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세탁 빨래행굼까지
  • 김상익 차장대우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2.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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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의 자금 담당자 말에 따르면 요 즘 모 기업 회장실엔 수상한 마대 자루가 수시로 들락날락한다 가로 45㎝ 세로 1백㎝ 두께 17㎝인 은행 공식규 격의 큰 마대자루를 1만원권 지폐로 가득 채 우면 3억원 가량 된다 기업의 임원들은 자기 들 지위에 걸맞는 정치권의 거물에게 정치자 금을 건네주기 위해 이 돈을 나눈다. 이 돈은 기업의 회계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비자금으 로서 수표 아닌 현금으로 깨끗이 세탁되어 있어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

매년 7백87조원 전세계서 '세탁'

 5공 시절 한 사업가는 정치자금을 수표로 건넸다가 혼난 적이 있다. 추적당하지 않을 방법이 있다는 말만 믿고 미처 세탁하지 않 은 돈을 야권의 거물 정치인에게 주었는데 그 정치인이 당국의 수사를 받게 되자 불똥 이 튄 것이다. 마침 거래은행의 대리가 "수사 기관이 수표를 추적하고 있다"고 귀띔해줘 사건이 마무리될 매까지 해외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표도 잘만 세탁하면 안심할 수 있다. 여권 한 거물 정치인은 측근에 게 정치자금을 수표로 준 적이 있었다. 측근 이 당황해하며 "이거 그냥 써도 됩니까" 하고 묻자 그는 "내가 주는 돈은 그대로 써도 돼" 라고 말해 세탁된 수표임을 암시했다.

 정보사 방 허위매매 사건과 관련해 '돈세 탁'이란 말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일생명보험은 서울 강남구 서초동 정 보사 땅을 사들이기 위해 모두 6백60억원 (현 금 2백30억원 융통어음 4백30억원)을 사기 단에게 주었으나 이중 2백억여원은 행방이 아리송하다. 검찰은 이 돈의 행방을 나름대로 추적했다지만 금융계에서는 행방불명된 2백 억여원은 돈세탁이 마무리된 상태라서 추적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돈세탁은 마약밀매 둥 범죄행위로 거둬들 인 돈, 교묘한 수법으로 세금을 피해 도망다 니는 돈, 뒷거래로 챙긴 기업의 비자금 등 비 정상적인 방법으로 조성된 자금을 들통이 나 지 않게 때를 때는 것이다. 지난 89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매년 돈세탁(money laundering)을 통해 국제금음시장에서 거 래되는 돈이 자그마치 1조달러(7백87조원) 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대형 금융사고와 각 종 부정사건의 뒤편에는 으레 돈세탁이 있 었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제2, 제3의 정덕현 대리가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만큼 세탁이 필요한 검은 돈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의 비자금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비자금 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 적인 것은 △부동산을 매매할 때 맺는 이면 계약 △ 리베이트 △ 공사 알선 수수료 (흔히 복덕방비라고 부름) 등이 있다. 시가 1백20 억원인 부동산을 매매하면서 정식 계약서를 1백억원에 매매가 이루어진 것처럼 작성하면 20억원의 비자금이 손쉽게 마련된다. 반대로 부동산을 매입하면서 비자금을 조성할 수도 있다. 제일생명측은 정보사 땅 매입가격을 실 제 거래가격보다 높게 매겨 60억원의 비자금 을 챙기려고 한 것으로 알려겼다. 지난 4월 현대상선은 운항비를 부풀려 2백11억원의 비 자금을 조성했다가 적발된 바 있다.

 ㄷ그룹 한 간부는 건설업계의 비자금 조성 사례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사우디아라 비아에서 공사를 따낸 적이 있다. 복덕방비는 공식적으로 공사금액의 5%였지만 알선자가 10% 이상을 요구해 하는 수 없이 10만포대 들어가는 시멘트를 20만포대가 들어가는 것 처럼 가짜 영수증을 꾸몄다. " 그는 또 "회계장부의 아귀가 딱 들어 맞아야 하므로 비자 금 조성에는 고등수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을 통한 비자금 조성도 널리 쓰인 다 여유자금이 생긴 ㄱ은 단자회사에 10% 이자로 예금한다. 단자회사는 이 돈을 ㄴ에게 14%의 이자로 대출한다. 그러나 이면 계약은 이와 다르다. 14% 이자로 대출받은 ㄴ은 실 제로 시장 실세금리인 20%의 이자를 지불하 기로 약속했다. ㄴ은 그동안 확보해놓은 비자 금으로 표면이자(14%)와 이면계약 이자의 차이 6%에 해당하는 금액을 ㄱ에게 지급한 다 이를 통해 ㄱ은 6%에 해당하는 금액을 비자금으로 챙길 수 있다. 단자회사도 뒷거래 를 중개하면서 예금금리(10%)와 대출금리 (14%)의 차액을 벌어들인다. 비자금 고리로 엮인 3자 모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다. 그러나 코오롱그룹의 한 자금 담당자는 "이 익낼 것을 줄이고 지출할 것을 늘려 비자금 을 조성하기 때문에 회사만 골병이 든다"고 말했다.

 돈세탁을 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현금화를 시도한다.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은 현금은 추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수표는 일련번호 ·수취자 등이 드러나 추적하기 쉽 다. 그러나 수백억원대에 이르는 거액이라면 단번에 현금화할 수 없다. 따라서 수표를 잘 게 부숴 조금씩 조금씩 현금으로 바꾸는 번 거로운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1백억원의 수표나 어음을 현금화한다고 가 정하자(왼쪽 그림 참조).우선 이 1백억원을 금융기관에 입금했다가 10억원짜리 수표 10 장으로 찾고 이를 다시 10개 금융기관에 비 실명으로 분산 예치한다. 그런 뒤 현금과 수 표로 빼내는 방식을 취한다. 한 은행 지점에 서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는 돈은 최고 3억원 이다. 은행으로서는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현금으로 찾겠다는 고객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으나 1억원대가 넘으면 의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해 금융기관에서 1억원은 현금으로, 나머지 9억원은 수표로 인출하는 과정을 완전 현금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되풀 이한다. 국민은행 압구정서지점 정덕현 대리 는 지난해 12월23일 국민은행 석관동지점의 '정명우' 구좌에서 10억원을 인출해 이 돈을 압구정서지점으로 이체하면서 1백16장의 수 표로 쪼갰다.

금융상품 있는 곳에 세탁방법 존재한다

 이같이 거액의 수표를 현금과 수표로 인출 하는 것은 돈세탁의 기본원리일 뿐이다. 실제 로 이루어지는 돈세탁은 훨씬 복잡한 형태를 지닌다 현금화도 현금화지만 추적을 뿌리치 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수사 당국의 표현 대로 "돈이 많이 녹아버릴수록" 추적비용이 많이 들고, 어느 순간에 추적의 단서가 끊긴 다. 은행감독원의 특별검사에 따르면 제일생 명 구좌에서 인출한 2백30억원 중 76억원짜 리 수표는 올 1월13일부터 4월 말까지 13차 례나 이 구좌에서 저 구좌로 옮겨다녔다. 단 순히 지점만 오간 게 아니라 보통예금에서부 터 불특정금전신탁 등 각종 금융상품을 넘나 들었다.

 이 정도만 돼도 검은 돈의 꼬리를 잡기가 쉽지 않지만 돈세탁 수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단자회사와 은행을 '세탁소'로 이용하는 이른바 고난도 세탁법이 동원된다(12~13 쪽 위 그림 참조).가령 X은행에서 발행한 자기앞수표를 세탁한다고 하자. 검은 돈을 세탁 하려는 고객은 우선 A단자회사에 가서 무기명으로 예금한다. 단자사에서 파는 자기발행어 음이나 어음관리구좌(CMA) 등에 드는 것이 다. 고객의 검은 수표는 곧바로 B단자회사로 가서 1차 세탁 과정을 거친다. A단자사는 B단 자사가 갖고 있는 깨끗한 수표(Y은행 발행)와 맞바꾼다. A단자사는 바꿔치기한 Y수표를 C 은행에 개설되어 있는 자기의 당좌구좌에 입금한다. C은행은 A단자사가 인출을 요구하면 당좌 잔고를 줄이면서 자행이 발행한 자기앞 수표를 준다(Y수표→수표·2차 세탁).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으므로 한바퀴 더 돌린다(3차 세탁) . 고객의 요구를 받은 A단자 사는 C수표를 D은행을 통해 수표를 바뀌친다. 이 수표가 Z은행이 발행한 것이라고 할 때 3 차 세탁까지 거친 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 까. 고객은 단지 A단자사에 잠시 돈을 넣었다 가 빼냈을 뿐이다 그러나 X수표는 Y수표→C 수표를 거쳐 Z수표로 모습을 바꾸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고객(검은 돈)이 수사 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됐다고 하자.수사 관은 고객이 보유한 Z수표의 발자취를 거꾸 로 쫒는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세탁 과정의 모든 거래가 비실명 무기명으로 이루어지 는 데다 Z수표는 그동안 고객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의 손을 떠돌았기 때문에 추적의 실마리를 잡기 어렵다. 한편 원래 검은 돈이 었던 X수표는 깨끗한 돈 행세를 하며 유통됨 으로써 어두운 과거를 지운다. 돈세탁에 이용 된 Y수표와 C수표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세탁은 금융기관 관계자들의 묵인 과 방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금융기관은 고객 의 요구대로 검은 수표를 깨끗한 수표로 바 뀌줄 뿐 아니라 수표를 돌릴 때 배서를 시키 지 않는다 수표를 받으면서도 현금을 받은 것처럼 전표를 처리해 꼬리를 자르는 일에 동조한다. 이같은 행위는 금융기관 사이의 무 리한 예금경쟁 때문에 발생한다. 금융기관은 정체가 의심스러운 돈일지라도 어떻게든 유 치하려고 한다. 단 하루라도 예금을 받으면 그 돈을 굴려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ㅎ은행의 한 관계자는 "수표를 받을 때 은행 규정상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해 본인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 는다. 일일이 확인하면 거래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금융관행은 돈세탁을 쉽게 해 경제비리를 조장한다.

 고난도 세탁법을 거친 점은 돈은 여러 금 융기관에 분산 예치된다. 거액을 장롱 속에 감춰둘 수 없을 뿐더러 구슬이 서말이라도 궤어야 보배이므로 언제든지 손쉽게 현금으 로 교환할 수 있는 금융상품과 유가증권 형 태로 모습을 바꾼다. 은행의 각종 신탁상 품 · 양도성 예금증서(CD) ·주식 · 채권 등 모든 금융상품과 유가증권이 총망라된다. 여 기에 이르면 검은 돈은 '빨래에서 헹굼까지' 세탁이 완료된 것으로 봐야 한다.    ㅈ단자사의 한 관계자는 "검은 돈을 세탁 하려는 사람은 여기저기 분산된 돈을 현금으 로 빼낼 때 절대로 규칙적인 입출금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연관성을 찾을 수 없도록 매우 불규칙하게 돈을 찾는다는 것이다. ㅇ은 행의 한 관계자는 "예치기간을 짧게 하는 것도 세탁자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돈세탁이 은행 ·단자사 등 제도 금융기관 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검은 돈이 수표가 아닌 어음일 경우 사채시장을 거치는 신종기법이 애용된다(아래 그림) 세 탁을 하려는 사람들은 제도금융권에 들어가 기 전에 사채시장을 경유함으로써 1차 세탁 을 한다. 사채시장의 전주들은 수사 당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꼭꼭 숨어 있어 검 은 돈이 일단 사채시장에 들어가면 행방을 뒤쫓기 어렵다. 게다가 검은 돈이 사채시장에 서 유통되는 어음 ·수표와 뒤섞이면 추적을 따돌리기가 더욱 쉽다.

사채시장은 점은 돈의 미로

 사채시장은 정보기관을 빰칠 만큼 정보가 빠르며 고객에게 친절하다. ㅅ증권의 한 관계 자는 "사채시장에서는 6월 첫주부터 금융사 고설이 돌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사채시장 에서는 그때 이미 제일생명보험에서 발행한 어음이 빠져나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때는 안전기획부가 정보사 땅 사기 사건의 정보를 입수해 김영호씨 등을 내사하고 있을 때였다.

 돈세탁은 기업을 우회하기도 한다. 돈을 세탁하려는 전주는 급전이 필요한 많은 기업들에 돈 (수표 ? 어음)을 꾸며준다. 기업을 통해 흔적을 공개해버리는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이같은 수법이 동원됐다. 성무건설 정건중씨 등은 어음을 쪼개 수십개 기업에 빌려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어음을 받은 기업들은 대부분 상호신용금고에 가서 할인했다.

 검은 돈을 해외로 도피시키는 세탁방법도 자주 쓰인다. (아래 그림). 우선 암달러상을 통해 달러로 바뀌 해외로 빼돌리는 방법이 있다. 기업을 하는 사람은 해외 근거지(기업)에 거래가 있는 것처럼 위장해 검은 돈을 송금하기도 한다. 또 중소 오퍼상 경유해 빼돌리는 방법도 있다. ㅅ상사의 한 관계자는 “물품거래를 가장한 해외도피 세탁방법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해외로 빠져나간 검은 돈은 그곳의 금융기관에 분산 예치되 영영돌아오지 않거나 세탁을 끝내 국내로 다시 유입되기도 한다.

 세탁자들은 경로를 복잡하게 하고 금융상품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등 고난도 수법을 동시다발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세탁된 돈을 추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은행감독원은 지난 3일부터 국민은행과 4개 신용금고에 내보냈던 특별검사반을 9일 만인 지난 11일 철수시켰다. 한 금융인은 “은행감독원이 특별검사에서 확인한 것은 수천 갈래의 수표 흐름 중 수십개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잘못된 금융관행이 돈세탁 부채질

 우리 사회에서 돈세탁은 외국보다 훨씬 쉽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명제가 실시되는 외국에서도 돈세탁이 성행하고 있다. 실명제 아래에서는 좀더 지능적이고 고도화된 돈세탁이 이루어진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금융실명제와 함께 금융 전산화를 완비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금융기관과 실명거래를 하는 모든 사람의 거래 현황을 파악하면 검은 돈이 흐름을 파악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은행감독원 편원득 검사1국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 거래를 낱낱이 들춘다면 거래를 위축시키는 역할을 낳을 수도 있다. 비정상 거래자 1%를 잡자고 건전 거래자 99%의 경제생활을 침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우려했다.

 한편 한국금융원구원 김동원 연구위원은 “돈세탁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금융기관의 무리한 예금유치 경쟁에도 그 원인이 있다”면서 “금융개혁을 이루지 않고는 돈세탁을 막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일본 대장성 산하 금융제도조사회는 90년 이후 대형 금융부정 사건이 잇따라 터지자 <금융시스템의 안정성 ? 신뢰성 확보에 대하여>라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 보고서는 “대형 금융부정 사건을 막기 위해서 금융제도 개혁을 서두르고 금융 ? 자본시장의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또 “금융의 국제화와 자율화가 진전되면서 금융기관들이 내부관리를 게을리 한 채 업무 확대와 업적 할당 위주의 예금 및 융자 경쟁에 나서 금융부정 사건이 빚어졌다”고 이 보고서는 적고 있다.

 금융제도와 관행을 고치는 것은 완벽한 처방이 되지 못한다. 쌍용경제연구소 오동휘 소장은 “비정상적인 돈이 정상적인 돈으로 합리화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정부나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이 합리적이고도 투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예로 정부의 자의성이 개입되는 인허가권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검은 돈의 수요 ? 공급구조가 사라지지 않아 제도적 규제장치를 빠져나가는 더욱 정교한 돈세탁 방법이 개발될 수 있다. 검은 돈을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사회가 굴러가는 한 돈세탁은 계속될 것이고 금융기관은 언제 빨래방망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을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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