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현상’의 곁과 속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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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 취향의 하나”주장도… 문화적 에너지로 승화해야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생수와 스포츠음료 시대에 길게 내려뜨린 하나의 ‘두레박’이었다. 이제 우물 <고향>은 없어졌다고 말하는 저마다의 가슴에다 <서편제>는 ‘판소리와 한’이라는 우물물을 한 바가지씩 떠 주었다. 관객들의 갈증은 심했다. 2백20만명 동원. 한국 영화의 신기록이었다.

 <서편제>는 이내 스크린 밖으로 나와 문화 각 분야와 접목하기 시작했다. 판소리 학원에 수강생이 몰리고, 김수철의 영화 음악이 불티를 날렸는가 하면, 국악을 소재로 한 출판물도 잇따랐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대한 호응과 각종 공연 · 전시회장에 중년 관객이 몰리는 현상도 서편제 현상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었으니 성인 문화의 부활이었던 것이다(《시사저널》 제 210호 참조).

 서편제 현상에 대한 그간의 논의는, 이 증후군의 직접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것과 눈에 드러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서편제 현상’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화사적 진단은 거의 없었다. 마침 계간 《상상》 겨울호(살림 펴냄)가 ‘서펀제와 서태지’를 대형 특집물로 엮어 서편제 현상에 대한 반성적 접근을 시도했다. 증후군이라는 ‘거품’을 문화적 에너지로 착근해 보자는 학문적 시도인 것이다.

 문학 평론가 이재현씨는 이 특집에서 서편제와 서태지 증후군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짚어냈다. 우선 둘 다 ‘상표’가 그럴 듯하며, 마케팅과 매니지먼트가 뛰어났고, 상품의 국제적 명성에 대한 선전이 주효했다. 언론의 역할도 지대했다. “50대가 지배하는 신문 사설 거의 모두는 <서편제>에 대해서는 문화적 ‘신토불이’류의 어설픈 논거를 내세우면서 극찬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해서는 분노에 찬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왔다”라고 이씨는 밝혔다.

 <서편제>가 보여준 감동의 위력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 이씨는, 그러나 서편제 증후군에 열광하는 만큼 “세계적인 것과 새 것과 외제에 대한 개화기 이래의 고질적 콤플렉스도 드러났다”고 보았다. 또 <서편제>가 보여 준 ‘우리 것’은 현단계에서 보자면 이국 취향적인 발굴품이라고 지적했다. <서편제>는 소멸해가는 것의 아름다움이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말할 때 동원할 수 있는 우리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가장 한국적인 것’은 신세대 소비문화의 ‘가벼움(키취다움)’에 있다면서,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은 그렇게 분리되는 것만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조혜정 교수(연세대 · 사회학)는 같은 특집에서 <서편제>의 문화사적 의미, 즉 ‘탈식민화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조교수는 근대사를 통한 문화적 제국주의화 과정에서 <서편제>가 불러온 선풍을 ‘의미심장한 문화사적 사건’으로 보고 <서편제> 관객들의 반응을 분석해 나간다. 관객들의 무엇보다 외국 문화의 침투에 저항할 수 있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조교수는 “자민족 중심주의적이고 전통에의 회귀를 강조하는 감상적 민족주의는 위험하다”라고 제동을 건다. 본질주의적 전통주의는 파시즘과 닮았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가장 한국적인 것인가
 한국적인 것을 한과 신명으로 못박을 때 “이런 규정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게 하는 눈을 멀게 한다”라고 조교수는 밝히면서 “우리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제1세계’(서양문명)를 빼버린 자기 표정은 허상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경계했다.

 조혜정 교수는 임권택 감독이 <서편제>에서 보여 준 것은 전통이 아니며, 영화 또한 전통적으로 풀어가지 않았다고 해석했다. 이 영화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던지는, 사실은 매우 근대적인 주제”를 근대적인 언어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조교수는 >서편제> 일기는 우리가 기어이 재창출해야 하는 전통으로 이어진다. “만성화한 식민지적 근대성을 벗어나서 대안적 근대성으로 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안적 근대성은 새로운 개인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우리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제1세계를 확인하고, 우리와 그들(서양)의 차이를 바로 보는 것이라고 조교수는 강조했다.

 <서편제>가 몰고온 현상을 분석하는 입지가 세대론이든 문화사적 관점이든, 또는 문화이론의 적용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의 문제로 수렴된다. 봉건과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뒤섞인(비동시성의 동시성) 이 90년대의 한국에서 과연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노력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이 거센 국제화의 해일 속에서 한국 문화, 나아가 한국인은 지금보다 더욱 희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李文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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