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 건물에도 패션화 바람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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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압감 피하고 개성 있는 외관 강조…설계 현상 공모하기도



 요즘 서울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치는 시민들이 눈길을 한번 더 주는 곳이 있다. 광화문빌딩(옛 국제극장 자리)과 코리아나호텔 사이에 자리잡고서 있는 3층짜리 신축 건물. 몽당연필 같기도 하고 우주선 캡슐 같기도 한 이 팔각형 3층 건물은 밤에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분위기가 괜찮은 카페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이 건물이 지난해 11월 말 완공된 광화문파출소이다.

 파출소나 동사무소 등 일선 관공서 건축물의 `표정`이 달라지고 있다. 상자형 건물에 흰색 페인트를 덧칠한 기왕의 파출소나 동사무소는 건축적으로는 어떤 의미도 없다. 행정적기능만이 있을 뿐이다. 새로 지은 광화문파출소와, 가까이에 있는 `낡은‘ 태평로 파출소는 일선 광공서 건물의 어제와 오늘을 그대로 말해준다. 태평로 파출소는 어깨를 잇대고 있는 덕수궁 돌담이나 성굉회 건물 또는 시청과 건축적으로는 아무런 대화 없이 동떨어져 있다.

달라진 ‘대민 의식’ 반증
 관청을 비롯한 대형 공공 건물에 대한 건축계의 지적은 그간 줄곧 있어 왔다. 최근 지은 지방 도시 시청사나 구(군)민회관 몇몇을 제외하면 거개의 공공 겅축물이 시민(주민)에게 주는 이미지는 권위주의적 배타적이었다. 시민 위에 군림하던 옛 공무원들의 대민 자세를 그 건물들은 반영해 왔다. 위압감을 주는 진입로, 높은 계단, 웅장한 현관, 직선적인 동선 앞에서 시민들은 주눅들곤 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나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세종문화회관은 물론 서초동 법원 청사 그리고 최근의 헌법재판소(80쪽 상자 기사 참조)에 대한 건축계의 비판이 그 좋은 예이다. 역대 공화국이 남긴 건축물은 그것을 지은 공화국의 성격을 그대로 표출했다고 건축 비평가들은 지적해 왔다.

 최근에 짓고 있는 파출소와 동사무소에서 나타나는 건축적인 변환느 시민들과 가장 밀접하고, 접촉 횟수도 많은 행정 관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뿐만 아니다. 신축하는 지방 도시의 시청사나 구(군)민회관, 그리고 문화·체육시설 등 비교적 몸집이 큰 공공 건물들도 예전에 비해 훨씬 뚜렷한 건축 언어를 표출한다. 지방자치 시대, 나아가 이른바 문민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

 일선 행정관청 건축물에서 읽을 수 있는 변화에 대한 건축계나 시민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광화문파출소 소장 박상을 경위는 “시민들이 건물의 외형이 부드럽고 특이하다고 평한다”고 말했다. “최근에 지은 파출소나 동사무소는 예전에 비해 그 디자인이나 동선을 처리하는 데 시민의 처지에 서고 있다”라고 건축 평론가 전진삼씨(《공간》 편집장)는 말했다.

 광화문파출소는 현상 공모를 통해 설계를 확정지었다. 설계를 맡은 인그룹 건축사무소(대표 최영진) 소장 손신원씨는 “이 파출소의 위치가 갖는 역사·지리적 의미에 설계의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광화문 네거리는 서울의 한복판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여타의 파출소와는 다른 상징성을 제시해야 했다.

행정 관서 아닌 ‘시민 공간’ 구실도
 동사무소 건축이 건축계 내부의 화제로 떠오른 것은 수원시 곡선동사무소가 설계되면서부터였다. 김의성씨(예일건축)가 설계한 이 동사무소는 대한건축사협회가 주최하는 ‘92 한국건축전 대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았다. “동사무소가 갖고 있는 딱딱한 분위기를 없애고 동인들에게 친근감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라고 김의성씨는 밝혔다. 김씨는 “과거의 새로운 모험을 거부하던 것에 견주면 반가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일선 공무원이 시민을 대하는 자세와 시민들이 공무원을 q는 시각 변화, 즉 민·관의 관계 변화를 건축에 반영한 것이다.

 지난해 원진건축에서 설계해 새로 지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동사무소도 눈에 띄는 건축물이다. 2백42평 대지에 연면적 3백40평, 지하1층·지상3층인 이 동사무소는 철근 콘크리트 리멘조 구조인데 반달형 외형이다. 반달 모양의 안쪽에 출입구가 있어, 방문객이 그 건물에 안기는 인상을 준다. 1층 사무실 공간 또한 반달꼴이고 직원들도 그런 모습으로 동민들을 감싸안듯이 맞이한다. 1층 사무실은 깨끗한 은행 실내를 연상시킨다.

 건축적인 변화는 그 건축물 공간을 운용하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한강로 2가 동사무소는 2층을 회의실 및 강당으로, 3층은 청소년 공부방으로 개방하고 있다. 사무장 안현기씨는 “새 동청사를 보고 자긍심이 생긴다고 말하는 동민도 있다”라고 말했다. 2층 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신청하는 동민도 있고, 3층 공부방을 이용하는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최근에 지은 구(군)민회관이나 체육회관, 문예회관은 지역 사회 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결혼식이나 강연회가 열리기도 하고 생활 체육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관청 건축물이 건축적 의미에서 탈바꿈을 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반으로 알려진다. 83년 고 김수근씨가 경기도 광명시 청사를 설계하면서 시청 건축물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 것이다. 요즘 신축되는 시청사가 중앙부를 열어놓는(중정) 방식도 광명시 청사에서 출발했다. 광명시 청사는 완공 직후 공무원이나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형태의 관청은 곧 폐기되었다. 이유인즉 시민들이 시위하기에 좋은 구조라는 것이었다.

 “어떤 건축물이라도 그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시각이 중요하다”라고 전진삼씨는 강조했다. 지휘자 금난새씨는 그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수원시향 상임지휘자인 그는 지난해 시무식 때 ‘비밀스런 신년 음악회’를 준비했다. 시장 이하 전직원이 시무식에 참석한 사이 시향 전단원을 시무식장 중정에 대기시켰다. 금씨로 하여금 이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시청사 자체였다. 수원시청사의 중정이 음악 연주에 더없이 좋은 구조임을 파악한 것이다. ‘지루한’시무식을 마치고 시청 직원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금씨는 지휘를 시작했다. 시장은 물론이고 시청 전직원이 깜짝 놀랐다. 건축을 이해하고, 또 이용할 줄 아는 지휘자만이 할 수 있는 신년 연주회였다.

 중앙 정부 차원에서 주관하는 공공 건물 설계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이범재 교수(단국대·건축과)는 “권위주의적인 접근도 문제지만, 이른바 전통 약식을 지나치게 고집하는 것도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독립기념관 건물에서 보이듯이, 관의 요구 때문에 건축적 기능과는 무관하게 기와 지붕을 얹어야 하는 것이다.

 건축은 시대의 변화를 정직하게 반영한다. 이범재 교수에 따르면, 최근 짓는 일선 행정 관청 건축물은 다양화·다변화하고 있는 건축의 세계적 추이와 맥락을 가지면서 동시에 민·관 사이의 관계 변화와 개성을 중시하는 세대가 부각하고 있음을 되비친다. 가장 작은 규모의 행정 관청 건축물에서 보이는 긍정적인 변화가 ‘위로 올라가’ 국가가 시행하는 대형 공공 건축물에도 수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단지 건축가들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공공 건축물의 주인은 국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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