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는 YS 손안에 있소이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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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의지가 '오르내림'좌우…정부 개입 축소가 장기대책



물가는 왜 오르는가. 경제학자들에게 이보다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물가는 본질적으로 '화폐적 현상'이므로, 돈이 많이 풀려 물가가 오른다는 데 생각을 달리할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외부 충격'이 물가 인상을 주도했던 적은 있다. 두 번의 석유 파동이 좋은 예이다.

그렇다면 '공공요금을 억지로 누르지는 않겠다'는 丁?錫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의 취임 일성 이후 봇물 터지듯 물가가 띈 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를 이해하려면 정부가 물가를 관리하는 방식, 즉 물가 정책을 이해해야 한다.
물가 정책은 경제기획원의 정책 조정 기능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하고 힘든 일이다. 각 경제부처는 물가 안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각 부처의 이해가 물가의 변수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물가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이 이 과정을 마음대로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물가 정책의 기본 방침을 정하는 것은 해마다 연초에 열리는 물가대책회의다. 각 부처장 장.차관급으로 구성되는 이 회의는 국내외 물가 여건을 점검하고 대책을 세운다. 각 부처는 이를 집행하면서 매월 물가지수를 점검하고, 값이 많이 뛴 품목에 대해서는 추가 조처를 한다. 추가 조처를 논의하는 각 부처의 회의는 매월 한번 열리지만, 다급하면 자주 열기도 한다.

전문가들, 부총리의 '이상론' 높이 평가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에서는 이 과정을 '각 부처가 물가 안정에 관심을 갖도록 세뇌하는 과정'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각 부처가 경제기획원의 세뇌에 호락호락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경제기획원의 힘이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 '약발'이 달라진다. 경제기획원의 한 관계자는 "물가 정책의 실효성은 부총리가 대통령으로부터 얼마나 신임을 받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번 촌극도 그가 신임을 받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번 촌극도 신임을 받는 부총리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말했다. 즉 공공요금을 억지로 누르지 않겠다는 부총리의 소신에 찬 한마디가 물가를 들썩거리도록 만든 것이다.

결국 물가에 있어서 경제 팀장을 뽑고 그에게 책임을 묻는 대통령의 물가관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진다. "물가를 잡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5공의 경우, 물가를 잡겠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다."李?熙 아시아 태평양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의 주장이다. 그는 물가 정책과 관련한 정부 자료와 정책 담당자들과 가진 인터뷰를 통해 저술한 《성장과 안정의 선택》(가제.출간 예정)이라는 책을 통해 물가 정책을 결정하는 요인을 분석하면서, 대통령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한다(다른 요인은 61쪽 표 참조).

경제 계획을 세우면서 역대 대통령은 물가 안정을 항상 핵심 목표로 꼽아왔다. 그러나 실제 집행 과정에서 이는 언제난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그것은 무엇보다 성장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다. 이씨의 저서를 중심으로 역대 대통령의 물가관을 살펴보면, 물가관의 편차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李?? 대통령은 정부의 물가 고나리를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공산주의를 극도로 혐오한 그가 물가 관리 정책을 증시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반면 朴正熙 대통령은 시종일관 물가 안정을 역설하면서도 집행 과정에서는 이를 외면했다. 정권이 내세울 업적을 성장 속도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全斗煥 대통령은 물가 안정을 모든 경제 정책의 최우선 목표로 삼을 정도로 이에 집착했다. 더욱이 당시는 관료들 사이에 안정 기조가 우선돼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 盧泰愚 대통령은 안정과 성장 기조를 오락가락 했다. 그는 90년 경기가 침체 기미를 보이자 서둘러 성장을 우선시하는 태도로 돌변했다.

대통령이 의지가 강하다 하더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 물가를 안정시키느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이미 정부 총리가 자인한 바 있지만, 물가를 잡는 데는 이상론과 현실론이 있다. 가능한 한 정부의 개입을 줄여 물가 구조를 자율화하면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이상론이라면, 단기적으로 물가를 억누르는 것은 현실론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경제팀의 左?? 연구위원은 물가 정책을 "단기적인 고통과 장기적인 피해 사이의 선택 문제"라고 규정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해왔다.

"일시적 물가 폭등을 두려워 말라"
장기 대책을 마련하는 것에 '이상론'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장기대책(이상론)이야말로 가장 좋은 해결책이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관리를 소홀히 할 경우 누적된 물가 상승 요인이 터져 나와 일시적으로 물가가 뛰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79년 '4.17 경제 종합 안정화 시책'을 발표함으로써 안정 우선주의로 경제 기조가 바뀐 이후의 물가 정책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정부는 80년 '1.21 시장가격 현실화 조치'를 취했는데, 이에 따라 물가가 크게 뛰었다. 80, 81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각각 28.7%, 21.3%에 달했다.

정부총리와 공공요금 현실화론도 짧은 기간 비슷한 결과를 초해했다. 물가 관리 차원에서 몇 년 동안 억제 해온 공공요금을 시장가격에 맞춰 현실화 하겠다는 그의 소신이 알려진 뒤 공공요금뿐만 아니라 각종 공산품과 서비스 가격이 들썩거린 것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서둘러 물가대책회의를 열고, 가격이 뛰었거나 뛸 기미가 있는 일부 품목들에 대한 관리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물가 정책이 현실론으로 다시 선회한 것이다. 한 달 새 물가 정책이 오락가락하고 난 후 정부총리는 "경제 정책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것을 새샘 느꼈다"라고 털어놓았다.

물가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그의 발상은 물가에 대한 불안감이 지나치게 고조돼 있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지난해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5.4%이다. 이는 경제개발이 본격화한 이후 91년까지 30년 도안의 연평균 성장률 12.4%에 견주면 낮은 수준이지만, 목표선을 넘어선 데다가 92년에 이어 상승기류를 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더욱이 지난해 8월 2일 금융 실명제를 실시한 뒤부터는 돈이 많이 풀려 불안감을 더해 주고 있다. 비록 통화 당국이 긴축 정책을 편다고는 하지만, 경기 회복을 기대하는 마당에 과격한 정책을 펼 수는 없다. 한국은행은 올해 총통화(M2) 증가율 목표를 작년과 비슷한 14~17%로 잡았다.

그러나 대다수 경제 전문가들은 아직은 정부총리의 이상론에 더 나은 점수를 준다. 과거의 물가 정책을 살펴 볼 때, 정부가 나서서 물가를 챙겨 단기적으로 물가를 억누를 수는 있었으나 장기적으로는 물가 인상 요인만 누적시켜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부 개입을ㄹ 축소하고 시장기구를 존중하는 길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는데 공감한다.

물가 잡기에 성공한 5공에서 배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4.17시책 이후 5공은 국가 개입을 최소하하는 물가 정책으로 비록 일시적으로 물가가 폭등하긴 했으나 보기 드물게 물가 안정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물가 정책은 가격 현실화와 공정거래제도로 요약할 수 있다. 시장가격을 존중하되 독고점 가격은 감시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수입 개방을 비롯한 공급 확대 정책도 물가를 진정시키는데 기여했다. 여기에 '3저'행운까지 따라주었다.

총수요가 증가하는데 총 공급이 이를 따라주지 못하면 물가가 뛰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은 경제 관리들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간단하지만 분명한 법칙이다. 따라서 경기 회복이 구체화한 뒤에야 '없던 일'이 돼버린 부총리의 소신(시장가격 활성화를 통한 물가안정 정책)을 재론할 수 있을지 모른다.
金芳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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