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실주의자요"
  • 한종호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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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덕 통일원장관, 섣부른 이분법에 보수주의자로 각인돼



 신임 李榮德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67)은 지난해 12월22일 가진 취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가지에서 만큼은 완전히 합치된 뜻을 갖자.
그것은 통일된 한국이 갖출 모습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이다. 통일 한국의 미래는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성경의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펼친 그의 신천지론에서 통일 정책에 관련한 구체적 암시를 찾기는 힘들다. 통일의 기본 목표로 '우주적 전세계적 가치'를 지양한다는 이부총리는 역대 통일원장관 가운데 가장 독특한 통일론을 가진 것 같다.

 새 장관과 전임자를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특히 외교안보팀의 '교수 4인방 가운데 유일하게 대통령으로부터 불신임된 韓完相 전 부총리와 이부총리가 함께 세간의 화제가 되는 것도 자연스럽다. 한편에서는 한부총리 퇴임을 아쉬워하고 다른 한편에는 이부총리의 입각에 안도하는 세력이 있을 만큼 그 평가는 극을 달린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른 점이 많지만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만큼은 공통적이다.
 이부총리의 경력은 교육자치고는 무척 다양하다. 통일원이 제공한 부총리 이력서는 문방구에서 파는 이력서 용지로 두장 가득 채워져있다. 평남 강서 출신이 이부총리는 서울대 사법대를 졸업한 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59~91년 서울대에서 교육학을 가르치며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를 비롯하여 여러 단체·위원회에 간여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관변·보수 인사'라는 첫인상을 준다. 그와 개인적 친분이 있는 한 인사는 "이부총리는 서울대 사범대 동기인 정원식 전 교육부장관에 비해 훨씬 덜 정치적이다. 온화한 성품을 지닌 상식적 인간으로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부총리의 경력에
 대해 "이북 출신 명망로서의 대우를 받아온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 월남자 1세대는 대략 40만명으로 추산된다. 수는 많지 않지만 이들의 '실향민 정서'와 실력이 한국 정치 특히 북한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이부총리의 경력과 입각을 이런 맥락에서 관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한국 교육에 미국식 교육제도를 도입한 주역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취임식 이후 부서별 업무보고를 마친 통일원 직원들은 그에 대해 '온화하고 귀가 크며 부하 직원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됐다고 한다. 통일원의 한 직원은 그를 '세련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나이가 많아 추진력에 물리적 한계가 있고 월남자라는 사실이 북한측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그가 여러 부처의 의견을 총괄하는 조정자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다.

 이부총리에 대한 다각적 평가의 마지막 귀착점은, 그의 입각이 대북 정책에 어떠한 변화를 예고하느냐이다. 벌써부터 통일원 주변에서는 "한부총리 취임 이후 재야나 민간 인사들과 통일원 실무자 사이에 전화 통화나 상호 방문이 많았는데 장관이 바뀐 뒤 뚝 끊어졌다"라는 말이 나온다.

"대북 정책이 큰 변화 없을 것"
 이부총리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의 견해는 보수 희귀와 전문성 부족으로 모아진다. 이들은 이부총리에 대해 '냉전 시대에 출세한 보수적 관변 학자'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의 보수성을 놓고 논란이 생기는 또 다른 이유는 전임 한완상 부총리가 진보 인사로서 뚜렷한 개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부총리는 퇴임한 뒤 〈한겨레신문〉과 가진 회견에서 "사정 개혁에는 말 못하던 수구 세력들도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한부총리가 '보수 세력에 밀려난 진보 인사'로 남아 있는 한 이부총리는 어쩔 수 없이 '진보 인사를 밀어낸 보수 세력'의 선봉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부총리의 실무 능력에 대해서는 취임 한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라 판단하기 이른 것 같다. 그는 지난해 12월28일 기자 간담회에서 "나는 이북 출신이고 북한과 대화를 해봐서 남북 관계의 현실을 잘 안다. 일부에서는 나를 보수적 인사라고 평가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현실주의자다"라는 요지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개각후 주한 일본대사관에서는 일본 언론사 특파원들이 참가한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일본대사관측은 "이상주의적 인사가 물러나고 실무적이고 보수적인 인사가 중용되는 전체적 경향 속에서 이부총리의 입각을 이해해야 한다. 대북 정책에서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고 한다. 이처럼 부총리의 입각은 전반적으로 개혁 인사가 퇴진하고 보수세가 강화된 김대통령 통치 방향의 변화 속에서 봐야 한다는 견해가 강하다.

보수 인사가 남북관계 진전시킨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정부의 한 인사는 "대통령은 한부총리 해임으로 진보 진영으로부터 받을 비난보다는 한부총리 유임 때 쏟아질 보수 진영의 반발을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라고 말했다. 개각 배경에 이같은 정치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 통일팀장 교체가 곧 통일 정책 변화로 이어지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통일문제 전문가들도 '진보인사 퇴진-보수 인사 등용'이라는 단순 도식을 넘지 못한 채 이부총리의 움직임을 지켜 보는 상태이다.

 어떤 보수 계열의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재야에서는 진보 인사가 통일원장관을 맡으면 남북관계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북한은 영향력 있는 진보인사의대부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보수 인사가 있을 때 외형적 진전이 있는 법이다." 외형적 진전이 남북관계의 본질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그의 평가는 옳다. 실제로 북한은 작년 5월 특사 교환을 제의하면서 사실상 한부총리를 특사로 지목함으로써 그를 결정적으로 무력화했다. 보수 인사가 남북관계를 진전시킨다는 역설이 어쩌면 이부총리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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