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BBS 있습니다 많이들 놀러오세요”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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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PC통신 인구30만명… 청소년 ‘음란문화’ 온상

 


 컴퓨터 ? 세계에서는 꽤 알려진 프로그래머 안대혁씨(28·한메소프트 책임연구원)는 요즘 괜히 신경쓰이는 일이 한 가지 생겼다. 주변 사람들이 “혹시 너도 컴퓨터 앞에 붙어앉아 ‘그런 것’ 즐기는 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노골적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지만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안씨는 “정작 아이들이 ‘사각지대’에 방치된 이유는 변화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그리고 컴퓨터에 대한 어른들의 무지 탓이다”라고 잘라말한다.

 안씨의 고민은 최근 잇따른 두 가지 사건에서 비롯됐다.

 6월14일 서울 도봉구 미아동에 사는 이××양(14·중2)이 자신의 집 장릉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 삼보컴퓨터에서 제공하는 ‘대화마당’에서 PC통신을 할 때 대화도중에 자신을 성적으로 모독하는 발언이 끼어들자 이에 격분,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 보도된 바와는 달리 이양은 평소 PC통신을 알게 된 많은 남자와 직접 만나 사귀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대화에 끼어들어 “너는 걸레다” 등의 메시지를 남김 사람도 PC통신으로 알게 돼 몇 번 만난 적이 있던 남자친구였다.

 6월 27일, PC통신으로 청소년들에게 음란 프로그램을 제공해온 세칭 ‘야동(야한 동호회란 뜻)이 검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구속 1명, 불구속입건 2명, 수배 5명. 그동안 야동은 뜻있는 PC통신자들 사이에서는 “통신 문화를 해치는 암적 존재”로 지탄을 받아온 터였다. 우리나라에서 컴퓨터를 이용한 범죄 중 ’음화 반포 및 소지‘협의로 구속된 사건은 이게 처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구속입건된 2명은 나이 어린 학생들이었다. 이일군(17·고2)과 장기준군(14·중2). 이들은 각각 음란 디스켓을 2백매씩 보유하고 있었으며, 검찰에 검거될 EO까지 몇 개월 동안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해왔다. 특히 장군은 실력이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컴퓨터 박사’로 알려져 있다. 이들이 사용한 수법은 매우 간단하다. 데이콤이나 한국PC통신 등 공인 BBS(전자게시판)에 “야한 BBS가 있습니다. 놀러오세요”라는 식의 광고를 내고, 접근 해오는 누구에게나 음란 디스켓을 전송해주는 방법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이 컴퓨터 단말기 안에서 이루어진다. 직접 만나는 일은 결코 없다.

 

하교시간 이후는 PC통신 ‘마의 시간대’

 이번 사건을 처리한 서울지검 남부지청 정주환 수사관은 “이 두 학생 모두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오히려 자신의 컴퓨터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죄인 줄도 모르고 한 행동이라 천진난만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컴퓨터가 본래의 교육적인 목적에서 벗어나 탈선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음란 디스켓뿐만이 아니다. 한때 ‘간호원의 비밀’ ‘깊고 깊은 곳’ 등 이름만 들어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저질 소설이 PC통신을 하는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했었다. 심지어 어떤 사설 BBS업자는 공인 BBS에 필자를 공개적으로 모집, 수백명의 중·고생들이 내놓은 글을 한데 모아 저질 소설집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저질 소절집은 한동안 PC통신망을 통해 광범위하게 돌아다녔다고 한다.

 PC통신 이용자 대부분은 이번 사건을 “정보화 사회로 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역기능”이라고 평가한다. PC통신 구조 자체가 그런 역기능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 컴퓨터에 5만원쯤 하는 모뎀을 부착하고 전화기 한 대만 갖추면 당장 상대방과 PC통신을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사설 BBS를 개설할 수 있다.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PC통신으로 욕설 등 험담이나 음람물을 주고받는 방법은 ‘음란전화를 거는 방식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음란 전화와 마찬가지로 근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PC통신 업체에서도 검색요원을 두고 야동 광고나 오염된 언어를 잡아내고 있다. 그러나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내용이 올라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후조치만 가능하다. 그나마 프로그램 종류가 워낙 다양해서 모든 걸 다 검색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하튼 사건이 터지자 각 통신회사 전자게시판을 메우다시피 했던 야동 광고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요즘은 야동 운영자를 비난하는 문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PC통신 영업부 김인호 대리는 “모든 게시중에서 야동이 썰물 빠져나가듯이 사라졌지만, 여론이 잠잠해지면 다시 극성을 떨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야동이 더러 눈에 띄기도 한다.

 국내 PC통신 인구는 이제 30만명에 육박한다. 한국PC통신의 코텔에만 약 20만명, 데이콤의 PC서브에 3만7천7백여명, 포스데이타의 포스서브에 1만명, 한국통신의 KT메일에 약 1만여명, 코리아네트의 인포서브에 1만여명이 등록되어 있다. 이밖에 국내에만 5백여개로 추산되는 사설 BBS까지 합하면 그 인구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데이콤 등 관련업계는 이 인구의 약 70~80%가 청소년층이라고 추정한다.

 “오후 4시부터 새벽 3~4시까지 PC통신회선은 거의 불통입니다. 청소년들이 붙들고 놔주질 않기 때문이죠. 어쩌다 접속이 돼서 게시판에 들어가봐도 엉망입니다. 되지도 않는 말장난에 온갖 욕설을 퍼붓고 도대체 예의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삼보컴퓨터 해외사업부 묵현상 부장은 PC통신을 이용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다. PC통신 이용자들은 오후 4시 이후를 ‘마의 시간대’라고 부른다. 결국 밤에는 PC통신 이용하기를 아예 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청소년들이 수업중인 낮에는 상대적으로 연결하기가 수월하다. 한국PC통신이 코텔 이용자들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결과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 사이에 전체 이용자의 약 66%가 몰린 것으로 밝혀졌다(도표 참조). 한국PC통신측은 “청소년 이용자들이 밤새도록 PC통신에 매달리기 때문에 일반 이용자들이 접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분석한다. 데이콤 등 다른 회사의 PC통신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밤 늦은 시각부터 새벽까지는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잠든 시간, 우리 청소년들은 PC통신에 매달려 있다. 이런 현상은 방학 기간에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이전에 청소년들 사이에 나돌던 음란만화나 포르노 비디오테이프의 자리가 PC통신에 의해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시대 영웅은 프로그램을 잘 짜는 사람”

 PC통신의 주요 기능 본래 증권시세 일기예보 취업소식 등 각종 생활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DB) 이용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부수적 기능인 전자게시판이나 대화 코너만 집중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PC통신이 코텔 이용자를 대상으로 여론 조사한 결과 데이터베이스 활용도는 전체의 19.4%에 불과하고 전자게시판이나 잡담 프로그램을 주로 이용하고 있음이 밝혀졌다.(도표참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요즘 청소년들은 컴퓨터 세대이다. 단말기 앞에 붙어앉아 얼굴도 모르는 상대방과 대화하는 재미, 자신의 힘으로 어려운 프로그램을 짜는 재미, 또 가끔씩 사설 BBS에 접근해 자극적인 음란물을 보는 재미에 청소년들은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 이들은 컴퓨터 앞에 붙들어매는 힘도 바로 ‘재미’이다.

 텔레비전은 제멋대로이지만 컴퓨터는 똑같이 실감나는 영상을 보여주면서도 조작과 통제가 가능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컴퓨터에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전화 한통이면 목소리도 듣고 빨리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데도 청소년들이 굳이 PC통신을 애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혼자 끙끙 앓아 가며 하나씩 독학으로 컴퓨터를 깨우쳐갔던 윗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PC통신을 통해 ‘한수’ 배울 수도 있다.

 “우리들 사이에서 박남정이나 뉴키즈 온더블록은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웅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잘 짜는 사람, 내가 갖지 못한 프로그램을 많이 소유한 사람입니다.” 국민학생 때부터 컴퓨터를 익혀온 한영재군(21·대학 2년)의 말이다. 즉 컴퓨터에 익숙한 청소년드에게는 ‘연예인’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청소년들은 일찍부터 컴퓨터와 친밀해져 있고, 또한 그 속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음란 소프트웨어에 탐닉하거나 PC통신으로 언어폭력을 일삼는 이도 바로 이들이다. 컴퓨터 전문가 이상윤씨는 “음란 소프트웨어에 접촉한 청소년을 찾는 것은 서울에 사는 사람 중에 한강을 본 사람을 추려내는 것과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 지금 청소년들은 컴퓨터의 두 얼굴을 동시에 대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 중구 중림동에 사는 김인숙씨(35)는 큰 딸(10)이 혹시 컴퓨터에서 ‘이상한 것’을 배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서 딸이 다니는 학교의 어머니회에서 상의 끝에 올 여름방학 때 회원들과 함께 간단한 컴퓨터 교육을 받기로 했다. “기본요령 정도는 익혀놔야” 딸아이가 컴퓨터로 무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대하는 대다수 부모들의 태도는 안이하기 짝이 없다. 이제껏 실상을 모르고 있다가 기껏 한다는 게 자식으로부터 컴퓨터를 뺏는 일이다. 우리나라 PC통신의 선두주자 ㅎ신문의 한 간부는 사건이 터지자마자 아들에게 사준 컴퓨터를 압수해 버렸다고 한다. 빈대를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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