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아닌 ‘농민·농촌’ 정책 펴야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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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씩 생산비 절감해 경쟁력 키우도록…이농 방지가 급선무

2004년까지 현재 5% 수입관세 적용, 최소시장 접근폭 1~4%. 결국 주사위는 그렇게 던져졌다. 첫해 최소시장 접근 ‘0%’를 관철하려던 노력도 미국측의 단호한 태도로 물거품이 됐다. 95년, 이땅에 마침내 외국쌀 39만섬이 상륙하게 된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관계장관회의 ·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고 뒤늦게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 그대로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은 소와는 견줄 수도 없는 ‘우리 국민의 피요, 살이며, 혼이다’.

 지난해 1월5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한국 소비자단체들이 미국의 쌀 개방 압력에 항의하며 내걸었던 이러한 구호는 이제 전국 농민들의 피맺힌 절규로 변했다. 지난 주말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30여 시·군에서는 농민 노동자 학생 등 2만여 명이 참가하여 ‘농산물시장 개방반대’ ‘국민투표 실시’ 등을 주장하는 시위를 했다. 전남 나주시에서는 지역 농민들이 주민 등록증을 반납하는 시대가 벌어졌다.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장원석 교수(단국대·농업경제학)는 “지금 농민들은 좌절감과 허탈감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농업구조 조정이나 농가 지원대책을 논의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라고 말한다. 역대 정권에게 희생만을 강요당해온 농민의 좌절과 분노가 정부의 쌀시장 개방 결정을 맞아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농협의 한 직원은 분개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햇다. “지금은 대안 제시보다, 협상에서 맥없이 쌀시장을 내준 정부의 무책임과 무능을 규탄해야 할 때이다. 야당 주장처럼 정부가 쌀시장 개방을 미리 알고서도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더더욱 성토할 일이다.”

 역시 쌀시장을 개방하기로 한 일본은 개방압력이 시작된 60년대 후반부터 대책을 착실히 세워 지금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다. 대만 또한 일찍부터 농업구조 조정을 해와 경쟁력 확보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은 없다. 하루라도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한국 농업·농촌은 붕괴한다. ‘돌아오는 농촌’은커녕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농촌’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쌀시장 개방으로 농업 붕괴에 대한 위기감이 심해지면서 가장 염려되는 것은 농민들의 급속한 농촌 이탈이다. 80년 1천83만명이던 농촌 인구는 92년 5백70만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해마다 41만여 농민이 땅을 버린 셈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은 농촌의 공동화가 더욱 심해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연구원에 따르면 2000년에는 청장년층(15~49세) 농업인구가 50만, 50세 이상 고령 인구가 1백53만5천명이 될 것으로 보인다. 획기적인 농업 정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급속한 이농현상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세우는 것이 제일 급하다. 지난 9일 김영삼 대통령이 사과문을 발표한 것은 그러한 대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만, 여러 모로 미흡하다.

 김기환 대한무역진흥공사 이사장은 무엇보다 농촌구조 조정을 해야 하는데, 이는 ‘농업’ 정책보다 ‘농민·농촌’ 정책을 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우리 농정은 농민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농업이라는 산업을 무조건 유지하려는 데 집착한 것이었다. “농민의 취업·교육 및 의료 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농촌의 삶의 질이 도시의 그것에 버금가는 것이라야만 농민이 농촌에 남는다.”
 쌀시장 개방으로 한국 농업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은 열악한 한국 농업 환경으로부터 나온다. 현재 국내 쌀값은 80kg들이 한가마당 12만원. 외국 쌀값은 그 4분의1 수준인 3만원 안팎이다. 애초부터 경쟁이 되지 않는다. 많은 농업 관련 전문가가 정부에 쌀 수입 및 조달 창구를 독점 관리하라고 주문하는 것도, 민간 시장에 유통 기능을 맡길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시장 교란 사태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쌀값이 유독 높은 것은 생산비가 높기 때문이며, 그것은 영세한 영농 규모와 취악한 농업 구조 탓이다.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경지면적 1.2ha는 미국의 1백80ha, 유럽공동체의 9ha와 비교할 때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경지정리율 · 농기계보급률까지 견주면 더욱 보잘것없다. 이처럼 불리한 경쟁 조건을 대등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구조조정 정책이 필수이다. 정부는 총규모 42조원에 이르는 농어촌 구조개선사업을 당초 목표보다 3년 앞당겨 98년까지 마무리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으나, 쌀시장 빗장이 열리게 된 이상 계획 재수정이 불가피할 것 같다. 10년으로 결정된 관세유예기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 동안에도 해마다 1~2%씩 생산비를 절감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키울 수가 없다. 국내의 인플레이션이 높아지면 그만큼 더 많은 생산비를 절감해야 하는 부담도 안게 된다.

 농민 한사람이 경작하는 농지를 넓히는 ‘규모의 영농’이나 경지 정리를 포함한 생산 기반 정비, 영농 기계화 등은 한국 농업구조를 조정하는 데 매우 긴요한 대목들이다. 정부는 6월에 내놓은 선농정 추진시책에서 이미 △96년까지 기계화, 98년까지 경지 정리를 끝내고 △98년까지 생산비를 40% 절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같은 청사진은 쌀시장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쌀의 국제경쟁력 확보가 중요한 과제라는 정부의 인식만은 여전하다.

 “농지소유 제한 풀자”
 아무리 농업구조 조정을 하고 영농 기계화를 이룬다고 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단위 경작면적을 확대한다는 복안 또한 그 한계가 명백하다. 지난 9일 정부는 영농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현재 10ha로 돼 있는 농지소유 상한 기준을 20ha 이상으로 늘리고, 농업생산법인 경우 1백ha까비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어쨌든 땅은 좁고, 농업 진흥지역 외의 농토까지 다른 용도로 바뀌는 추세이다. 광복후 지금까지 금과옥조처럼 여겨 왔던 ‘경자유전’ 원칙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전면적 농정개혁만이 살길이다’. 대다수 농업 전문가의 공통된 의견은 그렇다. 대책을 마련해놓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몇몇 부분을 개선하는 데 그쳐서는 ‘농촌 살리기’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농정 개혁의 큰 줄기는 △농지정책 △양곡정책 △농민정책이다.

 김기환 박사는 농지 개혁과 관련해 “정부가 밝힌 20ha 이상의 농지소유상한제도 자체가 불필요하다”라고 말한다. 농지 규제를 풀어 농업의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곧바로 농지소유 제한을 풀지는 않겠지만, 농업진흥지역 밖의 농지를 전용하는 것이나 한계·유휴 농지를 이용하는 데 대한 규제는 완화할 것으로 보인다.
 쌀시장 개방으로 가장 큰 변화를 겪게 된 것은 양곡 정책의 근간인 추곡수매 제도이다. 이 제도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감축대상(7년간 20% 감축)일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었다. 특히 73년 물가를 안정시키고 공급난을 해소한다는 목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한 이중곡가제는, 농민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한 채 오히려 자유로운 유통구조를 왜곡하고 국제경쟁력을 악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제도는 그동안 7조원에 가까운 양곡관리기금 적자와 1천3백만 섬이 넘는 재고를 남겼다.

 정부는 앞으로 쌀의 질을 높이고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데 주력해 외국 쌀보다 비싸더라도 소비자들이 국산 쌀을 찾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쌀을 비롯한 우리 농산물의 고급화·차별화를 위해 △원산지 표시제 △품질 인증제 △검역제도 정비 등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농협도 쌀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모두 1천64억원을 들여 미곡종합처리장을 현재 63곳에서 1백13곳으로 늘릴 계획이다.

 농민 정책의 핵심은 농촌 복지제도 확충에 있다 정부는 농어가 자녀 중 고교생의 입학금 · 수업료를 전액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중이고, 95년부터 2000년가지 60만 노령 농민에게 모두 2조3천5백억원을 지급하는 농어민 연급제도를 도입할 방침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필요한 재원을 ‘농촌부흥세’와 농촌복권‘을 신설해 조달할 방침이어서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권영근 한국농어촌연구소 부소장은 “수입농산물 판매 차익금 전용, 마사회의 농림수산부 환원, 한국담배인삼공사의 농림수산부 이관 등으로 재원 조당이 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우리 쌀 살리기 운동‘도 한 방안
 이밖에도 농정기구에 대한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해마다 농촌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농업 관련 공직자는 지난 10여 년간 오히려 12%나 늘었다. 가뜩이나 농어촌구조개선사업 재원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처지에서 이들에게 지급하는 1조원 이상의 인건비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농산물검사소·잠사소·자재검사소·검역소·종자보급소 등 그 기능이 거의 없거나 중복된 기관은 통·폐합 도마에 올려야 할 것이다.

 쌀이 우리 국민의 ‘피요 살이며 혼’인 것처럼, 쌀시장 개방은 농민만의 문제가 아닌 국민 모두의 문제이다. 지금이야말로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할 때 강조한 ‘고통 분담’이 가장 긴요한 때이다. 김성훈 교수는 “외국산 쌀보다 값이 비싸더라도 우리쌀을 소비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와 소비자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말한다. 국내 쌀 생산이 중단되고 농촌이 붕괴하면 실업자·주택·교통·공해·환경 오염 문제 등이 더욱 악화하고, 이는 곧 농민뿐 아니라 도시 소비자들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 쌀은 물론 외국 쌀에 대한 소비자의 감시 기능을 강화 해야한다. 수입 농산물 및 수입식품의 검역 문제는 국민 전체의 건강과 생명에 직결되는 것이므로 검역 과정에 소비자 단체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놓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처럼 농민과 도시민이 함께 ‘우리 쌀 살리기 운동’ 같은 시민운동을 벌이는 것도 한 방안으로 제시된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은 창립 2년 만에 밀 생산면적으로 5백배나 불려놓았다(1만평→5백만평).
 정부는 쌀시장 개방으로 2002년가지 한국 농촌에 돌아올 피해액이 11조6천억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금액에는 농민이 입게 될 정신적 피해액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김영삼 대통령은 9일 국민에 대한 사과문을 통해 농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획기적인 농업 정책을 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그 획기적인 정책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농민의 신뢰를 다시 얻기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金相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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