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농민 민주주의’ 실현 마당
  • 실강현 (한국역사민속학회 연구실장) ()
  • 승인 1992.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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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레는 상부상조해 공동으로 김매기하던 우리 고유의 풍습을 말하는 것이니 농촌 어느 곳에서고 쉽게 눈에 띄던 대표적 민속이었다. 그러나 두레를 마지막으로 본 지도 어언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농민들은 항시 서로 돕고 사는 상부상조의 생활 속에서 두레 황두 소겨리 품앗이 수눌음 접 계 등의 다양한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생활을 꾸려왔다. 한국의 공동노동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레인 바, 쌀 농사지대인 남한지역을 중심으로 한 두레와 북쪽지역 밭농사지대의 황두가 대비되었다. 일감에 따라서 농사두레뿐 아니라 여자들의 길쌈두레도 있었다. 본격적인 두레의 발생은 조선 후기에 전국적으로 보편화된 모내기의 확산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뙤약볕에서 일시에 많은 논은 맨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레꾼들은 풍물을 꾸려서 악기를 치고 신명을 잡으며 논두렁으로 들어갔다. 고통스런 일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지혜는 매우 놀라운 문화체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일명 ‘농악’이라 하는 것의 완결은 바로 두레에서 이루어졌다. 농민문화의 중심을 풍물굿이라고 하거니와 두레는 그 굿의 뿌리였던 셈이다.

 두레는 농민 민주주의가 관철되는 현상이었다. 농사일을 결정하는 호미모둠이나 두레의 결산을 보는 호미씻이 같은 회의는 민주적 농민회의의 전형이었다. 두레꾼들은 자체적으로 엄격한 규율도 정해 공동노동의 단결성도 확보하였다. 마을의 노약자나 과부 등 일손이 없는 집에 대해서는 경지를 무상으로 지어주는 미풍도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미풍으로 전해져오던 두레는 일제 강점기에 대대적으로 소멸되기 시작했다. 농토를 잃고 북간도로 괴나리봇짐을 싸야 했고 강제징용과 근로부국대 등으로 마을 청장년들이 빠져나가면서 악기를 칠 사람도 줄어든 탓이다. 심지어는 꽹과리 같은 쇠붙이도 공출해가던 시절이었다. 두레의 소멸은 우리에게서 가장 중요한 전통문화의 핵심의 소멸이었다.

 우선 아름다운 민요가 많이 사라졌다. 김매기할 때 선소리꾼이 매기던 노래가 사라졌다. 두레의 상징인 농기(용당기·덕석기·두레기라고 부르는 깃발)도 사라졌고 논둑에서 공동으로 참을 먹던 두레밥도 사라졌다. 물론 풍물 자체도 축소됐다. 워낙 일찍이 사라진 탓인지, 자기 문화에 대한 무관심 탓인지 가장 중요한 농민문화임에도 이 분야의 전문적 학술연구자조차도 두레를 제대로 연구한 이가 드물다. 마침 논산 상월면 대명리 사람들이 두레를 다시 짜게 되었다. 두레를 증언해줄 수 있는 마지막 노인이 여러 명 있어 제대로 된 옛 두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높은 파고 속에서 한가하게 풍물이나 두드리라고 주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나 농민문화 재건의 관건은 두레문화에 놓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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