리와 국가기관의 통신 개입 논란, 국가보안법 개폐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있다.

"통신에서 정치자유 보장 받는 계기 삼겠다"
 문제가 된 글은 '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의 정치적 입장' '사노맹중앙재건위의 입장' 등 진보적 사회단체의 견해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검찰. 경찰은 사노맹과 같은  이적단체의 입장이 통신을 통해 유포되는 것은 국가 보안법에 위배된다는 입장이다. 서울지검 관계자는 "경찰에서 이 동호회의 활동과 글의 위법 여부를 조사하고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동호회 측은 데이콤이나 검.경이 이 글들을 문제삼고 있는 데 대해 시대착오적인 과민반응 이라고 주장한다. 김씨는 "이 글들은 동호회의 입장이 아니라 토론을 위한 학술자료로 쓰기 위해 올린것이며, 이미 몇달 전에 출판물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대 철학동호회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 올바른 철학적 입장을 정립하고 사회 변혁의 일익을 모색한다'는 취지로 올해 9월 천리안에 게시판을 개설했다. 게시판 내용은 회원끼리 소식을 알리는 '동지에게',생산현장의 소식이 게재되는 '현장에서', 사회단체의 활동 소식인 '조직에서', 시사 쟁점을 다루는 '사회를 바라보며'등으로 짜여있다. 현재 회원은 3백여 명에 이른다. 동호회측은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60여 명이 탈퇴했으나 50여 명이 새로 가입됐다고 밝혔다.

 사건이 알려진 뒤 천리안의 토론 게시판뿐만 아니라 또 다른 컴퓨터 통신망인 하이텔에도 여러 통신 가입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올라왔다."개폐론이 대두될 정도로 낡은 국가보안법으로 개인의 통신 활동을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동호회의 활동이 신중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데이콤측은 동호회 활동을 일시 중지시킨 것에 대해 전기통신사업법 제 53조'불온 통신의 단속' 조항과 그 시행령 제 16조 '불온 통신'조항을 제시한다. 또 천리안이 이용약관에 서비스나 전체 회원에게 불이익을 끼친 동호회는 몇단계의 경고 조처를 거쳐 폐쇄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을 들고 있다. 현대 철학동호회 회원들이나 일반 가입자들은 데이콤측에서 아무 연락도 없이 게시판을 폐쇄한 것은 전화통화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음란 게시물이나 상용 자료를 다루어 문제가 된 경우라면 폐쇄 같은 조처가 당연하겠지만, 정치적 내용이기 때문에 통신을 중단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천리안과 하이텔의 몇몇 동호회를 중심으로 '사용자 운동' 에 대한 논의가 조심스럽게 일고 있다. 컴퓨터 통신에 가입해 사용료를 내고 통신을 이용하는 고객의 처지에서 통신서비스사에 대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다. 이같은 논의는 그동안 천리안과 하이텔의 서비스 내용에 대해 가입자들이 품어왔던 불만에서 비롯하고 있다.
 현대철학동호회 운영진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이번 사건을 통신에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받기 위한 계기로 삼을 작정이다. 이들은 곧 'PC통신상의 정치사상 자유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구체적인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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