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내무’최형우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4.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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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겐 무릎 꿇고 관료주의엔 ‘직사포’

날개 꺾인 실세에서 내무 치아 총수로 화려하게 복귀한 지 불과 20여일. 최형우 장관은 특유의 개성과 돌파력으로 43만 내무 공무원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권위와 관행을 벗어버린 파격으로 가는 곳마다 화제를 뿌리는가 하면, ‘퇴폐업소 고객 명단 공개 방침’등으로 구설도 끊이지 않는다.

 자연히 최장관의 행보에 대한 평가도 엇갈린다. 관료주의 더께를 털어내고 내무행정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긍정론이 있는 반면, 내년 단체장 선거를 겨냥한 정치적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적 반응도 있다.
 지난해 12월 29일 경찰청 첫 순시에서 경찰청 식구들이 며칠씩 걸려 준비한 업무 보고를 단 5분 만에 종결시켜 화제를 모은 최장관의‘관료주의 틀 깨부수기’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그의 돌격 행정은 과연 바짝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는 伏地不動 관료들을 움직이게 만들 것인가.

 지난 5일 최장관은 아시아나기가 추락한 전남 마천 마을과 서해 페리호 사건으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전북 위도면을 방문했다. 위도면에서의 두시간은 최장관식 내무 행정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5일 11시. 최장관 일행이 탄 경찰청 헬기가 위도 면사무소 뒤켠 한 구릉 위에 착륙했다. 임경호 차관보와 이수종 공보관, 수행비서만을 대동한 최장관은 현장 순시 때마다 입던 짙은 감색 점퍼 차림으로 나타났다.

 즉각 면사무소로 간 최장관은 직원들에게 위도를 방문한 배경을 설명하는 짤막한 인사를 한 뒤“현장으로 가보자”면서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임차관보의 귀띔으로 자리에 다시 앉은 최장관은 오경남 위도면장으로부터 면정 보고를 들었다. 어느 현장을 방문하든 고위직 공무원이 나올 필요 없이 해당관청 실무자가 직접 보고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터여서, 전북 도지사나 전북 경찰청장은 이곳에 아예 내려오지 못했다.

 오면장은 긴장한 표정으로 위도면 상황과 서해 페리호 사건 이후 수습책 등을 담은 A4용지 10여 장이 넘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최장관은 면정 보고가 끝나자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최장관 : 항간에 우리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한다는 말이 나돕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오면장 :(잠시 망설이다) 아마 국민들과 대화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최장관 :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면장 : 워낙 상부로부터 지시 사항이 많습니다. 지시를 집행하고 다시 그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다 보면 주민들과 제대로 저촉할 시간이 없습니다.
 최장관 : 상부 지시가 너무 많아 주민과 대화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산업계장 : 저희 과만 하더라도 내무부 · 농수산부 · 해운항만청 등 여러 부처에서 각종 지시가 내려옵니다. 보고 서류만 작성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최장관 :(보고서를 가리키며) 사실 면정 보고도 이렇게 길게 할 필요 없어요. 두 쪽이면 충분합니다. 내무부에 와서 하루에도 수십 가지 서류를 보고 받고 결재하는데,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어요. 제가 뭐 천재입니까. (배석한 임차관보에게) 서울에 돌아가면 각 부처 차관회의를 열어서라도 좀더 효율적이고 종합적인 행정이 되도록 의논을 해보세요.

 최장관은“복지부동이라는 소리를 안 듣도록 현장에서 뛰고, 민원을 가슴으로부터 받아들이라. 면장실부터 활짝 열어놓아 주민을 맞아들이라”는 당부를 남기고 면사무소 순시를 끝냈다.
 11시 35분. 사고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파장금항에 도착한 최장관은 새로 들어설 터미널 시설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은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주민 서너명에게 멎었다. 먼저 인사를 건넨 최장관이“어려운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해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망설이다가 몇가지 건의 사항을 털어놓았다. 파장금항에서 면사무소로 돌아오는 길에‘진리 경로회관’현판이 보이자, 최장관은 빠듯한 일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그곳으로 들어갔다. 심심풀이 화투를 치던 동네 노인들은 갑작스런 장관 일행이 들어서자 매우 당황해했다. 그러나 공손히 무릎을 꿇은 장관 앞에서 촌로들은 굳은 표정을 풀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반가이 맞았다.

 12시 15분께. 최장관은 다시 면사무소에서 서해 페리호 유족 대표와 면담을 가졌다. 유족 대표들은 사건 이후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채 하루하루 이주민이 늘어가는 지역 사정, 타결점이 안 보이는 해운항만청과의 피해보상 교섭 상황, 부모를 잃은 유자녀들의 장학금 문제 등에 대해 강도 높은 불만을 터뜨렸다. 최장관은 내무부 소관 사항은 아니지만 정부차원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며, 특히 대통령에게 지역 사정을 간곡하게 전달하겠다는 다짐을 두 차례나 되풀이했다.

 오후 1시. 인근 민가에서 동네 주민들과 점심을 마친 최장관은 뻘밭에 대기 중인 헬기에 올랐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배웅 나온 동네 주민들과 일일이 악수하거나 등을 두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짧은 일정 동안 최대한 많은 주민과 악수하고 떠난 위도 방문, 내무부장관의 현장 방문이라기보다는 선거 유세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주민들 대부분은 국민을 섬길 줄 아는 장관이라며 호감을 나타냈다. 유가족 대표 이형식씨(어업)는“이제까지 이곳을 다녀간 고위층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도 소탈하고 된장국 맛을 풍긴다. 군림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국민을 섬기려는 자세부터가 다르다”라고 말했다.

 파격은 멀지 않아 시작될 내무부장관 초도순시에서도 이뤄질 공산이 크다. 최장관은 “내무부장관 지방 순시에는 으레 지역 유지들이 초청 대상으로 참석한다. 이번에는 그 지역의 고기 파는 대표, 청소하는 대표, 음식점을 하는 대표 같은 진짜 지역 사회 사람들을 만나겠다”라고 말한다.

“보고서는 메모지 한 장이면 된다”
 여기에서 최장관이 주요한 두가지 목표를 눈치챌 수 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첫해 내내 부담으로 작용한‘복지부동’관료들을 움직이는 것과 국민에게 그 변화가 피부로 느껴지게 하는 일이다.

 장관 취임 직후 그는‘보고는 반드시 메모 한 장 정도로 간략하게 할 것’‘눈도장을 찍기 위한 출근은 하지 말 것’‘회의는 30분 이상 하지 말 것’이라는 세 가지 역점 지시사항을 강조했다. 대신 현장에 나가서 현지 실정을 파악하도록 지시했다. 그 자신도 예고 없는 현장 출동을 수시로 나서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연말 순시에 나선 그는 서울역에서 강남 터미널역까지 지하철로 이동했다. 서울역에서 탑승한 최장관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 한 40대 여성은“오늘은 사람이 적은 편이다. 장관도 한번 서서 가봐야 한다”라고 쏘아붙였다. 최장관은 가는 동안 시민들로부터 파상 공세를 당했다. ‘아래로 개혁이 확산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느냐’‘국민을 주인으로 아는 행정이 정말로 가능한가’‘장관이 바뀌면 일제 단속이나 뭐다 해서 달라지는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되고 만다. 행정의 일관성이 없다’‘서울시청 전문직 공무원이다. 호봉 승급이 안돼 일반직이나 별정직에 비해 엄청난 손해를 본다. 시간이 흘러도 월급이 오르지 않는 불합리한 점을 개선해 달라’등 여러 의견이 속출했다.

 최장관은 현장 행정에 주력하는 이유를 내무 행정의 특수성에서 찾는다. 그는“내무 행정은 국민 생활과 직결된 말단 행정인 만큼 현장이 제일 중요하다”라고 현장 행정론을 펼친다. 주마간산식으로 현장을 돌아본다는 비판에 대해서도“책을 빨리 읽는다고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야당 생활 30년 동안 끊임없이 대중을 접촉하며 지냈다. 잠깐 둘러보고 한순간만 악수해도 느낌으로 현장 문제를 파악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현장 출동은 장관으로서 업무 파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43만 내무 공무원을 움직여 현장으로 내몰기 위한‘사령관의 시범’이라는 것이 관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그는 복지부동인 공무원들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독려용 현장 출동과 함께 사기 진작과 격려라는 당근도 곁들이고 있다. 최장관은 취임 후 맨 먼저 내무부 본부의 계장급 실무자들을 만난 데 이어, 과장급 실무자의 부인들을 초청해 점심식사를 했다. 밑으로부터 치고 올라온 것이다. 과장 부인들과 가진 오찬에서는“부군들이 내무부의 핵심 일꾼들이다 보니 얼굴 한번 제대로 보기 힘들지요. 앞으로는 좀더 자주 보게 해드리지요”라고 말문을 열어 박수 갈채를 받았다.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는 여러분들의 노고를 치하하다”는 말은 현장 방문 때 최장관의 단골 메뉴다.

 김영삼 정권이 출범한 뒤 43만 내무 공무원 가운데 1차에서 1천 28명이, 2차에서 1천 78명이 업무 비리와 재산 문제로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매서운 사정 바람도 공무원들을 개혁 일선으로 내몰지는 못했다. 사정은 오히려 관료 사회의 무소신과 보신주의를 부채질하는 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결국 최장관은 관료들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사정바람 대신 사령관의 직접 돌파와 격려라는 새 방식을 택했다. “열심히 일하는 공무원은 작은 실수가 있더라도 적극 나서서 보호하겠다. 그 대신 사소한 실수가 두려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용납 못한다”는 취임 일성에서도 최장관식 관료 길들이기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최장관식 현장 행정, 돌격 행정, 세일즈맨식 행정은 일선 공무원들에게 상당한 변화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0년 넘게 내무부에서 근무한 한 고위 관리는 “그는 거리에서 성장하고 정치해온 사람이다. 한마디로 야생마다. 오랫동안 관계에 몸담아온 우리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어차피 관료 사회에 새 기운이 필요한 때다. 일단 충격 효과는 분명히 있다”라고 말한다.

 보고 행정은 과감한 축소 역시 공무원 사회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 내무 행정만큼 여러 부처와 복잡다단하게 얽힌 행정이 없다. 그런 만큼 보고 통로도 7~8개에 이르고, 그런 통로마다 일일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결재 받는데 업무량의 80%가 할애된다. 심지어 권위를 존중하는 윗분들을 위해 한자까지 더러 섞어 써야 하므로 보고서 작성에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기업 · 정치 마인드가 필요하다”
 내무부 젊은 관료들 사이에서는 일찍부터 ‘1페이퍼 베스트(1쪽 보고서가 가장 유능한 보고서다)’‘컴퓨터 보고’가 일반화한 삼성그룹 등 기업의 보고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한 경찰 공무원은 “기존 관료적 처방으로는 공무원 사회의 경제를 치유할 수 없다. 이제는 관료사회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움직이는 기업체와 정치권의 마인드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면서 최장관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정장식 상주시장도 “최장관이 발로 뛰는 행정을 강조하면서 일선에서도 보고단계를 줄여나가고 대신 실제 현장을 몸으로 부딪쳐 확인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장관의 바람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서울시 공무원은 “바람이 분다고는 하지만 일선에서의 변화는 실감나지 않는다. 내무 조직체는 방대하고 그 뿌리가 깊다. 누구 한 사람이 전철 타고 왔다갔다 한다고 하루아침에 공무원들이 변하는 건 아니다”라고 바람의 파급효과를 의문시 했다. 새마을 운동에 내무관료를 총동원했던 70년대와는 이미 상황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최장관이 관료 사회에 팽배한 무기력과 무사안일의 원인을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비판론도 제기된다. 오연천(서울대 · 행정대학원) 교수는 “내무 공무원의 가장 큰 숙제는 전문화다. 관료사회의 적극성과 활기를 불어넣으려면 무엇보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직업공무원제와 정치적 중립을 보장해야 한다. 이런 본질은 제쳐 둔 채 무조건 현장만 강조한다고 해서 관료사회의 활성화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비판한다.

단체장 선거 겨냥해 민자 대표로 뛴다?
 최장관의 또 다른 부담은, 그의 행보를 민자당의 자치단체장 선거 전략과 관련지어 바라보는 시각이다. 야권에서는 그의 활발한 행보에 대해, 자치단체장 선거를 겨냥해 일찌감치 민자당의 대표 선수로 뛴다는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김대통령이 지난 시 · 도 인사에서 민주계 측근들을 시장 · 도지사로 전진 배치한데 이어, 오는 3 · 4월께 단체장 선거를 겨냥한 대대적인 시장 · 군수 경질설이 나돈다. 정가에서는 김대통령이 복지부동인 관료들을 움직이는 한편, 행정구역 조정과 대규모 인사를 집행하기 위해 돌파력 있는 최장관을 택했다는 관측이 무성하다. 물론 최장관은 “지난 연말에 소폭으로 단행한 시장 · 군수 인사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인사문제는 인사위원회에 맡기고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라고 공언한다.

 최장관의 단순한 접근방식이 관료층을 움직이는 묘약이 될 것인가. 그 반대로 두터운 관료주의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말 것인가. 그 결과를 점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최장관의 관료주의 벽 깨기 성패여부가 그 자신의 정치적 미래는 물론 김영삼 정권 2기의 개혁성과를 좌우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리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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