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전가의 보도' 개혁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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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당, 보신주의·충성 경쟁으로 내우외환…돌파용 카드 없어 고심

민자당 金鍾泌 대표는 12월9일 한국발전연구원(원장 安武爀)이 주최한 조찬 강연회에서 '우리는 21세기를 생각해 본다'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의 이 날 강연은 대표 취임 이후 처음으로 외부 강연회에 참석했다고 해서 눈길을 모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발언 내용이다. 그는 쌀 개방과 관련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끝나면 모든 상품에 대한 시장 개방이 원칙적으로 불가피해진다. 더구나 쌀의 주산지인 아칸소 주 출신 클린턴 대통령이 정치를 계속하는 한 쌀 재배·수출업자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공개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했다.

 김대표 발언으로 따지자면, 그는 클린턴이 쌀 주산지 출신이라서 곡물상의 지속적인 압력을 받고 있고, 그같은 처지를 한국에 적극 반영하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김대표도 쌀 개방논의 초기 단계에서는 선문답처럼 '관세화는 물론 최소시장 접근도 허용할 수 없다'는 정부 방침만을 되뇌었다. 따라서 그의 이 날 발언은 자기가 명백한 직무유기를 범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행정부/민자당 대부분이 '님비족'
 물론 김대표는 11월30일 광주에서 민자당 전남/광주 지역 지구당위원장들과 환담하면서 여권 인사로서는 처음으로 쌀 개방 가능성을 시사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발언도 쌀 개방 적극 대처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다분히 청와대를 의식한 '면피용' 성격이 짙다.

 사실 따지고 보면 김대표 혼자만 이런 이중적 형태를 보인 것이 아니다. 행정부는 물론 민자당 당직자들 거의 전부가 '님지(Not In My Back Yard)족'처럼 자기 손만 더러운 물에 담그지 않으면 된다는 손빼기로 일관한 것이 사실이다. 黃明秀 사무총장 역시 처음에는 "대통령이 (쌀을) 개방 안한다고 했으면 안 하다고 믿어야지, 유돈 한쪽(민주당)만 이상하게 트집을 잡는다"라고 오히려 민주당을 이상한 사람들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이제 언론에서 돌아가는 정세를 잘 정리해 길잡이 구실을 해야 할 것이다. 언론에서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를 써야하는 것 아니냐"고 언론이 쌀 개방의 총대를 메달라고 노골적으로 주문하는 촌극을 벌였다.

 김대표와 황총장의 이런 태도들은 한마디로 말해 보신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와 청와대만 뛰고 당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하고 있다' '당이 너무 무기력하다'는 소리가 나온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이번 새해 예산안 처리 과정 및 쌀 개방 논의에 대한 민자당의 대처 과정을 이를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다.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민자당의 무기력과 발뺌주의에 대한 김대통령의 불만은 이제 되돌릴 수 없을 정도의 수준에 올라섰다. 최근에도 김대통령은 당 외곽의 비중있는 인사와 두번에 걸친 단독면담을 통해서 "정말 못마땅하다"는 극도의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은 '사정 거품'이 조금씩 걷히면서 이제는 당이 알아서 앞장서 주기를 기대했는데, 당이 조금도 김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서 불만이 조금씩 증폭되다가 이번 날치기 파동으로 인해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쌀 개방이나 국제화와 관련해서도 청와대는 당이 먼저 나서서 개방의 불가피성을 적극 주장하면 나중에 못이기는 척하고 슬그머니 쌀 개방을 발표하는 수순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민자당은 김대통령이 입을 정치적 타격과 상처를 미리 막아주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개방 불가피론만을 잔뜩 강조해 김대통령 운신 폭을 더욱 좁혀 놓았다.

 새해 예산안 처리도 마찬가지다. '법정시한내 처리'라는 김대통령의 의지가 몇번씩이나 강조된 만큼, 민자당은 이의 처리를 다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청와대의 시각이다. 金重緯 예결위원장은 김대통령으로부터 '시원치 않은 사람'이라고 질책을 들었다는 후문이다. 민자당은 金 德 안기부장의 국회 예결위 출석 때부터 민주당의 주장에 밀리기 시작하더니 예산 국회 내내 민주당 공세에 끌려다니다가 내줄 것 다 내주고, 날치기 때문에 욕 먹을 것 다 먹고, 그러면서도 정작 본회의 날치기는 성공도 못시키는 미숙함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이는 가뜩이나 밀리기 싫어하는 김대통령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민자당 내에서는 金塋?? 총무를 비롯한 총무단을 성토하는 분위기지만, 막상 김총무는 "어느 누구 하나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당내 인사들의 보신주의를 꼬집고 있다.

약효 떨어진 '개혁'이라는 만병통치약
 청와대로서는 말만 집권 여당일 뿐 집권당으로서의 국정운영 능력 및 위기관리 능력이 없다는 불만을 터뜨릴 만하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보면 민자당의 이런 무기력 증세는 김대통령의 통치 형태가 키워온 측면도 있다. 국회와 당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고, 오로지 청와대만 '빛'을 발해야 한다는 그간의 분위기가 이런 사태를 자초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당내 민주계가 제일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은 이른바 개혁성의 퇴색이다. 그동안 민주계는 개혁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이리저리 써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민주계 입장에 반대하면 반개혁적인 것처럼 낙인 찍히게 되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개혁 명분을 자파 세력 강화에 적절하게 사용해 왔다. 그러나 이번 일련의 사태로 인해 개혁 깃발이 더 이상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 측면이 강하다. 물론 김대통령은 '국제화 · 개방화 시대에 따르는 개혁'을 강조하는 있지만 당이 얼마나 힘을 써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민주계가 왜 개혁성을 그들의 '전가의 보도'로 내세우기 힘들어졌는지는 황명수 총장의 태도만 보아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李萬燮 국회의장을 연일 '비겁자' '혼자만 살려는 사람'이라고 비난한 황총장은 8일에도 "대통령을 헐뜯는데 한마디 제동도 안걸다니 이의장은 대한민국 국회의장인가, 미국서 수입된 의장인가"라고 흥분하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담당자들 입에서 나오던 말들이 이른바 개혁정당 당직자 입에서 조금의 변화도 없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황총장의 이런 발언은 김대통령을 의식한 충성 경쟁으로 봐준다 해도 지나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개혁 대 반개혁이라는 양분구도의 퇴색은 근본적으로 청와대를 비롯한 민주계의 입지가 더 좁아질 것임을 뜻한다. 청와대가 현재의 난관을 돌파할 만한 마땅한 카드가 없는 것도 이런 정황에 기인하는 측면이 강하다.

 당에 대한 청와대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당에서는 김대표 · 황총장 체제가 내년 5원까지 유지되리라는 관측이 강하다. 내년 4월 이전에 처리해야 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안 국회비준에 대비해 '돌파용' 라인을 구축할 수도 있으나, 그럴 경우 대야 전략에 오히려 혼선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대안 부재론 속에서 '김·황 제제'가 유지되는 것처럼, 정국 운영과 관련해 청와대와 민자당의 궁색한 입장도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趙瑢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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