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개방 한파에 '오들오들'
  • 이흥환 기자 ()
  • 승인 199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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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 대책' 거의 없어…문화종속·폐교·경제 손실 등 걱정태산



 대구시 동구 효목 1동에 ‘코러피아’라는 생소한 이름의 어학원이 첫선을 보인 것은 지난해 12월20일이다. 코러피아는 러시아 정부가 공인한 모스크바 대학의 어학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겉모습은 여는 사설 어학 강습소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모스커바 대학의 한국 분교 설립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코러피아는 다른 사설 강습소와는 사뭇 다른 색채를 띤다.

 학원 관계자들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국내법 때문에 분교 허가가 나지 않아 일반 사설학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코러피아 러시아 어학원 한국 사무총장 에드워드최) ‘러시아 연방 공보부는 대한민국에 모스크바 종합대학의 준비 과정을 설립하는 계획을 지지한다’(러시아 공보부 차관 드 트사브리아의 서신 중에서).
 코러피아 설립은 지난해 11월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양국 간에 이미 합의한 사안이다. 코러피아는 94년 1월중에 첫 수업을 시작하는데, 이 러시아 어학원을 졸업한 학생들은 모스크바 대학의 모든 학과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교육 시장의 ‘쪽문’은 이미 열렸다. 코러피아 러시아 어학원은 한가지 예에 불과하다.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국내 교육 현장에는 이미 외국 교육기관이나 외국의 교육 프로그램이 공급되어 교육 소비자의 환영을 받고 있다. 몇가지 사례를 더 들어본다.

'교육 밀무역'성행… ‘비행기 박사’도
 5~6년 전부터 대학가에는 '비행기 박사'라는 말이 떠돌았다. 국내 일부 박사과정 학생들이 아예 미국 대학교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교수의 지도를 받아 취득한 박사 학위를 일컫는 말이다. 강의실이 따로 있을리 없다. 호텔 방이 곧 강의실이며,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만 잠깐 미국으로 날아가 논문 심사를 받는다. 한 교육학 박사는 "최근에도 미국 워싱턴 대학의 익스텐션(extention) 프로그램으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딴 사람이 있다"라고 말한다. 석·박사 과정뿐만이 아니다. 익스텐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학부 과정의 학생도 한국에서 외국 대학의 학점과 학위를 취득할 수 있다. 1~2학년 과정을 국내에서 공부하고,, 나머지 2년은 외국에서 날아온 교수의 지도를 받아 학위 논문을 제출하는 식이다. 물론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시장 침식의 한 사례다.

 아예 공식으로 외국 대학이 국내 대학에 제안해온 경우도 있다. 경희대 국제교류위원회의 한 관계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의 교육 시장이 이미 외국에 노출될 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미 3년 전에 호주의 사우스 웨일스 대학에서 두가지 형태의 합작 제안을 해왔다. 국내에서 1~2년 과정의 수업을 마친 뒤 자격 시험을 치러 적정 등급에 해당하는 호주의 대학에 편입하는 방식이었다. 또 하나는 호주 교수들이 직접 한국에 와서 교육하고 호주 대학의 학위를 주는 일종의 조인트 방식이었다." 물론 사우스 웨일스 대학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내 교육법에 위반되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극동 대학이나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도 이미 국내 사립 대학에 교류 제안을 해 놓고 있다.

 일부 사설 어학원에서 취업 자격이 없는 외국인 강사를 고용하는 것 역시 공연하게 행해지는 '교육 밀무역'의 전형적인 형태다. 1년6개월 전에 한국에 왔다는 버지니아주 출신의 미국인 A씨는 요즘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ㅇ·ㄴ 어학원 등 국내 굴지의 영어회화 학원에서 강의를 하는 A씨가 가진 것은 방문 비자. 국내법상으로는 교육 행위나 취업을 할 수 없다.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는 있지만 불법 행위를 하는 까닭에 늘 가슴을 졸인다는 그는 "한국이 빨리 교육 개방이 되어야 저질 강사들의 유입을 막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한국의 교육시장을 넘보는 또 한가지 사례. 영자 신문 <코리아 타임즈>의 지난 12월20일자 광고란에는 싱가포르 ISS 인터내셔널 스쿨의 학생 모집 광고가 실렸다. 세계 60개국 출신 학생들에게 유치원 과정에서부터 고교 과정까지 가르치며,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세계 각국 출신의 교사들이 수준 높은 강의를 하고, ISS 인터내셔널 스쿨을 졸업하면 즉시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경희대 의학정보센터(소장·내과 김영설교수)는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과 '국제교류 전산화 학술회의 체제' 구성에 합의하고 지난해 6월부터 이 체제를 시험 가동하고 있다. 미국 대학이 직접 한국에 상륙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교육 프로그램 일부가 유입된 사례이다. 이 전산화 학술회의 체제가 본격 가동되면, 국내 학생들은 컴퓨터 화상을 통해 미국에 있는 대학이 해부학 강의 수술 장면을 직접 보고 들으며 수업을 받게 된다.

 이 경우는 그나마 공식적인 교류에 속한다. 한국 교육개발원의 한 연구원은 "이미 일부 사립 대학들이 교육 개방에 앞서 자매결연한 외국 대학 등과 물밑으로 손을 잡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정부는 이미 교육 개방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93년 8월5일자 관보에 입법예고한 교육부의 교육법 중 개정법률(안) 공고를 보면, 외국 교육기관의 국내 유입을 기정 사실로 여김은 물론 이미 대비책 마련에 착수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인 및 외국기관의 국내 교육 활동에 관한 시책 근거를 마련한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지난해 11월 정기국회를 통과하면서 ‘외국 정부·국제기구 및 외국 교육기관·단체 등과 교육에 관해 협력한다’는 문구로 바뀌었다.

 교육부에서 교육 개방 실무대책반 총괄 업무를 맡고 있는 교육협력과 김관복 사무관은 “워낙 민감한 부분이기 때문에 국회에 제출한 정부안에서는 외국 교육기관의 국내활동에 관한 내용을 빼버렸다. 법에 규정해 놓으면 바로 시행해야 하는 탓도 있지만, 아직 협상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꼭 법으로 만들 필요가 없었고, 협상 결과에 따라 나중에 대통령령으로 시행해도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라고 말한다.

 쌀시장 개방이 최대 현안으로 대두한 지난해 11월, 교육부는 한국국제교육협의회에 교육 개방 대응책에 관한 정책 과제를 맡겼다. 과제명은 ‘UR에 대비한 고등교육부문 시장개방 대책 연구’. 김태한(계명대·교육행정학) 김우택(한림대·경제학) 강인수(수원대·교육법) 교수와 이현청 박사(한국대학교육협의회)등 4명으로 구성된 이 팀의 연구 결과는 94년말께 윤곽을 드러낼 예정이다.

사립대 · 학원 · 학습지 시장 중점 공략
 93년 10월부터 11월까지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총회가 '세계 고등교육 학력 인정안'을 협의한 것도 교육 시장 개방의 한 흐름을 대변한다. 세계 각국 개학이 서로 학점과 학위를 인정해주는 방안을 논의한 이 총회는 '협약'이 아닌 '권고안' 형태로 학력 인정안을 통과시켰다. 협약은 국제법으로 취급되어 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반면, 권고안은 정책 시행을 권유하는 차원이라는 점에서 다소 완화된 셈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지난 12월17일 '21세기를 대비한 극동지역 대학간 협력'을 주제로 국제 세미나를 개최한 것도 국제화 및 교육 개방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대교협 부설 고등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 박진규 박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유네스코 중심으로 학위 공동인정제를 협의했다. 보통교육에서는 각국이 서로 위험 부담이 있지만, 고등교육에서는 서로 실리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 교류를 추진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지난11월 아·태경제지도자회의(APEC)가 채택한 선언문 끄트머리에도 '고등교육 분야에서 지역별 협력을 추진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노동력 이동을 활성화 한다'는 내용이 교육 개방 및 교류 문제가 언급되어 있다.

 교육의 장은 '시장' 개념으로 바뀌었다. 국내 시장은 국제 경쟁력이 약하고 태반이 영세한 규모인 데다가 넘쳐나는 소비자 수요 등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에 반해 막강한 재력과 세련된 교육방법의 노하우로 무장한 외국 교육기관이 한국 시장으로 몰려들 때, 국내 시장 판도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교육 개방 문제가 국내에서 현안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1년 교육 분야가 우루과이 라운드 서비스 협상의 의제로 포함되었을 때다. 당시 국내 최초로 '교육부문 시장 개방의 전망과 대책'이라는 주제로 연구 보고서를 작성했던 한국교육개발원 평생교육연구부장 최운실 박사는 최근 상황을 두고 '개방의 파고가 밀어닥친 일촉즉발의 한국 교육계'라고 표현했다. 최박사는 "서방 선진국들은 교육을 교역 대상으로 본다. 그들이 비즈니스 차원에서 이른바 돈벌이를 위해 우리 교육계에 진출하면 교육 실수요자가 많은 사립 대학과 방대한 시장을 형성한 사설 학원 부분, 다양한 학습지 시장이 중점 공략 대상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선진국 학교의 '분교' 진출이야말로 우리의 사립 대학 시장을 초토화할 수 있는 공포의 대상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이회 박진규 박사는 외국 대학이 국내에 진출하는 경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본다. "첫째는 영어영문학이나 불어불문학 같은 외국어학과의 경우 1·2학년 과정은 국내에서 배우고 3·4학년 과정은 외국 현지에 가서 수업을 받는 형태다. 물론 수업비는 학생 부담이며 여름 강좌(서머 스쿨) 같은 조건부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비용이 많이 들고 제약이 있긴 하지만 지금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는 특정학과 차원이 아니라 기관 차원으로 확대되는 경우다. 운영 상황이 부실한 국내 대학을 외국대학이 인수해서 시설을 확대하면서 '○○대학 서울 분교'라는 간판을 내걸 수 있다. 이 경우 외국 대학은 값은 비싸지만 품질이 좋은 교육 상품을 소비자 앞에 내놓는 것이다."

 교육 전문가들은 국내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을 손꼽는다. 이 국가들은 자국 교육 시장에서 재미를 못보는 반면 교육 방법의 노하우를 축적했기 때문에 수요가 넘치는 한국 시장을 그냥 내버려둘 리 없다는 것이다.

 외국 대학이 국내에 들어올 경우 국내 학생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이른바 학생 유출은 줄어들지 않겠느냐 하는 낙관적인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한국교육개발원 강무섭 박사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못박는다. 강박사는 "외국의 어떤 대학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미국의 경우 세칭 일류 대학이나 주립대는 본국에서도 아쉬운 것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굳이 들어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질 나쁜 대학이 국내에 들어올 경우 기존의 외국 유학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국내에서는 수준 이하의 교육이 판을 칠 수도 있다"라고 지적한다.

 대학보다 더 시급한 것은 사설학원 쪽이다. 당장 95년 1월1일부터는 기술·예능·사무·가정계 전문 강습소가, 96년부터는 입시계 및 외국어학원 등 일반 강습소가 부분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 이른바 부분 개방이다. 외자도입법과 외국인 투자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 업종은 제외업종·제한업종·자유업종으로 나뉘는데 학원은 제한업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부분개방은 제한업종에 대해 재무부장관이 교육부장관과 협의하여 투자인가 기준을 설정하고 제한적으로 개방한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94년부터는 외국 교육기관들이 학생 모집을 위해 본격적으로 국내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다.
 외국의 경우 '학교'와 '학원'의 구분이 없다는 것도 국내 사설 학원 시장의 잠식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교육개발원 최운실 박사는 "사설 학원의 경우는 디자인·패션등 거의 모든 부분이 예외 없이 진출해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학원 성격을 지닌 외국의 비정규 교육기관들이 디자인스쿨·패션스쿨 따위 학교 간판을 걸고 들어오면 국내 비정규 교육계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설 교육계의 경우 강습소 외에도 유아 교육기관이나 영재 교육기관 등 특수기관, 게다가 학습지 시장에까지 외국기관이 손을 댄다면 유아교육에서부터 대학교육까지 외국문화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결과가 되고 만다. 더구나 외국 교육기관으로 하여금 국내 시장에 눈독을 들이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유인 요소 중 하나로 지적되는 것은 우리의 외국 교육기관 선호 경향이다.

 외국 교육기관을 선호하는 것 못지 않게 학연이 중요시되는 풍토에서는 외국 대학을 그리 선호하지 않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학부부터 외국 대학을 선택하는 것은 모험이 되기 때문에 단시간에 외국 대학 학부에 몰리지는 않으리라는 분석이다. 또 동남아의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 등에 비해 우리가 비교적 우월한 처지에 있는 분야가 외국에 진출하는 경우도 예상된다. 기술계 학원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경쟁력을 갖춘 분야로 진출하는 방식이다. 재외 교포가 밀집한 미국 로스앤젤레스 같은 곳에 국내 사립 대학이 분교 형태로 진출하는 것도 예상된다.

“교육비 2조원 이상 국외로 나갈 것”
 교육 시장이라는 품목은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서비스 부문의 열일곱번째 품목이다. 교육 전문가들은 국제화·개방화에 적극 대처해야 하긴 하지만 교육 시장이 열리고 나면 득보다는 실이 휠씬 더 클 것으로 판단한다. 비관론이 우세한 것이다. “물론 개방을 하면 국제화한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실업, 외화 유출, 문하식민지화 등 여파가 휠씬 더 클 것이다.”(교육개발원 강무섭 박사) “구미 선진국에 비해 경쟁력이 크게 낙후한 상황에서 사립 대학과 학원들이 도산 또는 폐교할 처지에 놓인다. 국내 교육의 대외 의존도도 심화할 것이다. 문화 종속주의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교육비의 외국 송출에 따른 국민 경제의 손실도 걱정스럽다. 최소한 학원가만 해도 약 2조원 이상의 교육비가 국외로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최운실 박사) “교육 개방은 고유한 문화의 바탕을 획일화할 우려가 있다. 네것 내것 가리지 말고 일단 우월한 것을 앞세우자는 논리다. 문화가 돈으로 환산된다. 앞선 재력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국제화와 개방화에서 살아 남으려면 지극히 개성적이고 차별화한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대학교육협의회 박진규 박사)

 외국 교육기관의 국내 진출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교육이 천대받는 국내 상황이다. 한 교육 전문가는 “외국과 쌍무협상을 하다 보면 경제적인 이득을 얻어내면서 교육 같은 것은 하찮은 것으로 여겨 쉽게 내줄 수 있다. 정작 우려되는 것은 교육 개방보다 교육을 우습게 아는 태도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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