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과 비서의 전성시대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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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청와대 이어 당 요직 장악... 김덕룡 의원만 ‘열중 쉬어’

상도동 시대가 활짝 열렸다. 21일 개각, 22일 청와대 비서진 개편, 23일 민자당 당직 개편 결과는 한마디로 ‘상도동 시대의 확인’에 다름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崔炯佑 내무부장관과 李源宗 정무수석 등 측근과 비서 출신을 내각과 청와대에 전진 배치한 데 이어, 민자당 사무총장에도 당초 총무설이 나돌던 민주계 文正秀 의원을 기용했다. 당 화합 차원에서 민정계 총장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계파안배 예상은 완전히 깨졌다.

 이로써 상도동 가신과 비서 들이 권력의 핵심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뿐만 아니라 ‘떠돌던 가신’ 徐錫宰 전 의원은 정가의 예상대로 23일 사면 복권됨으로써 정치 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카드를 얻었다.
 그러나 상도동 쪽에 비쳐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한켠에는 짙은 그들도 있었다. 金德龍 정무제1장관은 21일 단행된 개각에서 같은 민주계인 徐淸源 의원에게 자리를 물려준 채 당직에서도 소외됐다. 그는 “이제는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다”라고 말하지만, 누구도 그가 정치 방학을 자청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집권 2기에 상도동 세력을 전진 배치한 김대통령의 구상은 무엇인가. 같은 상도동계에서 명암이 교차한 배경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상도동 내의 역학 관계는 앞으로 어떤 변화의 쌍곡선을 그릴 것인가. 이제 정가의 관심은 여기에 쏠려 있다.
 상도동 세력의 대거 진출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역시 최형우 내무부장관이다.
 지난 4월 아들의 부정입학 사건으로 당 개혁을 진두 지휘하던 실세 사무총장의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를 실세로 여기는 정가의 시각은 여전했다. 김대통령이 최총장의 퇴진으로 당 개혁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 점과, 사안의 무게에 비해 최총장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처가 취해진 점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최의원의 잦은 대중 강연이 정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에서 언급한 ‘개혁 대표론’이 물의를 빚자, 한때 정가에서는 김대통령이 최의원의 행보를 언짢아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김대통령은 최형우 의원을 내각의 주요 포스트에 배치함으로써 정가의 무성한 추측을 단숨에 잠재웠다.

 김대통령은 왜 ‘右형우’를 내무 치안의 총수로 발탁했는가. 물론 오랜 측근에 대한 개인적 신임이 가장 큰 이유지만, 또 다른 배경은 최장관 자산의 행보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지난 10월 학군단(ROTC) 예비역 중앙회 모임에서 ‘개혁 3단계론’을 주장하며,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래로 확산되는 행동화 단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바깥에 나와 여러 계층 사람을 만나다 보니 정말 문제가 많다는 걸 느꼈다. 관료들이 팔짱을 끼고 관망하고 있다. 개혁이 아래로 확산되지 않고 있다”라고 나름대로의 바깥 관찰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돌아온 최형우의 관료 길들이기
 결국 김대통령은 집권 1기 내내 개혁의 발목을 붙들었던 관료 사회의 두터운 벽을 뚫는 집권 2기 작업에 최장관 특유의 돌파력과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최장관은 당근과 채찍을 병행할 가능성이 높다. 최장관은 취임 첫날 기자 간담회에서 “(아래 사람들에게) 장관실 문을 항상 열어두겠다” “공무원들의 처우가 눈에 띄게 개선되도록 말들겠다”라고 말했다. 공무원의 사기와 의욕을 크게 북돋는 발언이다.

 그러나 정치 방학 동안 그는 사석에서 관료 사회의 무사안일을 성토하는 발언을 자주해왔다. 그가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무기력을 깨는, 행정 쇄신과 조직 개편 바람을 불러 일으키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멀지 않아 단행된 내무부 고위직 인사는 바람의 강도와 방향을 짐작케 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95년의 단체장 선거 역시 최장관을 기용한 주요 배경으로 풀이된다.
 한편 이원종 정무수석-서청원 정무 제1 포석도 민주계를 축으로 하는, 강력한 친정제체 구축을 암시하고 있다. 공보부 차관에서 자리를 옮겨온 이원종 수석은 상도동에서 청춘을 바친 김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다 지난 74년 이모부인 金命潤 전 의원의 소개로 상도동에 몸담은 뒤, 한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김대통령의 ‘입’ 노릇을 충실히 해왔다. 그는, 김영삼 민자당 대표 시절 ‘한 측근에 따르면’이라는 기사의 진원지였다.

 전임 주돈식 수석은 언론계 출신으로 각계에 지면이 넓은 편이면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청와대 안에서만 보내면서 통합선거법안 마련 등 제도 개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수석의 경우는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보다 활발하게 당정간 여야간 교량 역을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5월 전당대회와 지방자치제 선거 준비라는 활발한 정치 일정도 기다리고 있다.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 만큼, 정무수석의 활동 반경이 훨씬 넓어질 가능성이 높다. 같은 민주계이자 서울지역 3선인 서청원 정무제1장관과의 역할 분담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무장관보다는 정무수석에게 비중이 더 얹히리라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정무수석과 정무장관의 경우, 대통령과의 거리가 역할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민주계 전진 배치의 또 다른 축인 문정수 사무총장은 김덕룡 장관과 함께 YS의 비서로 출발한 상도동계의 조용한 핵심이다. 당초 총무설이 더 유력했던 3선의 문의원을 사무총장으로 앉히고, 민정계 사무총장으로 거론되던 4선의 이한동 의원을 총무로 기용한 사실이야말로 집권 2기의 민자당을 여전히 친정 체제 아래 두려는 김대통령의 의중을 보여준 것이다. 그동안 민주계는 원외 지구당위원장 재정비, 5월 전당대회, 95년 단체장 선거 등 산적한 정치 일정을 들어 사무총장만은 계속 민주계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김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인 셈이다.
 3선에 불과한 문총장 취임으로 말미암아 민주계 소장파들도 나름대로 도약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姜三載?白南治?김운환 의원 주변에서는 다음 당정 개편에서 얼마든지 약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감돌며 ‘정권을 탄생시킨 보람을 느낀다’는 분위기다.

또 한번 굴절 겪는 YS 3인방
 그러나 김대통령은 당정개편 과정에서 한줌밖에 안되는 민주계를, 다선의 서열을 깨뜨리면서까지 중용하면서도 측근 중의 측근으로 알려진 김덕룡 의원을 배제했다. 개각 발표 당일 몇몇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몸도 안 좋고 당분간 쉬고 싶다. 그동안 못해본 여행도 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거취를 미리 짐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덕룡 의원이 배제된 배경을 둘러싸고는 추측이 분분하다. 韓完相 부총리 李仁濟 노동부장관의 중도하차와 연결해 ‘진보 색채를 띤 인맥의 붕괴’로 파악하는 시각이 있는가하면, 적당한 자리를 찾기 어려워서였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 출범 직후부터 터져나온 후계 구도 문제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는 관측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청와대의 한 민주계 인사는 “집권 초기부터 후계자 운운 이야기가 나온 것은 비록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다 하더라도 대통령에 대한 ‘불충’이다”라고 말한다. 민주계 출신으로는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인물로 꼽히면서 여러 세력으로부터 집중 견제를 받은 점도 중도하차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당분간 퇴장이 대통령과 김의원 양쪽 모두를 위해 필요했다는 후문이다.

 ‘갈등적 협조 관계’ ‘협조적 갈동 관계’로 불려온 최형우?서석재?김덕룡 3인은 최형우의 복귀와 서석재의 귀환, 김덕룡의 당분간 퇴장으로 또 한번 굴절을 겪었다.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을 지닌 가신과 비서들의 떠오름은 권력의 생리상 일면 당연한 현상이다. 친정 체제는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읽고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책임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포석이기도 G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전문성과 국제 경쟁력이 요구되는 냉엄한 상황에서 여전히 ‘인연’과 ‘충성’이 요직 등용의 배경이 되는 현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21세기의 국제 경쟁력을 말하면서도 정치는 19세기식 가신 정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불충’도 그런 인식의 한 단면이다.
徐明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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