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통신/“클린턴 쪽에서 전화 걸도록 하라”
  • 워싱턴 · 김승웅 특파원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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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에 있었던 김영삼 · 클린턴 대통령 간의 전화 교신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통화의 시점이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핵과’ ‘쌀’이 통화의 초점이 됐음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두 나라 정상이 어떤 복안으로 얼마만큼 강도 있는 대화를 나눴으며, 또 상대로부터 무슨 보장을 각각 따냈느냐에 있다. ‘핵과 쌀 문제에 관해 협의했다’고 밝힌 청와대측 논평만으로는 미흡하다. 지금의 시국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논평을 백악관 쪽으로 돌려 본다. 두 정상 간의 전화 교신 직후 백악관의 여성 대변인 D.D. 마이어는 통화 내용을 묻는 질문에 관해 구체적으로 밝혔다. “핵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김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두가지 사항을 분명히 밝혔다. 첫째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완벽한 사찰, 둘째는 남북 상호 간의 대화 재개다. 이 두가지 전제가 선행되지 않는 한 북한측 요구를 수락해서는 안되다는 요청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대통령에게 위의 두가지 전제를 선행할 것을 다짐했다고 마이어는 부연했다. 마이어가 사용한 ‘다짐하다(Reaffirm)'는 말 속에는 (약속을) ’거듭 단언한다‘ 또는 ’재확인한다‘는 뜻이 함께 담겨 있다.

접촉 창구 모두 가동…48시간 내에 통화 성사시켜
 전화 교신은 25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두 정상 간의 대화는 서울 쪽에서나 백악관 쪽에서난 일절 새어 나오지 않고 있다. 알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두 정상과 청와대측 통역, 그리고 통화하는 자리에 함께 있던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네 사람뿐이다.
 전화 통화가 이루어진 배경을 캐보면 자못 긴박감까지 느껴진다. 일요일인 5일 밤 한승수 주미대사는 정종욱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다. 서울 시간으로는 월요일(6일) 오전. 그 전날 <뉴욕 타임스>가 북한측 제안 내용을 상세하게 특종 보도해 그 여파가 워싱틴과 서울을 긴장시켰던 시점이었다. 통화의 요지는, 김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싶어하니 클린턴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도록 하라는, 일종의 훈령이었다.

 한대사는 반기문 정무공사를 불러 ‘교신 외교’ 방안을 협의했다. 미국 시간으로 얼요일 아침이 되자 한대사는 백악관측 접촉 창구인 앤서니 레이크 국가안보보좌관을, 반공사 역시 그의 상대적인 워드먼 차석 보좌관을 각각 접촉해 김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때마침 북한측 요구 사항에 대해 수락 여부를 결정할 각료급회의가 그 날 백악관에서 열리는 만큼 이 회의 직후가 클린터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통화 시간임을 파악해 냈다.
 그러나 미 국무부가 문제였다. 워싱턴 한국대사관과 백악관과의 접촉은 비상 응급용 접촉에 불과할 뿐, 정상적인 접촉 창구는 국무부이기 때문이다. 국무부를 뛰어넘어 최구위 기관과의 직교섭은 외교 의전을 크게 무시하는 일로, 워싱턴 주재 해외 공관들이 제일 기피하는 외교 관행이기 때문이다.

 한국대사관은 국무부와의 접촉 창구를 모두 가동했다. 한국대사관과 국무부의 접촉 창구는 직급과 서열에 따라 4등급으로 단계화 돼 있다. 북한 핵문제에 관한 한 대사의 상대역은 현재 북한과 고위 회담을 벌이는 미측 주역인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차관보 로버트 갈루치다. 반기문 정무공사의 상대역은 북한과 실무 협상을 이끄는 동아시아·태평양담당 부차관보 존 허버드이다. 권종락 정무참사관은 국무부 한국과장 브라운, 박인국 1등 서기관은 국무부 한국과의 북한담당관 케네스 퀴노네스를 각각 상대하고 있다.

 현재 한 · 미 간의 외교 현안은 비중에 따라 이 4단계 접촉 창구 가운데 어느한 창구를 통해 그때그때 교류되고 있다.
 백악관과의 접촉 때와는 달리 국무부를 상대할 때는 문서 위주가 돼야 한다. 김대통령의 전화교신 요청은 따라서 하나의 문건 서류 형식으로 국무부에 제출된 셈이다. 국가 원수 관련 사항인만큼 고위직 외교통로, 즉 한대사―갈루치 또는 반공사―허버드 라인을 통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에서 또 한가지 문제가 된 것은 통화 내용이다. 김대통령이 무슨 내용에 관해 통화하고 싶은지를 국무부가 서면으로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국무부 소식통에 EK르면, 당초 한국측 통화테마는 ‘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쌀에 관한 두 정상 간의 언급은 극비에 가려버렸고, 가외의 핵문제가 표면에 떠오른 것이다.
 도식으로 따질 때 김영삼·클린턴 대통령 간의 교신은 한·미 두 나라 간의 기존 4단계 접촉 창구가 정상 대 정상 간의 창구로 한단계 더 격상되고 세분화했음을 뜻한다. 2주 전의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이 거둔 첫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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