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섬 떠도는 ‘조선원혼’들이여
  • 나가사키시 하지마·남문희 기자 ()
  • 승인 1992.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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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 3일 동안 취재진은 주로 경상남도 고성 · 진주 마산 등지에서 하지마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 들과 사망한 사람들의 유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을 만난 후 든 생각 역시 하지마에 서 있었던 한 세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단 순히 50년 전의 일로 종결된 것이 아니었다 는 사실이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진 행 형 이기도 한 이야기였다. 

 마산시 합포구 오동동에 사는 박말수 할머 니 (76). 남편 李**씨는 42세 때인 1940년 음력 10월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난 후 그해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는 남편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몰랐다. 단지 탄광에서 일하다 '구루마'에 치여 죽었다는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정도였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 "신랑밥 한번 얻어먹지 못했 다"는 그는 "평생을 너무너무 억울하게 살아 왔다"며 눈물을 지었다. 

 진주에서 만난 김동섭씨 (경남 고성군 거류 면)의 형인 金東起씨는 1939년 19세의 나이 에 하지마탄광에 가서 일을 하다 20세에 사망했다. 그때 형의 유골을 찾으러 간 부친은 유골은 바다에 뿌리고 유골단지를 담았던 가 방만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전 세상 을 뜰 때까지 평생 그 가방을 소중하게 간직 하며 제사 때만 되면 끌어안고 울었다. 

 ***씨 (경남 진양군 금곡면) 의 삼촌 **씨는 19세에 징용으로 끌려가 23세에 하지마에서 사망했다.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 를 연구하는 한 일본 작가가 89년 그의 집을 방문하자 부친은 그를 보고 "일본에서 사람이 왔다길래 혹시 동생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 하러 온줄 알았는데 뭣하러 찾아와서 가슴을 뒤집어놓느냐"고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하지마. 나가사키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18㎞ 떨어진 해상에 있는 이 자그마한 섬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 어떠한 존재 였을까. 왜 거기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을까.

 지난 6월17일 오후 2시 나가사키공항. 전 북산업대 李** 교수를 대표로 한 '하지마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 회장단 3인(*** *** ***)은 뭔가 미심쩍어하는 일본 인 입국심사관을 뒤로 한 채 공항을 빠져나 왔다 방일 목적은 하지마의 원 소유주인 미 쓰비시를 상대로 유골의 국내 봉환을 위한 법적 절차를 밟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 이 비극적으로 죽어간 하지마를 둘러보고 추 도식을 한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올수없는'죽음의섬수' 

 공항 밖에는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이하 인권회) 대표인 오카 목사 와 사무국장인 나가사키종합대 다카사네 교수가 마중나와 있었다. 73세인 오카 목사는 1974년 하지마탄광이 폐광된 뒤 아무렇게나 버려진 사망자 명부를 발굴해 미쓰비시뿐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비인도적 만행을폭로뢴 한 인물이다. 그는 하지마 문제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켜 최근 유엔평화유지활동(PKO) 법안 통과를 계기로 활발히 진행되는 일본의 군사대국화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약 20여명의 일본 ·기 파가 첫날의 기자회견을 비롯해 유족회 대표 들과 계속 같이 움직였다. 그 중 <나가사키신 문>의 다카하시 기자는 "지난해 10월 이복렬 교수가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하치 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그러나 지금 하지마 문제는 이곳에서 매우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18일 오전 9시경. 노노구시(* 母* )항구. 나가사키 시내에서 하지마가 눈 앞에 보이는 이곳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남 짓 거리이다. 옅은 안개 사이로 하지마의 기 괴한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저곳이 바로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나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섬이다. 일본 사람들은 섬의 모습 치 일본의 군함 '士* '를 닮았다 하여 '군함도'로 부른다지만 당시 조선 청년들이 부른 그 섬 의 이름은 '지옥도' 또는 '감옥도'였다. 

 일본 기자들을 포함해 일행은 30여명으로 늘어났다. 폐광이 되면서 버려진 때문인지 가까이 갈수록 하지마는 유령섬을 연상시킨다. 시커멓게 솟은 고층건물의 깨어진 창문들이 음산한 느낌을 자아낸다. 

 섬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모터보 트는 섬을 왼쪽부터 한바퀴 빙 돌았다. 반바 퀴 정도 돌았을 무렵 곁에 있던 다카사네 교 수가 손을 들어 저곳이 바로 조선인 '함바'라 고 가리킨다. 조선인 함바는 2층과 4층으로 된 두개의 건물로 미쓰비시 현장사무소 바로 뒤에 붙어 있었다. 그 뒤로는 한반도로 이어 지는 태평양이다. 서정우씨가 조선쪽을 바라 보며 자살을 생각했다고 하는 곳이 바로 조선인 함바 뒤 콘크리트 장벽일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섬을 한바퀴 돈 뒤 배는 이 섬의 유일한 입 구인 '지옥문'에 도달했다. 표천교라는 원래 3 이름이 있지만 이곳이 지옥도 의 입구이기 때문에 지옥문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    다. 지옥문 안쪽의 경비초소를 지나면 비로소 섬의 내부에 도달한다.하지마는 면적이 0.1㎢, 섬 둘레가 1.2㎞. 남북이 4백80m, 동서가 1백40m밖에 안되 는 작은 섬이다. 지금의 섬은 매림에 의해 원래 크기의 2.8 배로 늘어났다. 이 섬이 각광 받기 시작한 것은 1810년 이  곳에서 양질의 석탄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이어 1890년 미쓰비시측이 단돈 10만엔을 주고 이 섬을 인수하면서부터 본격적인 개발 이 시작됐다. 미쓰비시는 먼저 풍랑을 막기 위해 섬 주위에 10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을 쌓았다. 또 작은 섬에 많은 수의 광부와 그 가족을 수용하기 위해 7 · 9 · 12층의 현대적 인 고충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섬 안은 빌딩의 숲을 연상시킨다. 

 이 섬에 일제가 패망한 45년 당시 조선인 5백여명을 포함해 5천3백여명이 살았다. 

 조선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섬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金**씨(73)의 부친 金太 *씨가 1920년대에 이 섬에서 광부로 일한 것으로 보아 그때 이미 조선 사람들이 들어 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5백여 명으로 조선민 수가 늘어난 것은 1939년경부 터라고 한다. 

 지옥문을 들어선 조선 청년들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섬 복쪽에 있는 미쓰비시 현장사 무소이다. 이곳에서 일단신고를 마치면 사무 실 뒤에 붙어 있는 병원에서 간단한 신체검 사를 받는다. 다카사네 교수의 안내로 일행은 깨어진 벽돌조각과 건물 틈바구니를 지나 현 장사무소로 향했다. 

 미쓰비시 현장사무소. 당시 이곳은 조선 사람들의 분노의 대상이었다고 다카사네 교 수는 말한다. 린치와 학대가 주로 이곳에서 가해졌기 때문이다. 린치는 몸이 아프든지 해서 일을 나가지 못할 경우 주로 행해졌다. 특 히 먹는 것이 형편없어 배탈이 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그런 이유로 일을 못나가게 되면 '도리시마'라는 근로감독관이 사무실로 호출 한다. 그리고 사무실 바닥에 엎드려 뻗친 상 태에서 일을 나가겠다고 할 때까지 몽둥이로 등을 마구 때린다. 서정우씨는 그때 하도 많 이 맞아 등뼈가 모두 안으로 들어갔고 지금 도 그 자리가 아프다고 한다. 린치는 단지 일 을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가해진 것은 아 니었던 것 같다. 오카 목사가 조사한 바에 따 르면 일본인 근로감독들이 전화기의 전기줄 을 조선인 광부의 양 미간에 대 전류를 통하 게 한 후 광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 며 즐거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무실 안에서 가하는 린치보다 더욱 악랄 한 것은 사무실 밖의 광장에서 행해지는 경우 였다고 다카사네 교수는 말했다. 주변에 있는 아파트의 일본인 주부와 아이들이 보는 앞에 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수모감을 수반하 기 때문이다. 사무실 뒤는 병원이다. 

 고성군 개천면에 사는 김규택씨는 매우 특이한 삶을 산 사람이다. 그는 네살 때인 1923 년 광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를 찾아 하지마에 들어와 24년 동안 이 섬에서 살았다. 이곳에 서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병원에서 의사보조로 일 했다. 의사보조 생활은 분명 광부들에 비해 나은 것이었지만 그에게도 하지마는 뼈아픈 기억을 안겨준 곳이다. 19세 때인 1938년 부 친 김태수씨가 탄광 사고로 사망했는데,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부친이 어디서 어 떻게 죽었는지 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는 것이다.

가스질식사는 일상적인 사고 

 그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이 병원에는 약 50여개의 병상이 있었는데 환자가 많을 때는 2백50여명까지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대부분 갱 내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었고, 소화불량 폐결핵 급성폐렴 등 열악한 생활조건 때문에 질병에 시달린 사람들이다. 

 신체검사를 받고 나면 숙소를 배정받는다. 당시 이 섬에는 조선인 함바가 두개 있었지 만 방이 부족해 일본인들이 주로 사는 고충 아파트의 맨 아래층, 습기가 많이 차 살기가 고약한 곳이 조선 사람들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숙소를 배정받으면 곧장 작업조에 편성된 다 작업조는 사키야마라는 작업반장 밑에 '숯'(석탄)을 파내는 사람 2명, 실어나르는 사람 1명, 파낸 곳에 기둥을 세우는 사람 1명 둥 보통 4명 1조로 구성됐다. 갱도로 들어가는 입구는 섬 왼쪽에 보이는 횐 건물에 있다. 함부로부터 갱도 입구까지 섬 뒤쪽으로 나 있는 길이 조선인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통행공간이다. 섬 앞쪽으로는 통 행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서정우씨가 "하지마 의 길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갱도 입구에서 지하갱도까지는 엘 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적게는 몇백m에 서 많게는 2천m 이상 들어간다 깊은 곳은 바닷물의 밑바닥보다 더 깊이 들어간다. 지하 갱도에서 채탄 작업을 하는 것은 사실상 목 숨을 내건 일이다. 서정우씨는 "누구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일했다"고 말 한다. 갱도에 들어가면 맨 처음 닥치는 문제가 더위였다. 땅 속에서 올라오는 지열로 갱도 내 부 온도는 50~60도까지 올라갔다. 한참 일들 하면 땀이 흘러 장화속이 질펀해진다. 

 갱도 안은 탄산가스로 가득 차 있다. 파이 프를 통해 외부에서 공기가 주입되지 알으면 단 몇분도 견딜 수 없다. 공기 공급이 중단돼 가스에 질식해 죽는 것은 일상적인 위협이었다. 1937년 이 섬에 들어와 2년6개월 동안 일 했다는 부산의 ***씨 (73)도 하마터면 가스에 질식해 사망할 뻔했다고 한다. 그는 석탄을 캐러 들어갔다가 가스에 질식됐는데   "다른 광부들이 끌고 나와 물을 뿌리고 두들겨 깨워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또 갱도가 무너져 압사한다든가 엘리베이터  나 석탄운반 차량에 치여 사망하는 경우 등  죽음의 위협은 도처에 깔려 있었다.   

 고성군 개천면의 金**씨는 1936년 23세  때 돈을 벌고자 이곳에 왔다. 당시 그와 같이  있던 동료들에 따르면 김병현씨는 갱도 안으  로 들어가는 것을 매우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마음 약한 청년은 이곳에 온 지 4개월 만 에 갱이 무너져 압사했다.   

 일단 사고가 나도 사고 소식이 제대로 알 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본인 감독들이 사고 소식을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이다.   

 하지마탄광에서 1년6개월 정도 일하다 어 머니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요행히 빠져나 온 고성군 영호면의 金**씨(72)는 "질식 사고가 발생하면 대부분 일본인 감독들이 감 쪽같이 처리해버렸다. 갱이 무너져내린 사고 는 완전하게 숨기기 어렵기 때문에 소문이 돌았다. 갱이 무너져 밑에 깔렸다고 하면 곧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병원에 실려 갔다면 죽지는 않고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말한다. 최종모씨는 "갱도 안에 서 죽은 사람들은 주로 조선 사람들이었다" 고 주장한다. 즉 가장 위험한 일인 석탄을 캐 는 일은 대체로 조선 사람들의 몫이었고 일본인 광부들은 있다고 해도 한두 명 끼여 있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대개 청소 등 쉽고 안전한 일을 했기 때문에 갱도 안에서 는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다"고 최씨는 말했다. 최씨의 말은 작업현장에서도 조선인에 대 한 차별이 엄존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진주시 상대1동의 김갑임 할머니(82)는 당시 섬 뒤에 있는 고층 아파트 8층 살림집에 살았다. 1943년 어느날 그는 수많은 관을 실 은 배가 화장터가 있는 이웃의 나카노시마로 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날 갱 속에서 대화재 가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김할머니는 당시 같은 고향 청년 한명이 끔 찍한 화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을 아 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늙으나 젊으나 무조건 끌고왔다"    이런 죽음의 이야기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서정우씨처럼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 이 강제로 끌려온 징용자들의 경우이다. 징용 은 공식적으로는 1944년 총동원령에 의한 것 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전부 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0년 이 섬에 들어온 김점도씨는 자신이 들어온 후 6개월 뒤부터.징용자들이 들어왔다고 했다. 부산의 최종모씨는 "1937년 당시에도 징용이 많았 다"면서 그 시기를 휠씬 앞당겨 잡는다. 특히 하지마에서는 "인부가 모자라면 보통 두달 이나 세달에 한번씩 늙으나 펄으나 할 것 없이 무조건 끌고왔다"고 한다. "보통 한번 에 1백명에서 2백명씩 끌려왔다"고 그는 말했는데, 1943년에 들어온 서정우씨 경우 "경상남도에서만 5백명이 같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즉 미쓰비시측의 인력수급계획에 따 라 그때그때 무작위로, 광범위하게 강제징집 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졸지에 가족과 생 이별을 하고 이 섬에 끌려온 징용자들은 자 원해서 들어온 사람들에 비해 더욱 혹독한 통제와 감시를 받는 등 이중 삼중의 고통 속 에서 상당히 많은 수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사망 후에도 회사측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소모품처럼 버 려졌다.

여기저기서 드러나는 '만행 은폐' 흔적 

 하지마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이웃 나카노 꼭마에 있는 화장터로 옮겨져 한줌 재로 변 해버린다. 다행히 섬 안에 연고자가 있는 경우에는 가족이 유골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섬 안에 연고자가 없는 사람은 화장터 옆에 있 는 납골당에 방치됐다 그 뒤 1974년 하지마 탄광이 폐된된 뒤에는 다시 그 옆에 있는 큰 섬인 다카시마의 천인총으로 옳겨져 땅 속에 매장됐다. 이 유골단지들에서 조금씩 덜어낸 '가루'가 천인총에서 약 3백m 정도 떨어진 금송사라는 절에 보관돼 있다. 

 나중에 유족회 이복렬 교수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람이 죽으면 일단 미쓰비시측에서는 그 사실을 조선총독 부에 공문으로 통보했고, 총독부에서는 다시 사망자의 본적지 면사무소 제적둥본상에 이사실이 기재되도록 조처를 취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가족에게까지 전달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 징용 기피 등 부작용 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 문이다. 따라서 정작 유가족 들은 지난 50여년 동안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살아 온 것이다 

 그들이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 지이다. 우연히 발견된 1백22 명의 조선인 사망자 명부가 유일한 근거이지만 미쓰비시측은 이에 대해 아직 명확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복렬 교수가 지난해 그의 삼촌 이완옥씨의 죽음에 대해 미쓰비시에 확인을 요청했을 때 미쓰비시에서 온 답변은 "이완옥의 죽음과 미쓰비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오카 목사 등 인권회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미쓰비시 담당자를 만났을 때 그는 "당시는 지금과 역사 관이 달랐기 때문에 그때대로 정당했다. 지금의 미쓰비시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강변 했다고 한다.  

 오히려 도처에서 은폐한 흔적이 발견된다. 지난해 10월 이교수는 다카시마에 파견나온 리쓰비시 주재사원을 만나 사망자 명부를 보 여줄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옛날의 사망자 명부는 불에 타 없어졌다"며 최근에 작성한 사망자 명부를 보여줬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사망자 몇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조선 사람에 해당되는 부분은 하 얗게 비어 있었다.  

 은폐 흔적은 지난 6월28일 다카시마에서 열린 추도식에서도 폭로랬다. 이날 추도식에 앞서 이 섬에 사는 한 주민의 증언이 있었다 그는 천인총에서 있는 공양탑을 가리키며 "원래 하지마를 바라보고 있던 이 공양탑이 언제부터인가 다른 쪽을 바라보도록 누군가 손을 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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