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공포 아편으로 달랜다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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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미얀마 국경 ‘소수민족 삶’ 르포 / 20세기 문명이 ‘질곡의 생활’ 안겨

 태국 북부와 미얀마 일대 고산 지대에는 20세기의 문명에 짓눌려 신음하며 16세기를 사는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보편적으로 누리는 문명을 모른다. 이곳에서 10월 이후에 태어난 신생아는 대부분 생명의 싹을 틔우지 못한 채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는다. 그들은 수천년 동안 조상이 해오던 방식대로 대나무와 풀잎을 베어다 초막을 짓고 아무 산에나 불을 지른 뒤 곡식을 길러 생활한다. 옷도 손수 지어 입으며 모든 생활 필수품은 자급자족한다. 이들 중 일부는 말을 있으되 문자가 없다.

 외부 문명인의 잣대로 보면 이들은 문자 그대로 원시인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들만이 꾸려온 삶의 방식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수천년 동안 보존해온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다만 산업혁명 이후의 삶만을 경험한 외부인의 눈에 그것이 생소할 따름이다.

 이른바 고산족 또는 소수 민족이라고 부르는 그들은 태국 북부에만도 60여만 명이 흩어져 산다. 미얀마 · 라오스 일대와 중국 운 남성에 사는 소수 민족까지 합하면 천만명을 웃돈다는 것이 인류학자들의 견해다.

 이들의 종족 수는 30여 개에 달한다. 그 중 비교적 인구가 많은 종족들로는 샨(타이야이) · 카렌 · 카친 · 아카 · 라후 · 리수 · 메오(몽) · 라와 족을 꼽을 수 있다.《시사저널》취재팀은 1월10~21일 골든 트라이앵글에 잠입해 취재하면서 많은 시간을 주로 이들 소수 민족 마을에서 보내야 했다. 그동안 이들이 사는 모습과, 문명인이 이들에게 저지르는 죄악의 실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상 초월한 비참한 삶에 말문 막혀
 태국 북부 산악 도시 치앙마이에서 북쪽으로 1백60여km쯤 떨어진 치앙다오 군 농큐 지방은 소수 민족들의 집결지라고 할 만했다. 5천여 명에 이르는 리수 · 라후 · 카친 · 아카 · 진허 족이 부락을 이루고 밀집해 있는 이곳은 미얀마 국경에서 3km 안쪽에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에게 국경선은 두개나 다름 없었다. 태국 국민의 주력인 타이족이 사는 곳을 벗어나자마자 검문소가 설채돼 소수 민족 부락으로 들어가는 모든 외부인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물론 소수 민족이 마을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통제한다.

 타이족이 거주하는 산간 마을 풍경을 보면서 한국의 70년대 초반 농촌 풍경을 연상했는데, 막상 소수 민족 마을에 들어서자 상상을 뛰어넘는 비참한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집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어려울 허름한 초막들, 그 앞에서 벌거벗은 채 맨발로 뛰노는 아이들, 미국인 선교사가 붙여놓고 갔다는 빛바랜 에이즈 예방 홍보물, 마약에 찌든 채 맨 땅에 누워 있는 성인 남녀의 모습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 카친족 여인은 그들의 생활 실태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밖(도시)에 나가 살 수가 없다. 타이인들이 우리를 벌레 취급한다. 젊은 여자들은 타이족 마을에서 외지인을 상대해 몸을 팔러 다 도망갔다. 그래도 젊은 여자들은 복받은 가구다.”

 농큐 지방을 빠져나온 취재팀은 검문소에 이르러 태국 경비원에게 저 안쪽 소수 민족은 태국 국민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지난해 2월부터 산족 증명서를 주기 시작했으니 지금은 태국인이라고 말했다. 취재 안내인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태국 정부는 그동안 북부 소수 민족에게 국적을 주기는커녕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지난해 유엔이 정한 ‘세계 소수 민족의 해’를 맞아 국제적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산족 증명서를 내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태국 북부 산간지대에 지천으로 널린 소수 민족 마을들의 생활상이 천편일률은 아니다. 치앙마이와 같은 도시에서 비교적 가깝고 도로변에 자리한 고산족 마을들은 잘 정비된 곳도 많다. 그러나 그런 마을들은 외부인이 들어가면 어귀에서 어린애들이 전통의상 차림으로 우루루 몰려와 동전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가 하면, 젊은 여성들은 짙은 화장을 하고 서투른 솜씨로 유혹하기에 바빴다.

“1천8백원만 내면 아편 두둑히 주겠다”
 태국 북부 국경 도시 팡에서 메흥손에 이르는 산길 바로 옆에 자리한 메오(몽)족 부락도 그런 경우였다. 칭기즈 칸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는 메오(몽)족 주민들에게서는, 그러나 밀려드는 20세기 문명의 그림자에 짓눌려 그같은 자부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태국돈 50바트(한화 약 1천8백원)만 내면 아편을 두둑히 주겠다고 취재팀을 유혹하던 한 40대 메오(몽)족 남자는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그들의 ‘선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관광객들이 들어와 열두살부터 스무살 사이의 여자들을 사간다. 한명에 1만바트 (한화 약 36만원)씩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이상 가는 소득이 없다.” 그렇게 팔려간 여성들은 몇주 후면 (관광객의 관광이 끝날 때면) 도시에서 마을로 돌아와 다음 차례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돈은 부모가 받는데, 대부분 마약 조달비와 생활비로 쓴다고 한다.

 그동안 태국 정부는 북부 소수 민족들의 아편 재배를 방치한다는 국제 비난 여론 때문에 골치를 앓아왔다. 최근 들어서는 태국 정부도 태국 국경 내에서는 아편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그대신 아편을 경작하던 소수 민족에게 새로운 소득원을 마련해 주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태국 왕실이 주관하는 로열 프로젝트도 그 중 하나이다. 로열 프로젝트 추진 상황을 둘러보기 위해 치앙라이 주 메카챤 군 호이퐁 지방 라후족 마을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는 각종 화훼와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두 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 관리자인 태국인 츄담 위로씨(27)는 운영 실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 마을은 조상 대대로 아편을 경작해 왔는데 12년 전부터 아편 대체를 노리고 왕실에서 고랭지 채소 시범 경작 지대로 정했다. 라후족 주민들은 이곳에서 일당 70바트씩 받고 일한다. 생산물은 로열 프로젝트 본부에서 수집해 도시에 유통시킨다.”

소수 민족. 미얀마 국토 40% 장악
 그는 라후족이 로열 프로젝트 덕분에 아편을 끊고 잘살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을 안의 실상은 관리인의 표현과는 사뭇 달랐다. 마침 점심 때인 오후 1시께였는데 주민들은 나이 별로 세 집에 모여 집단으로 아편을 피우고 있었다. 60여 가구에 2백50명이 사는 라후족 마을에서 아편 중독자는 70명 정도였다. 주로 15세 이상만 아편에 손댄다지만, 아편 흡입 행렬에는 예닐곱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도 끼여 있었다. 올해 30세인 차라씨는 마을 사람들의 아편 중독 실상을 이렇게 말했다. “아래 농장에서 하루에 70바트 벌면 50바트는 하루치 아편 값으로 나간다. 부부가 둘 다 아편을 하면 살 수 없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한명만 아편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일하러 나가 아편값을 댄다. 아편은 일부를 뒷산 꼭대기에 몰래 심지만, 양이 적어 미얀마에서 들여온다.” 태국 정부가 대외에 자랑하는 로열 프로젝트의 한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 소수 민족들에게 안겨진 질곡의 삶은 물론 20세기 문명이 퍼뜨린 죄악과 깊이 연관된 것들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정치적 · 역사적으로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서 출발한다. 소수 민족에게 국경이라는 개념은 없지만 특히 미얀마 쪽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소수 민족들은 일상의 비참함 외에도 정치적 고립과 박해, 전쟁이라는 굴레 속에 방치돼 있다.

 태국 · 미얀마 일대 소수 민족들은 한때 그들의 희망을 실현할 기회가 있었다. 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미얀마의 영웅 아웅산은 소수 민족 차별 철폐와 독립을 약속했다. 그 해 팡릉회담을 통해 아웅산은 여러 소수 민족 대표를 상대로 10년 뒤 미얀마 북부의 카렌 · 카친 · 샨 주를 각각 독립시키기로 하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버마족이 주축이 된 일부 독립 반대론자들은 아웅산을 암살했고, 그후 들어선 우루 정권은 팡릉협약을 완전히 백지화한 채 소수 민족 흡수 · 통합 정책을 추진했다. 소수 민족 지도자들은 물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때부터 미얀마는 40여년간 지루한 내전에 빠져들었다. 카렌 · 카친 · 샨 주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들은 각각 임시정부 형태로 국가 기구를 구성한 뒤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미얀마 정부는 전국토의 60%만을 장악한 상태이다. 나머지 40%는 각 소수 민족 군대의 손에 넘어가 있다.

 이들 소수 민족의 독립운동에 맞서 미얀마 정부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 가운데 여러 소수 민족들이 박해를 피해 국경 너머 태국측 산자락으로 이주했고, 그 지도자들은 미얀마의 봉쇄와 고립 정책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아편 · 보석 따위를 밀무역해서 식량과 무기를 조달했다. 샨 주 지도자인 쿤사가 아편왕으로 떠오른 배경도 이와 같다.

영어 쓰는 카렌족, 아편에 손 안대
 이에 비해 카렌족은 일찍부터 미국의 지원 아래 무기를 조달하고 아편에 손대지 않는 정책을 취했다. 카렌족 임시정부를 이끄는 태부페 부통령(55)은 쿤사가 이끄는 샨 족을 제외한 10여개 소수 민족 지도자와 연합해 독립투쟁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72쪽 인터뷰 참조). 미국측은 문자가 없었던 카렌족에게 알파벳을 가르쳐 현재 이곳 소수 민족 중 유일하게 영어 문화권에 편입시켰다. 카렌 독립군의 무기 조달 및 전투 지휘는 미국인 군사교관이 지도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태국 · 미얀마 국경 일대의 이같은 불안한 정세 때문에 이곳 소수 민족 부락들은 집집마다 권총 · 소총 따위를 갖추고 있다. 이들 부락이 무법천지화했기 때문에 종종 외국인 여행객이 희생되기도 한다. 지난해 가을에는 오스트리아인 7명이 국경 부근 샨족 마을에 들어갔다가 전원 사살 당했다. 

 태국 · 미얀마 국경 일대의 소수 민족 부락을 횡단해보고 이곳에 문명의 밝은 부분보다 어두운 부분이 먼저 침투해 들어와 그들을 헤어나기 힘든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6세기의 삶을 사는 이들 소수 민족에게 마약과 에이즈, 현대식 무기들을 선물한 것은 바로 문명 국가들이다.

 그러나 공포와 긴장, 비참함으로 얼룩진 이 지역에서 문명의 밝은 부분을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절망의 눈길로 이곳을 훑던 취재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가 문명의 죄악이 할퀴고 간 소수 민족 마을에서 활동하며, 국내의 인도주의적인 손길이 이곳에 더 많이 미치기를 갈망하고 있다 (딸린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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