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랜시냐, 에코냐” 추리소설 전쟁 돌입
  • 송준 기자 ()
  • 승인 199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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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만난 납량물 1백여종… 거의 외국 작품 추리력 견주는 ?? 유희… 독재국가선 탄압

 

 


 여름 휴가철을 맞아 1백여편의 추리소설이 쏟아져나왔다. 번역물이 주종인 올 여름 추리소설들은 여러 출판사에 의해 동시다발로 간행된 것이 새로운 추세이다. 또 특정 작품이 치열한 출판광고 전쟁을 치르고 있어 여느 해의 단순한 계절적 현상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쥬라기 공원》(마이클 트리튼·김영사)등과 같이 추리소설의 기본 장르에 SF적 기법을 가미한 것과 《8》(캐서린 네빌·하서)처럼 아예장르를 무시하고 여러 기법을 혼합 사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작품이 많은 것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장미의 이름》(움베르토 에코·열린책들) 같은 대작의 개정증보판도 돋보인다. 이밖에 의학스릴러·컴퓨터 추리·종교 미스터리 등 전문 분야의 작품들도 한 경향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올 여름 추리소설 붐의 백미는 ‘테크노 스릴러’로 불리는 톰 클랜시 열풍이다. 미·소의 군사전략을 중심 얼개로 하여 전세계를 휘몰아치는 현대전 가상 시나리오는, 거대한 규모와 저자의 방대한 지식을 토대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제가지 저자는 6편을 발표했는데 각편마다 담긴 군사공학과 정보학적 지식은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 《패트리어트 게임》같은 것은 《애국전쟁》(잎새)《애국투쟁》(고려원)《애국자 게임》(한마음사) 등 각기 다른 제목으로 네 출판사에서 동시에 번역 출간돼 치열한 광고전쟁을 치르고 있다.

 올해 추리물 열풍이 극성스러운 것은 출판계에 널리 퍼진 위기의식과 관련이 있다. 출판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다가, 책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독자를 불러들이지 않고는 출판시장을 유지할 수 없다는 데 춮판인들이 인식을 같이한 것이다. 그 대안이 외국 미스터리 스토리인 셈이다.

 이 책들은 일단 재미있다. 이는 독자에게 책읽기를 습관들이는 구실도 맡아 잠재적 독서시장을 확대하는 순기능을 한다. ‘톰 클랜시 바람’을 불러온 도서출판 잎새의 朴?? 편집주간(35·문학평론가)은 “미국 서적 베스트 셀러 중 상위 50종 전부가 미스터리물”이라고 말한다. 이 책들이 미국 출판계를 먹여살리고, 이 자금력을 토대로 학술 서적이나 전문 서적을 꽃피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번 추리소설 붐은 두 대형 출판사에 의해 불이 붙었다. 지난 91년 7월과 11월 고려원과 한길사가 가각 ‘고려원 미스터리’와 ‘한길 추리’라는 기획으로 30종 가까운 추리물 시리즈를 내놓은 것이다. 여기사 김영사, 열린책들, 동아, 나남 등 출판사가 뒤를 이었고 고만고만한 영세업체들까지 합류하여 ‘추리물 해일’을 이루고 있다.

 

근거 없이 뿌리깊은 추리소설 폄하

 그러나 “한국출판의 미래를 담보한” 이들의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하다. 전례없는 큰 기획이 그다지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로 기획자들은 “추리문학에 대한 독자의 편견이 무엇보다 큰 장벽”이라고 입을 보은다. “추리문학 하면 일단 우습게 본다”는 것이다.

 추리소설에 대한 평가절하의 뿌리는 뜻밖에 깊다. 출판사와 작가, 독자에 이르기까지 이 편견의 정도가 심상치 않다. 일반 독자에게 추리 소설은 “누가 준다 해도 기껍지 않은 선물”이다. 작가, 번역가들도 추리소설 작가 타이틀을 명예로 여기지 않는다. 예들면 《달빛 랩소디》(한길사)를 쓴 백선우(필명)씨 등은 일반 소설을 쓸 때는 다른 필명을 쓰며, 번역가 주한일씨 등도 본명이 따로 있다.

 춮판사의 경우는 ‘추리’라는 단어가 흥행을 결정하는 주술적 힘까지 지녔다고 여기는 듯하다. 한길 추리 기획담당 朴男? 씨(33)는 “《양들의 침묵》(토머스 해리스·고려원)《원초적 본능》(리처드 오스본·강천)《쥬라기 공원》(마이클 크리튼·김영사) 등이 ‘추리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출간됐다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내일이 오면》(덕성문화)《시산의 모래밭》(김영사)《게임의 여왕》(문화광장) 등 8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인기를 누려온 시드니 셸던의 작품들도 ‘추리소설’ 딱지를 붙이지 않았다.

 이같은 편견은 추리소설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등은 모두 뛰어난 추리소설들이다. 이들은 일반 소설로서도 명작에 해당한다. 추리소설인가 아닌가 하는 무의미한 장르 분류작업이 유독 이 땅에서만 심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 추리작가 金?? 씨(51)에 따르면 ‘당신은 왜 책을 읽는가’라는 한 설문에 대해 일본과 서양의 응답자는 약 80%가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한 반면 한국에서는 응답자의 80%가 “교양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울러 씨는 “우리 사회가 ‘책=교양’이라는 기형적 독서관을 독자에게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생들을 위한 추천 도서 목록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 그 반증”이라는 것이다.

 또 박덕규씨는 “책은 그냥 재미로도 읽고, 기능·실용 목적으로도 읽고,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와 철학을 맛보기 위해서도 읽는 것이 그 사이에 무슨 우월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추리소설은 고도의 퍼즐이다. 작가와 독자가 서로 추리력을 견주며 즐기는 지적 유회인 것이다. 작가가 파놓은 미로를 헤매다가 잘 정선된 답을 만났을 때 독자는 비로서 고급한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추리소설의 순기능은 이밖에도 몇가지 더 있다. ???씨(전대림공전 학장)는 “독재와 추리소설은 상충되는 모랄 위에 서 있다. 추리문학이 꽃핀 곳은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 나라이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스탈린 같은 독재자는 추리소설을 탄압했다”고 말한다.

 

소설은 독자의 지적 호기심 채워줘야

 한국추리작가협회 李?? 회장(55·서울 신문 전무이사)은 그 위에 ‘범죄 예방론’을 덧붙인다. 타락과 범죄의 독소로부터 면역성을 얻게 된다는 논리로 추리소설에는 ‘권선징악’ ‘惡人心?’ 등의 교훈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본디 추리소설의 용도는 ‘시간 때우기’였다. 유난히 겨울밤이 긴 북유러에서는 범죄이야기가 ‘침실의 동반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2차대전중 런던 시민들에겐 독일의 공습을 피해 대피한 방공호에서 추리소설을 읽는 일이 낙이었다. 재미 그 자체로 추리소설은 본연의 기능을 십분 발휘한 것이다.

 1841년 미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에드거 앨런 포가 추리소설의 효시인 단편 〈모르그가의 살인산건〉을 쓴 이래로 추리문학은 그 기법과 작품성에 있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독자와 작가는 끊임없이 사건을 둘러싼 게임의 공감대를 형성해왔다.

 작가에 대한 독자의 애정 표현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심지어 영국에서는 셜록 홈즈를 기리는 박물관을 세웠다. 그들은 전시된 침대와 숟가락, 바이올린 등이 작중인물인 탐정 셜록 홈즈가 쓰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는 ‘추리’를 폄하할 어떤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경우 추리소설을 둘러싼 독자와 작가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다. 독자의 상상력과 추론의 밀도가 작가의 수준보다 훨씬 높아서 ‘속도 배반당하는 추리소설의 즐거움’을 통 경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추리문학의 개척자 金來成씨의 요절과 함께 내정된 결과였다. 김씨는 1935년 단편 추리소설〈타원형 거울〉로 데뷔하여 일본 문단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 귀국해 1957년 48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한국 문단에서 독보적으로 추리소설을 발표해왔다.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로는 1934년 ???이 ?東山이란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연재한 〈??〉를 치지만 본격적으로 추리문학 활동을 벌인 것은 김내성이었다.

 건강하게 뿌리를 내릴 것 같던 추리문학은 1940년대 들어서면서 일제의 전시체제 강화로 크게 위축되었고 그 뒤로 오랫동안 내리막길을 걷는다. 이후 6.25 등 잇따른 사회혼란으로 아예 싹이 말랐고 그 틈을 탄 3류 작가들의 무성의한 작품들이 독자의 뇌리에 강한 선입견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독자들은 미군을 통해 흘러나온 ‘페이퍼백’(한번 읽고 버리는 싼 소설책)을 보면서 셜록 홈즈와 앨러리 퀸, 손다이크 등 수준높은 추리소설을 맛보고 있었다. 거개가 영문과 교수들인 이 고급 독자들에게 페이퍼북은 교재용으로, 또는 재미로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이 고급 독자들이 외국 작품을 번역 소개하면서 한국 추리문학은 근근히 명맥을 이어 80년대에 다다랐다. 그동안 ?????????? 등 1세대 작가들이 등장했고 지금은 한국추리작가협회 등에서 50여명의 작가가 활동하고 있다. 또 김내성 추리문학상 한국추리문학상 한길추리문학상들이 제정되어 유망한 신인들을 발굴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 독자가 우리 작가들이 쓴 추리소설을 읽고 재미를 만끽하기에는 이른 듯 싶다. 최근 잎새·고려원에서 펴낸 20여종의 추리소설이 모두 외국작품인 것만 보아도 쉽게 설명이 된다. 이에 대해 작가 노원씨는 “작가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 겨우 기초 다지기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때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추리소설’이 아니라 ‘한국의 추리소설’이 문제이다. 그리고 결론은 작품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처럼 방대한 지식을 무기로 삼거나 조르주 시므농같이 휴머니즘을, 또는 시드니 셸던류의 ‘재미지상주의’를 잘 살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어쨌든 작품이 독자의 지적 호기시을 채워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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