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일관 국내 정서와 싸웠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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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주역들이 주장하는 ‘UR 결산’/“시간을 조금 벌었을 뿐”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을 앞두고 급박하게 막후 협상을 벌이던 지난 12월초. 제네바에 진을 치고 막후 협상을 막 시작한 한국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대표단(국내에서 ‘쌀시장 개방 저지 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이 이름을 쓴 적은 없다) 실무 책임자들 사이에서 희망적인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미 농산물 협상의 열쇠를 쥔 미국의 레스 애스피 농무장관을 상견례하고 난 대표단의 일부 차관보가 許信行 단장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애스피 장관은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다. 또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변호사 출신이 아니라 교수 출신이다. 말이 통할 것 같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비교적 오래 관여해온 통상 전문 관료들은 협상에서 ‘변호사 출신 백인 여자’를 가장 까다로운 상대로 꼽는 경향이 있다. 쌀을 비롯한 농산물 협상에 대해 큰 부담을 안고 떠난 대표단이었기에, 엉뚱하긴 하지만 낙관적인 이 분석은 다소나마 위안이 됐다.

 정부 대표단의 위안거리는 또 하나 있었다. 정부의 협상 전략이 어느 정도 맞아들어 간다는 징후들이 보인 것이다. 한국측 협상 전략의 핵심은 ‘분산전략’과 ‘집중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대표단 사이에서 한번도 공식으로 표명된 적은 없지만, 한국 정부의 협상 전략은 자연스레 그런 모습을 띠어갔다. 개방 압력을 흩뜨리기 위해 개별 협상은 분산해서 진행하되, 마지막은 본국에서 훈령을 내리던 실무급 책임자들이 다 집결해 총력전을 편다는 것이었다.

한국 대표, 분산?집중?소모 전략 구사
 정부 대표단이 구사한 또 한가지 협상 전략은 ‘소모전’.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은 상대방의 기력을 빼앗는 전략이었다. 대표단은 변호사 출신 백인 여성인 도스키 미 상무부 차관보를 협상 상대로 한 공산품 분야의 협상이나, 재무부 고문 변호사까지 대동한 셰이퍼 미 재무부 차관보와 협상을 벌인 금융 분야에서 이 전략을 사용했다. 협상 실무자들은 이런 상대라면 새벽까지 협상을 강행하고, 식사도 걸러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측은 한국 협상 대표들에게 시종일관 개방 시기와 폭을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금융 분야 개방은 약속하되 구체적인 시기와 수치는 못박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금융 분야를 협상한 한 관계자의 말이다.

 국내 여론은 현지에 있는 정부 대표단의 평가와 사뭇 달랐다. 정부 대표단이 목적도 없이 방황하면서 국제적인 수모만 당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정부 대표단은 ‘국내정서’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했다. 공산물 분야 협상 주역이던 朴雲緖 상공부 제1차관보를 비롯한 협상 주역들은 “국내의 폐쇄적 정서야말로 7년여 동안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주역들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내부의 ‘적’이다”라고 규정한다. 박차관보는 87년 2월 ‘한국의 비교우위 산업인 컴퓨터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양담배를 개방해야 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펴면서, 양담배는 좀 피워도 괜찮겠다고 발언했다가 정보기관에 끌려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국내 정서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협상 주역들을 괴롭혀온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해외협력위윈회 기획단장으로 우루과이 라운드(86년 이전에는 ‘뉴 라운드’로 통했다) 출범을 지켜본 金基桓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이사장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도 폐쇄적인 국민정서와 관련이 깊다. 우루과이 라운드가 출범한 5공화국 때는 큰 관심을 보이다가, 협상이 본격화한 6공화국 들어서서는 정작 이 문제를 거의 잊고 지냈다”고 주장한다. 결국 정부로서는 시장 개방한다는 계획이 부담스러운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서울 라운드 놓친 것이 한이다”
 협상에 참여한 관료들이 지금도 아쉽게 회고하는 것은 ‘서울 라운드’라는 이름을 놓친 점이다. 85년초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각료회의의 개최 장소로는 우루과이의 휴양지인 푼타델에스타 외에도 두 곳이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서울. 그중에서도 신흥공업국으로 뉴 라운드 참여에 적극적이던 한국의 서울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86년 9월 열릴 아시안게임과 중복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서울 라운드였다면 두고두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협상 주역들의 주장이다.

 협상 과정에서는 탁자에 앉은 상대방이 아니라 국내 정서를 무마하기 위한 협상 전략도 종종 등장했다. 쌀시장에서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다른 분야를 양보한다는 구상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농산물 협상에 참여해온 한 관계자는 “미국측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라고 말했다. 농산물 분야 협상 결과에 대해 이해 관계를 가진 미국측의 도정업협회나 곡물 메이저들이 이를 수긍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과의 협상에서 미국은 쌀 문제를 미끼로 다른 분야를 양보하라고 강요한 적이 거의 없다는 주장이다. 단 한번 반덤핑 조항과 관련해 쌀 문제를 들어 한국측의 양보를 요청했으나, 한국 정부 대표단은 이를 일축해버렸다고 한다. 쌀시장 대신 다른 분야에서 양보한다는 협상 전략이 언론에 널리 퍼진 것은, 정부가 농산물 분야의 협상에 최선을 다한다는 인상을 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12월7일 오후 각 분야 협상을 마친 실무자들이 귀국하려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타결될 때까지 현지에 머무르기로 한 것도 국내 여론을 의식한 것이었다. 12월8일 미국 애스피 농무장관과 3차 회담을 끝낸 뒤 쌀시장 개방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려놓고 이를 공식화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결국 4차 회담을 12월12일로 늦춰 잡고 끝까지 협상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시작한 8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은 제2의 일본으로 지목돼 협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오해 때문에 협상이 불리하게 마무리되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정부 대표단은 한국이 7년여에 걸친 협상 과정에서 시장 개장에 지나치게 인생하지도 않았으며, 무역수지가 균형에 이른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이 제2의 일본이라는 오명을 벗은 것이 이번 협상의 최대 수확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다.

 협상 주역들은 “한국이 협상 테이블에서 경제력에 비해 높은 협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공부 통상진흥관으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출범을 지켜본 박운서 차관보는 “협상을 마무르면서 보니까 인도와 브라질 같은 후발 개발도상국의 발언권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한다. 이들은 우루과이 라운드 출범 당시 발언권이 강했던 나라들로 ‘비토 그룹’으로 불렸다. 이 나라들은 이번 우루과이 협상의 최대 피해자들로 분류된다.

 국내에서는 국제적인 협상 테이블에서 한국의 협상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의 주역들을 괴롭힌 문제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협상만 잘하면 ‘예외 없는 관세와 원칙’이라는 협상의 기본 원칙에서 한국만은 예외가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많았다는 것이다. 농수산물 협상을 담당한 한 실무자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계기로 국제 협상에서 한국의 힘을 냉정하게 재평가해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협상력은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수준”이다.

 90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통상 현장을 지켜본 朴誅吉 전 제네바대사(현 외교안보연구원 원장)는 아직도 당시 상황을 회고하기를 꺼린다. 김기환 이사장을 비롯한 일부 관료들은 ‘매국노’나 ‘미국의 앞잡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통상 정책은 기껏해야 약간의 시간을 버는 정도라는 것을 국민이 인정할 때 비로소 협상 당사자들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당당해질 수 있고, 떳떳하게 협상 결과를 안고 국내에 들어올 수 있다.
金芳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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