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지검 特搜部 “巨惡 잠들지 못한다”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2.07.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성역없는 수사로 ‘내각 사퇴’ 수차례… 냉철·엄정·철저해 국민 절대 신임


 “나는 새로 떨어뜨린다”는 일본 최강의 수사기관 ‘도쿄지바검찰청 특별수사부’. 도쿄 하부야공원 근처 검찰합동청사 5층은 올해 들어 매일 밤이 깊은 줄 모른다. 수많은 권력형 부정사건을 수사해오면서 일명 ‘특수부’로 더 알려진 도쿄지검 특별수사부가 6개월째 대형 의혹사건인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운송회사인 사가와큐빈그룹이 자민당과 야당 의원 2백여명에게 무려 1천억여원의 정치자금을 뿌렸다는 뇌물사건이다. 일본 언론은 이 사건의 수사 전개 여하에 따라 4년 전 리쿠르트 사건을 능가하는 지각변동이 일본 정계에서 일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후 최대의 오직스캔들로 불린 리쿠르트 사건을 파헤친 것도 특수부였다. 소속 검사 31명과 수사요원 1백여명을 동원해 2백60일 동안 의혹을 규명하는 데 매달린 특수부의 집념은 무서웠다. 그것은 전후 권력형 부정사건을 수사해오면서 확립된 ‘巨惡을 잠재우지 말라“는 전통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전통과 집념으로 특수부가 그때 조사한 참고인은 3천8백여명, 압수한 증거푼은 9천여점에 달했다. 그 결과 국회의원 2명을 포함해 17명이 기소됐다.

 도쿄를 관할하는 검찰청의 일개 수사기관에 불과한 도쿄지검 특수부가 정·재·관계의 권력형 부정사건을 전담하며 일본 최가의 수사기관으로 떠오른 것은 언제부터인가.

 

法相의 ‘지휘권 발동’으로 한때 좌절

 일본 검찰은 戰前에도 수많은 대형 부정사건에 메스를 가해 내각을 두번이나 붕괴시킨 실적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해군의 군함건조를 둘러싸고 뇌물이 오갔던 시멘즈 사건과 주식 부정거래로 말썽인 난 데이진 사건 등은 검찰의 수사 결과 내각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전의 일본 검찰은 일반적으로 ‘사상검찰’의 성격을 지닌 체제 수호자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패전 후 일본 검찰은 경제문제에 치중하는 ‘경제검찰’로 변신을 꾀했다.

 그때 설치된 것이 정부·군대물자 횡령을 막기 위한 ‘은퇴장 사건 수사부’였다. 경제문제를 전담하는 이 수사부에 정·관계 수사기능이 부여된 것은 49년 5월 도쿄와 오사카 지검에 특별수사부가 설치되면서부터 이다.

 체제 수호기관에서 권력형 범죄를 수사하는 기관으로 환골탈태한 일본 검찰이 첫 솜씨를 발휘한 것은 48년 일어난 ‘쇼와전공 사건’이었다. 특수부는 쇼와전공이라는 비료 회사가 특별융자를 받기 위해 뇌물을 뿌린 사건을 수사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까지 손길을 뻗쳤다.

 수사가 내각까지 파급되자 당시 아시다 내각이 총사직하기에 이르렀고, 아시다 총리는 1백만엔을 수뢰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아시다는 증거부족으로 곧 풀려났지만 권력의 중추부까지 수사함으로써 특수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4년 뒤 발생한 ‘조선의혹 사건’ 수사에서 특수부는 큰 좌절을 겪는다. ‘조선의혹 사건’은 해운업계의 재건을 둘러싸고 정계에 거액의 뇌물이 뿌려진 사건으로 자민당 실력자까지 연루된 최대의 정계 스캔들이었다.

 조선회사 간부집에서 발견된 암호 메모에 의해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던 사토 에이사쿠가 걸려들었다. 이 메모로 해운업계가 자민당에 정치자금 1천만엔을 현금에 사실을 드러났고, 사토도 2백만엔을 수뢰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기시 후임으로 총리가 된 이케다 하야토 정조회장(당시)의 수뢰혐의도 드러났다.

 이러한 혐의를 포착한 특수부는 우선 자민당 실력자 사토의 체포를 서둘렀다. 그러나 특수부에 떨어진 법무성의 명령은 사토에 대한 수사를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일본 검찰은 한국 검찰과 마찬가지로 법제도상 하나의 행정기관으로 법무대신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즉 일본의 검찰청법은 법무대신 검찰총장을 지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법규정에 따라 당시 요시다 내각의 이누가이 법상은 사토에 대한 수사를 중지하라는 이른바 ‘법상의 지휘권’을 발동했다. 이유는 “법안의 국회심의를 촉진하기 위해 여당의 간사장을 국회 회기중에 체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토를 체포 직전까지 물로간 특수부는 ‘지휘권 발동’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 특수부 검사들은 검찰총장이 사표를 제출해 지휘권 발동에 항의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펐으나 검찰총장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지휘권 발동이 떨어진 날 울분을 삭이지 못한 특수부 검사들이 ‘쇼와의 혁명가’를 밤늦도록 불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일본 검찰의 상징 ‘秋霜烈日’

 일본 검찰사상 최대의 오점으로 꼽히는 지휘권 발동은 검찰의 수사권이 정치권에 의해 유린되었다는 점에서 검찰의 중립성에 대한 논의를 거세게 불러일으켰다. 물론 언론과 여론은 검찰 편이었다.

 특수부가 정치권을 반격할 기회는 곧 주어졌다. 꼬리를 물고 정계 스캔들이 터져나온 것이다.

 76년 일어난 록히드 사건은 특수부가 지휘권을 발동 때 진 빚을 정치권에 되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76년 2월 미국 상원 다국적 기업소위원회는 미국 록히드사가 트라이스터기종을 판매하기 위해 일본에 뿌린 공작금 명세서를 공표했다. 록히드사의 대일공작 전모가 외신을 타고 전해지자 일본 전계는 쑥밭으로 변했다.

 자민당 정권의 금권체질에 반기를 들고 ‘신자유클럽’이 결성된 것도 이 사건의 충격 때문이었다. 록히드 사건 여파로 자민당은 12월 총선거에서 대패했고, 당시 미키 내각이 무너졌다.

 록히드 사건의 주역인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기소된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8개월 후였다. 록히드사 기종을 구입하라는 압력을 넣은 대가로 5억엔을 수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특수부는 다나카를 “총리대신의 지위를 이용해 직무상의 오직을 범했다”는 수탁수뢰죄로 기소함으로써 24년 전 정치권에 ‘되’로 진 빚을 ‘말’로 갚을 수 있었다. 다나카는 결국 1·2심에서 징역 4년을 언도받고 현재도 상고 중에 있다. 그러나 특수부의 기소에 의해 다나카의 정치생명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도 정치권이 특수부의 집요한 수사에 수수방관만 하지는 않았다. 자민당 다나카파는 ‘조선의혹 사건’ 때처럼 또다시 법상의 지휘권 발동을 내비치면서 특수부에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52년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때는 당시 요시다 총리가 사토의 보호에 적극적이었으나 록히드 사건 때 미키 총리는 정적 다나카의 기소를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검찰사상 지휘권 발동은 두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았다. 법상의 지휘권이 발동되지 않음으로써 일본 검찰의 중립성은 확고해졌고 특수부의 명성도 굳어졌다.

 그러나 특수부가 일본 최강의 수사기관이라는 위치를 확보한 것은 이러한 제도적 장치 때문만은 아니다. 특수부를 거쳐간 수많은 검사들의 뼈를 깎는 노력이 더 큰몫을 했다. ‘秋霜烈日’. 이 말을 그대로 풀이하면 가을의 찬서리와 여름의 뜨거운 해라는 뜻이다. 일본 검찰의 상징이 바로 ‘추상열일’이다. 즉 형벌은 엄정하고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수부 위상 굳힌 귀신검사와 미스터 검찰

 일본 법조계는 이 추상열일과 같이 특수부를 이끌어온 사람으로 두명을 거론한다. 한사람은 특수부의 귀신검사로 불린 가와이 노부타이고 또 한 사람은 미스터 검찰이라고 부르는 이토 시게키이다.

 오사카고등검찰청 검사장을 끝으로 은퇴한 후 82년 타계한 가와이는 전후 일본 검찰의 원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쇼와전공 의혹’이나 ‘조선의혹 사건’ 수사 등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은 그의 수사 자세가 특수부의 기틀을 마련했기에 나온 평가이다.

 80년대 후반 제16대 검찰총장을 역임한 이토도 7년 동안 특수부 검사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부정사건을 파헤쳤다. 이때 그가 직접 취조한 정·재계인은 거물급만 30명이 넘는다.

 특히 법상의 지휘권이 발동된 ‘조선의혹 사건’에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조선회사 간부집에서 정치가의 명단이 적힌 암호 메모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암호 메로 발견에 따라 사토 간사장의 수뢰사건이 밝혀졌고 이 때문에 지휘권이 발동되었다.

 조선의혹 사건 수사 때 이토가 나중에 전경단련 회장이 된 도고 도시오와 처음 대면한 후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당시 이시카와지마중공업 사장이던 도고는 수뢰혐의로 체포되어 이토의 취조를 받게 되었다. 이토는 취조 직전 도고의 가택수색을 담당한 부하로부터 도고의 가정생활을 보고받고 깜짝 놀랐다.

 대회사의 사장이 매일 전차로 출근하고 있으며 집 내무가 너무 허술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또 책상에 놓인 봉투를 봤더니 한번 사용한 봉투를 뒤집어 다시 쓰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도고는 결국 무죄방면되었고 이때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이 더욱 출세하리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그후 도고는 일본 재계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토도 검찰의 최고직까지 올랐다. 이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특수검찰은 국가의 암 제거하는 외과의사”

 검찰총장 임기를 2년 남겨놓고 암에 걸려 퇴임한 이토는 평소의 입버릇이 “巨惡을 잠재우지 말라”였다. 이토는 늘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특수검찰은 바로 정치인의 부정과 관료의 오직 등 국가기관을 잠식하는 암을 제거하는 외과의사와 같은 존재이다. 오직·탈세 등의 암이 만연하면 일본의 장래는 없다.”

 이토는 《추상열일》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하다 타계했다. 그러나 “巨惡을 잠재우지 말라”는 이토의 유지는 곧 터진 리쿠르트 사건에서 특수부 후배 검사들의 집념에 의해 되살아났다. 또 현재 수사가 진행중인 사가와 큐빈 사건도 오는 7월26일 참의원선거가 끝나면 정계로까지 확대될 것으로 보여 특수부의 활약이 다시 한번 일본 국민의 눈길을 끌 것 같다.

 일본 사법고시 합격자는 매년 5백여명에 달한다. 이중 검사를 지원하는 사람은 50여명이다. 심야근무와 잦은 전근, 그리고 낮은 급료를 받는데도 이들이 검사를 지원하는 이유는 특수부에 배치되어 정·재계의 巨惡과 대결해보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가을의 찬서리와 같이 엄하고 여름의 뜨거운 태양처럼 불같다는 오늘의 일본 검찰상은 이렇게 하루아침에 쌓아지지 않았다. 戰前 악명 높던 ‘사상검찰’에서 정계와 재계의 巨惡과 대결하는 ‘엄정검찰’로 변하는 과정도 용이하지는 않는다. 전후 일본 검찰의 뼈아픈 자성 노력은 우리 검찰에게도 많은 교훈이 될 듯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