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깃발 다시 세워라
  • 김동선 (편집국장대우)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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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UR가 재앙이 아니라는 확실한 신념을 줄 수 있는 처방전을 조속히 제시해야 한다.”

언론에서 정치 현상을 거론할 때 애용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기상 용어이다. 예컨대 여야 관계가 악화하면 정국 ‘급랭’이라는 활자가 단골로 등장하고, 금년 상반기만 해도 ‘사정한파’라는 말이 신문지상으로 장식했다. 김대통령 방미 직후 쌀 개방 문제가 터지자 어느 신문은 ‘쌀쌀한 쌀 정국’이라는 제목의 해설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쌀쌀한 쌀 정국이라는 표현은 멋을 부리려다가 사태를 잘못 짚은 꼴이 되었다. 쌀 정국은 쌀쌀한 정도가 아니다. 날씨에 비유하자면 마치 추운 겨울에 몽고지방에서 발달한 한랭성 기압이 급습한 것처럼 한반도 남쪽이 온통 꽁꽁 얼어붙고 있다. 농민들은 쌀 개방지지 투쟁에 적극 나서고,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재야 지도자들이 전열을 가다듬어 농민들과 합세하고 있다. 야당도 개방 저지 투쟁에 가세해 정국은 일시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 추위는 유유히 흐르던 한강물이 얼어붙을 정도라고 할까, 아니면 기상청 개설 이후 가장 매서운 한파라고나 할까. 아무튼 쌀 한파는 정국의 흐름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은 상태이다. 대통령이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으면서 국민에게 사과 담화문을 직접 발표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됐으니 쌀 한파의 위력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문민’이라는 이름의 성역이 침해받기 시작했다.
 도대체 쌀 정국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쌀 한파의 위력으로 지금까지 노출된 문제를 점검해 보면 대충 세 가닥으로 잡힌다.

 첫째는 대통령의 입지 약화이다. 취임하자마자 개혁풍을 몰면서 순풍에 돛 단 듯이 항진하던 김대통령의 ‘문민호’는 강한 역풍에 시달리고 있다. 농민들의 쌀 개방 반대 시위 때 나은 구호 속에는 ‘無民정권 퇴진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문민’이라는 성역이 침해받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쌀 한파 속에서 개혁이라는 말이 실종한 것도 심각한 현상이다. 김영삼 정부의 깃발인 ‘개혁’이 쌀 한파 이후 어디론지 없어졌다. 현재는 그 깃발을 다시 세울 시점이 아니지만, 깃발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실종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정치적 부담이 더 커질 것이다. 김대통령 특유의 돌파력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만, 정권 담당자 모두 심기일전하지 않으면 안될 때이다.

 둘째는 쌀 한파로 정부의 無★, 시행착오 등이 한꺼번에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점이다. 정부에서 개방 불가피 입장을 밝히기 직전까지는 총리까지도 ‘개방불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응하는 정부의 자세가 솔직하지도 않았고, 용기나 소신도 없었다. 그래서 국가 경영전략이 낙제점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심기일전 위한 당정개편 절실
 이런 여론 때문인지 집권당의 황명수 사무총장은 “쌀시장 개방에 관한 한 정부측이 일차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대통령직을 걸고 쌀 개방을 않겠다’는 김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입안한 사람의 양심적 퇴진까지 촉구했다. 그 공약 입안자는 황총장 말처럼 허무맹랑한 공야긍ㄹ 입안했으므로 책임을 면할 길이 없으나, 그 사람만 속죄양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공약 입안 이후 현재까지 보인 無★과 무소신은 관료 모두 책임을 져야 할 문제이다. 그래서 조속한 당정개편이 필요한 시점이다. 심기일전하기 위해 우선은 당정개편부터 해야 한다.

 셋째는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김영삼 정부의 신경제 5개년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는데, 정부는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이후의 농촌 문제뿐만 아니라 국민경제 전반에 걸친 청사진을 조속히 제시해야 한다.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로 얻는 것이 더 많다는 말만으로는 국민의 불안감을 씻을 수 없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재앙이 아니라는 확실한 신념을 가질 수 잇는 처방전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

 덧붙여 얘기하자면 신경제 5개년계획을 세운 팀이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을 전제하지 않고 그 계획을 입안했다면 그 단견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등소평의 말처럼 마치 우물 밑바닥에 앉아 하늘이 우물만 하다고 생각한 꼴이므로 그 단견도 국가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

 필자는 11월11일자(제211호) 이 지면을 통해 중국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소개한 뒤,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부국강병이어야 하며, 김영삼 정부가 개혁을 추진하면서 등소평의 말처럼 ‘우물 밑바닥에 앉아 하늘이 우물만 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한번 돌아보라고 충고한 바 있다.

  현재 김영삼 대통령을 엄습하고 있는 정치적 위기는 세계속의 한국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은 김영삼 정권의 시력이 아니라 민족 생존의 문제이므로 사태를 더욱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흔히 하는 말로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대처하지 않으면 우루과이 라운드가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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