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왜‘죽은 신화’부추기나
  • 북경 · 이욱연(자유 기고가)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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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탄생 1백주년 열기 절정 … 현실 불만 돌리기 위한 우회 정책

중국 대륙에 모택동 열풍이 불고 있다. 12월26일은‘중국의 붉은 별’모택동 탄생 1백주년 기념일이다. 중국에 모택동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이미 작년 봄부터다. 일반 국민 사이에서 저절로 일기 시작한 이 열기는 올들어 중국 공산당과 정부 언론 학계가 탄생 1백주년 기념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한층 높아졌고 12얼 들어 절정에 이르로 있다.

모택동 영화 <井岡山> 일제 개봉  
 지금 중국의 하루는 모택동으로 시작해 모택동으로 끝난다. 텔레비전은 모택동 관련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수없이 내보내 시청자들이 대사를 외울 정도이다. <나와 毛주석> 등 헤ㅇ아릴 수 없이 많은 회고담이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다. 에드거 스노와 모택동의 우정을 다룬 <서해만기(西行漫記)>와 모택동의 초기 혁명 활동을 그린 <정강산(井岡山)>이 전국에서 일제히 개봉되었고, 모택동 사상을 조명하는 갖가지 학술대회와 기념 전시회가 하루에도 몇 개씩 열리고 있다. 모택동을 찬양하는 노래 테이프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가라오케에서도 역시 애창곡 순위 1위를 차지한다. 이 노래들은‘만세 모주석’‘ 위디한 모주석’을 되풀이하는 것이 전부인, 문화대혁명 때 유행하던 노래들을 요즘 감각에 맞게 닷 만든 것들이다. 전국 국영 신화서점에서도 당연히 모택동 관련 서적이 베스트셀러 1위다. 출판사들은 모택동 관련 책을 펴내기 위해 혈안이다. 모택동 사진을 새겨넣은 기념품은 티셔츠에서부터 순은 배지, 순금 손목시계, 공중전화 카드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뿐만이 아니다. 요즘 중국인들은 뭔가 상대방에게 다짐할 때 흔히 이렇게 말한다.‘모주석이 보증하건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모줙을 걸고 맹세할 수 잇다’ 등등. 지금이 아무리 등소평 시대라지만 적어도 12월만큼은 모택동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중국인들이 탄생 1백주년을 맞아 모택동을 기리는 데는 당연한 일면이 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모택동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그렇다.“우리는 신중국에 살고 있다. 신 중국은 누가 세웠는가. 인민 대중이 투쟁을 통해 세웠지만 그 지도자는 모주석이었다. 모주석이 없었으면 신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모주석이 아니었으면 누가 일본하고, 장개석하고 싸워 이겼겠는가.”모택동 탄생 1백주년을 맞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북경 시내한 병원에서 일하는 올해 쉰셋이라는 남자의 명쾌한 답변이다. 이는 중국인들이 모택동를 바라보는 가장 일반적인 시각이다. 문화대혁명 때 모택동이 범했던 잘못과 신중국을 성립시틴 공을 분리하거나 공적과 잘못을 저울질해 보지만, 그래도공이 더 많고, 그래도 모택동은 위대하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다.“아편전쟁(1840년) 이래 중국은 국토를 유린당했다. 우주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중화민족은 자존심은 처참하게 구겨졌다. 일찍이 중국사에 없던 굴욕의 시대였다. 모택동은 1백년 간의 치욕스런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중국 인민대학 조(趙) 아무개 교수의 분석이다.홍콩 중문(中文)대학의 저명한 중국철학자 노사광(勞思光) 교수 역시 최근 한 홍콩 잡지와의 인터뷰에서“객관적으로 볼 때 모택동은 민족 영웅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라고 진단하다. 모택동이 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서 건국을 선포하며 외쳤던‘중국 인민이 일어섰다!’는 선언이 중국인들에게 주는 호소력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고, 지금 모택동 열기의 한 원인도 여기에 있다고 했다.

모택동 시대에 비해 큰 인물이 없는 중국의 지금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모택동이라는 인물의 거인적인 풍모 역시 중국인을 끌어당기는 강한 자력이다. 지금 중국인들은 정신적 지주를 찾지 못하고 있다. 혁명 1세대 중 유일한 생존자인 등소평이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늙었다. 물론 시대가 큰이눌을 만들었겠지만, 중국인들은 모택동이나 주은래 · 주덕처럼 중국인들에게 나침반이 되어 주었던 큰별들이 이제는 없다고 여긴다. “모줙은 싸움만 잘했던 사람이 아니다. 시도 얼마나 잘 썼는가. 모택동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를 중국화한 독창적인 사상이고‘모순론’‘실천론’은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연수한다더라. 이런 위대한 모주석이 살아잇었을 때는 주석의 말 한마디면 온 중국인들이 똘똘 뭉쳤다.”중국인들은 정치 문제에 대해 외국인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기를 몹시 두려원한다.

천안문 사태 이후 더 심해졌다. 모택동에 대한 흠모가 요즘 정치인들의 사람 됨됨이 비판으로 바뀌고 있는 길목에서,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돈벌이 좋은 운전을 시작했다는 30대 후반의 택시운전사는 말문을 닫아버린다. 절강(浙江) 사범대학 진응(陣鷹) 교수는 중국인들이‘정신 우상’을 찾는 데서 모택동 열기의 원인을 찾는다.“모주석의 고상한 품격과 따뜻한 정감, 높은 지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을 뒤흔든 강한 의지와 입지전적 생애, 그리고 인민 · 조국 · 혁명을 위해 몸바친 혁명가의 형상에서 중국인들,특히 청년들이 자기 정신의 우상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리움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북경에 있는 한 대학 사학과 진(陣) 아무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모태공 시대의 일부 요소들, 예를 들어 종신간부제라든가 평균주의, 안정된 물가, 건국 초기 당간부들이 보여주었던 인민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가 강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택동 시대에는 지금 같은 물가 불안과 빈부 격차도 없었고, 돈만 아는 배금주의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나친 미화라는 비판도
이렇게 볼 경우 모택동 열기는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비판이 되고, 매우 청치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천진 남개(南開 )대학 정치학과 손전굉(孫傳宏) 교수는 모택동 열기의 원인을 분석한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현실에 대한 불만이 우회적인 표현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 모택동 열기이다.”개혁 · 개방 과정에서 나타난 갖가지 부패 현상들, 다시 말해 관료주의 매춘 범조 마약 등이 범람하고 배금주의가 판을 치는가 하면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무너지는 현상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모택동을 찾게 만들엇다는 것이다. 모택동 열기가 작년 초 등소펴의‘남순(南巡)’이후 개혁 · 개방이 본격화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점, 아룰러 개방의 심장부의 남부에서부터 시작되었드는 사실은 이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자주 방영된 모택동 영화 가운데 <모택동고 그의 아들> 이 있다. 그의 아들이란 한국전쟁에 지원군으로 참여했든 모택동의 큰아들 모안영(毛岸英)이다. 모택동은 큰아들을 유난히 사람했었다. 모택동은 이 아들을 전장으로 보냈다. 미군기의 폭격으로 모안영이 죽은 뒤 당간부들이 유해를 가져오려 하자 모택동은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내 아들만 데려올 수는 없는 일, 그냥 평양에 두게.”이 영화에 디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모주석은 자기 아들을 전장에 먼저 보냈고 아들이라고 하여 어떤 특혜도 없었다.’이러한 해석의 속뜻은 짐작이 가능하다. 당 · 정고관으로 있는 부모를 업고 멋대로 행세하는 일부 고관 자녀들, 그리고 그것을 조장하는 부모들에 대한 강한 항의인 것이다. 모택동 열기가 빚은 모택동과 모택동 시대에 대한 이런 미화가 과연 객관적인 사실에 비롯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모택동 열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지식인들은, 이런 미화가 과거의 일부 긍정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과장했다고 비판하다. 손전굉 교수 역시 같은 입장이다. 모택동 열기가 현실의 좋지 않은 현상에 대한 반발에서 나오다 보니 모택동과 그 시대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환상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기묘한 것은, 모택동 열기에 젖어 있는 중국인들이 갖는 일종의 이중 감정읻. 그들에게“그럼 모택동 시대가 지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가.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가”하고 물으면 열이면 아홉은 아니라고 답한다. 모택동 찬양을 늘어놓던 앞서의 30대 택시 운전사도“그때는 텔레비전 사는 건 꿈도 못 꾸었다. 지금은 수입도 많아졌고 생활도 편해졌다”하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발전한 도시에 사는 사람들, 가난했지만 순수했던 예날 시골 생활을 그리면서도 정작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심리인 셈이다.

개혁파, 모택동 열기 업은 보수파 견제  
모택동 열기로 가장 덕을 보는 것은 모택동 기념품을 팔아 한 몫 잡는 사람들과 중국 공산당이다. 등소평의 상품 경제 시대에 피어난 모택동 열기는 판매 가치가 높은 상품이 되었고, 이들 기념품 업자들은 돈벌이를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로 모택동 열기를 부채질한다. 중국 공산당이 모택동 기념 사업에 적극 나서는 이유는 모택동이 그들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 대대적인 기념 사업을 벌이는 것은 아니 것 같다. 모택동이라는 상품이 소비자에게 환영받는 틈에 유소기 중ㄴ래는 물론 이대조짖독수 등 초기 지도자들을 끼워 팔아 단단히 이득을 보고 있기 때분이다. 11월부터 중국 정부는 각급 학교와 직장을 상대로‘애국 영화보기 운동’을 폭넓게 벌이고 있는데, 여기 선정된 1백편의 영화는 거의 모잭동과 혁명 지도자들, 그리고 당의 위해한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애국주의 선양을 위한 갖가지 활동도 최근의 반부패 운동과 더불어 크게 늘었다.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 열기를, 당의 업적을 선전하고 당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의 결집을 꾀하며 애국주의를 불러일으킬 기회로 삼는 것이다.

물론 당내 개혁파는 보수파가 모택동 열기를 업고 기세를 올리는 것을 막는 데도 주의를 기울인다. 모택동이 초기에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을 중시했다는 점을 부각하는 한편《등소평 문집》3권을 출판하여‘인민내부의 계급투쟁은 끝났다’‘빈곤과 평균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다’면서 문혁 시대 평균주의를 비판하고 개혁 · 개방 이론에 대한 선전을 강화하는 양동작전을 구사한다. 이 때문에 지금 중국에서는 등소평 바람이 불고 있다. 등소평 개혁정책 실시 15주년이 되는 금년 12월을 앞두고 발간된《등소평 문집》의 제 3권은 그가 전성기인 82년 9월 ~ 92년2월 쓰고 말한 문건 1백19평를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텔레비전에서는 당고급 간부들이 이 책을 읽는 모습을 방영했고, 전국의 당원들에게는 학습 지시가 내려졌다. 관영 매체에는 이 책의 주요 대목이 연일 대서특필됐고 그의 이론을 연구하는 연구소도 설립됐다. 강택민 국가주석은 11월2일 특별 당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등소평의 지시가 장래 중국 지도부의 모든 지도부의 모든 부문을 지도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여 지도이념으로서의 등소평주의를 공식화했다. 또 살아 있는 지도자로서는 이례적으로 막내딸이 쓴 전기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비록 모택동 열기만큼은 아니지만 평소 등소평이 개인 숭배를 극력 반대해온 점에 비추어 보면 이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등소평 사후 새 정치세력 등장할 수도
중국인에게 모택동은 이미 신이다. 모택동 사진을 집이나 가게 혹은 차 안에 걸어두면 그것이 불행을 막아주고 행운과 부를 가져다 준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미 모택동교의 신도이다. 이런 모택동 열기에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지시긴들 특히 문화대혁명 때 시골로 하방(下放)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던 사람들이다. 그들 가운데 중국문화을 연구하는 50대 후반의 한 북경 사범대학 교수는“중국인들은 벌써 무놔대혁명을 잊었다. 과거의 비참한 역사에 대한 건망증과 관용이라른 중국민주의 고질병이 도지고 있다.

모택동에 대한 신비화는 아직도 중국에 과학과 민주의 계몽 정신이 부족하다는 반증이다”라고 말했다. 에드거 스노는 모택등을 몽상가이자 정치가 · 이상가 · 시인 그리고 혁명적 파괴자이자 창조자라 불렀다. 례닌의 도앙이 무너지고 등소평 시대가 역사의 대세로 된 오늘에도 모택동은 여전히 천안문 한복판에 있다. 중국인들에게 모택동은 영원한‘마오 주시(毛主席)’이다 . 마오 주시라는 호칭은 ‘주(은래) 총리’와 더불어 중국인들에게는 이미 자연스럽게 길든 언어 습관이다.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중국인들 입에 살아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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