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사회 부메랑 박사 실업자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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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38세. 명문 ㅅ대학 정치학과 졸업. ㅅ대학 대학원 석사.미국 명문 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 취득. 그 대학에서 2년 동안 연구원 겸 교수로 재직. ㄱ씨의 대체적인 이력이다. 그의 현재 직업은 무엇일까. 실업자이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 시간강사이다. ㄱ씨는 91년 12월에 귀국해 이듬해 3월부터 시간강사로 국내 대학교단에 섰으나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때학 저 대학을 전전하는‘보따리 장수’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ㄱ씨가 출강하는 대학은 서울의 또 다른 ㅅ대와 지방 국립대. 두 대학에서 각각 세시간씩 교양 과목인 정치학 개론과 다른 전공과목을 가르친다.

이렇게 해서 받는 강의료는 정확히 32만 4천원. 그것도 두 대학의 시간당 강의료가 1만2천원~1만5원으로 비교적‘후한’편이어서 가능한 금액이다.“강사료가 1만원 이하인 곳도 부지기수이다. 심지어 어느 사립대의 강사료는 7천원밖에 안된다”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ㄱ씨의 고민은 여름 · 겨울 방학 때 더욱 깊어진다. 강의가 없으므로 생계가 더 막연해 지는 것이다. 그는“부모로부터 얼마간 원조를 받고 중고등학생에게 과외 교습을 하거나 학원에서 강의해 방학을 그럭저럭 나고 있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교육부 · 재단 · 교수 모두 외면
 ㄱ씨 같은‘박사 실업자’문제가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얘기는 국내외 박사 학위 취득자가 급증한 80년대 중반부터 나왔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나 분석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채 방기되다시피 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반 연간 학술지 《사회비평》에 실린‘박사 실업자:학력 사회가 밀어낸 지식인’은 주목할 만하다. 김용학(40 · 연세대 ·사회학) 서병훈(38 · 숭실대 ·정치학) 교수 등이 쓴 이 논문은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사회과학 분야 박사 실업자 2백80명에게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삼고 있다.

이 중 유효 응답자는 전체 대상자의 34%에 해당하는 95명. 설문 대상을 사회과학 분야로 국한한 것이 이공계나 인문계에 비해 상화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3만3천여 명으로 추산되는 시간강사 중에서도 박사 실업자들은 더욱 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신세다. 시간강사 노릇을‘교수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으로 보기에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너무 무겁다. 부양해야 할 아내와 자녀까지 거느린 처지에 언제까지고 부모 · 처가에 손을 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박사 실업자들이 가장 버거워하는 것은 객관적인 조건보다 정신적 동요이다. 전체 응답자의 42%가 정신적 · 심리적 불안감을 가장 큰 연수 장애 요인으로 꼽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ㅇ대학과  ㅅ대학에서 3년째 강의해온 ㅇ씨(사회학)는“가족이나 주위의 기대와, 앞날에 대한 불안감을 견뎌내기가 가장 힘들다”라고 말한다. 시간강사 노릇 3년 하다 보니 대학원생이나 교직원들로부터 당하는 갖가지 수모쯤은 체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의하는 대학 안에서 주차위반 딱지를 떼이거나, 도서관 출입을 통제당하거나, 교수 휴게실에 들어갔다가 쫓겨나거나 하는 일은 수모의 일부일 뿐이다. 구내 1 백20여 4년제 대학의 교수는 법정교원 수의 50%를 겨우 넘는 수준이다. 나머지 48%는 시간강사의 몫. 아직은 대학에 박사 실업자를 수용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대다수 대학이 전임교수 채용 대신 시간강사를 활요하는 방식을 통제하는데 대단히 유용한 도구인 셈이다. 박사 실업자를 포함한 대학의‘보따리 장수’들은 교육부와 대학 경영자, 대학 교수 3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여러 대학의 ‘2천년대 발전 계획’에 포함된 전임 교원 확충이나‘박사후 연구생 제도(Post Doctor)’등이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서병훈 교수는“사회 · 정책적 외면 속에서 적잖은 박사 실업자들이 육제적.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 하루빨리 정책 대안을 모색하지 않는 한 한국 교육의 위기 상황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金相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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