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자칫하면 ‘쓰레기 식민지’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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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들, 수출 길 막히자 새 시장 뚫기 혈안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규제 협약 빨리 마련해야”

지난 2일 외무부 과학 · 환경과는 싱가포르에서 날라든 외신 기사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그 내용은, 서방 선진국들이 해마다 유독 쓰레기 수백만t을 아시아에 수출하고 있으며, 한국도 주요한 수입국이라는 것이었다. 외무부측이 긴장한 것은, 한국이 마치 의료 및 방사능 쓰레기를 수입하는 것처럼 비쳤기 때문이다. 과학 · 환경과의 한 실무자는 “외신 전문을 꼼꼼히 살펴봤으나 한국이 의료 쓰레기나 방사능 쓰레기를 수입했다는 대목은 없었다. 그런데도 신문에 보도된 외신 기사는 그런 뉘앙스를 풍겨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라고 말했다. 보도가 나간 뒤 곧바로 담당 부처인 환경처는 외신 보도 중 한국 관련 부분을 해명하는 자료를 부랴부랴 언론에 배포하느라 법석을 떨었다.

한국도 금속 부스러기 대량 수입
 우리 정부를 긴장하게 만든 이 보도의 진원지는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폭로한 장문의 보고서다. ‘아시아에 대한 서방의 쓰레기 침투’라는 제목이 붙은 이 보고서는, 90년부터 본격화한, 아시아에 대한 서방 선진국들의 유독 쓰레기 수출 산업이 얼마나 번창하고 있는지를 상세히 적어 놓았다. 특히 한국도 산업 쓰레기의 일종인 금속 부스러기(metal scrap)를 캐나다 · 호주 · 영국 · 미국 등으로부터 대량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린피스가 이 보고서를 발표한 것은 오는 3월21일부터 나흘간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해 쓰레기 수출 금지에 관한 국제 회의 (일명 바셀협약회의) 참가국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회의에서는 특히 선진 경제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회원국들의 유독 쓰레기 수출 문제를 집중 토의할 예정이다.

 이 보고서가 특히 충격을 주는 것은, 산업 쓰레기 수입을 금하고 있는 나라가 오늘날 1백3개국에 이르는데도 아시아 지역 나라들만은 예외라는 점이다. 특히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가, 그린피스가 ‘유독 쓰레기’로 분류한 각종 재활용 산업 쓰레기를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나라들이 수입하는 쓰레기는 플라스틱에서 납 · 아연 · 컴퓨터 쓰레기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90년 이후 아시아 나라들이 수입한 유독 쓰레기는 1천40만t에 이른다. 특히 호주 캐나다 영국 독일 미국 5개국은 90~93년 5백40만t 이상의 유독 쓰레기를 중국 · 홍콩 등 13개국에 수출했다. 이는 날마다 평균 3천7백t이 넘는 쓰레기가 이들 나라에 유입됐음을 보여준다. 또 선진국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1개국에 5만t 이상의 납 쓰레기를, 홍콩 인도 등 11개국에 10만t 이상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출했다. 특히 한국과 인도 두 나라는 90년 이후 각종 금속 부스러기 5백만t 이상을 수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 있는 그린피스 본부의 유독물 거래 방지 조정관인 짐 퍼킷씨는 국제전화를 통해 “이런 추세로 가다가는 아시아 국가들은 서방 선진국의 쓰레기 식민지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이미 일부 아시아 나라에서는 유독 쓰레기 때문에 기형아가 급증하고 있으며 암 발생 위험률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90년 전세계가 쏟아낸 유독 쓰레기 양은 3억 ~4억t에 이르며 그 가운데 98% 이상을 선진국이 쏟아냈다. 이들 선진국은 엄격한 환경 기준을 마련 해 놓고 있어 업계는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미국의 경우 2천7백개에 이르는 쓰레기 매립지가 환경 기준 미달로 패쇄됐다. 또 80년에 t당 15달러였던 쓰레기 처리 비용이 89년에는 2백50달러로 치솟았다. 이 때문에 선진국들은 환경 기준이 덜 엄격한 아시아 나라들을 상대로 수출 활로를 개척한 것이다. 저명한 경제학자 로렌스 서머스는 이를 두고 “선진국이 유독 쓰레기를 저임금 나라에 처분하려는 경제적 논리는 그들의 입맛에 꼭 맞는 짓이다”라고 꼬집는다.

 선진국들은 80년대 초까지도 주로 아프리카에 유독 쓰레기를 수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독 쓰레기 수입을 금하는 바마코협약을 91년 1월부터 발효시키면서 이 지역으로 수출할 길이 막혔다. 그린피스측이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86~90년 줄잡아 43개국에 이르던 유독 쓰레기 수출국이 조약 발효 후에는 4개국으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대표적 저개발국으로 분류돼온 아프리카마저 쓰레기 규제 협약을 만들자 선진국은 새로운 시장으로 아시아를 공략하게 된 것이다.

 현재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산업 쓰레기를 수입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그 자체로는 환경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알루미늄 · 구리 ·니켈 · 카드뮴 같은 비철금속 부스러기도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비철금속 부스러기를 주로 수입하고, 플라스틱류도 수입한 후 자원 재생용 원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그린피스는 금속 · 플라스틱 쓰레기가 재처리하는 과정에서 유독 공해물질을 뿜어 내기 때문에 이를 유독 쓰레기라고 규정한다. 환경처에 따르면, 수입 자유 품목으로서 92년 한 해 우리나라가 수입한 고철류는 3백35만t으로 7억4천5백만달러어치에 이른다. 우리는 지난해 7백만달러어치에 상당하는 산업 쓰레기를 수출했다. 외무부 과학 · 환경과의 한 실무자는 “우리가 산업 쓰레기를 수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재활용 처리 시설이 완비돼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환경처의 한 관계자도 “정부는 재활용 처리 및 폐기 시설을 갖춘 기업에게만 산업 쓰레기 수입을 허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정부는 납을 함유한 배터리도 지난해부터 수입을 금했다. 의료 및 방사능 쓰레기는 수입된 적이 없다.

독일 ‘최대 수출국’, 미국 ‘최대 생산국’
 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서방 선진국들이 가장 눈독을 들이고 있는 쓰레기 시장은 방글라데시이다. 방글라데시는 지난해 인도네시아가 유독 쓰레기 수입 금지법을 통과시킨 뒤 서방이 노리는 제1의 공략 대상이 됐다. 지난해 방글라데시가 수입한 플라스틱 쓰레기는 68.7t인데, 이는 92년보다 37%나 늘어난 양이다. 또한 방글라데시는 92년에 유독 금속 부스러기 3천1백50t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했다.

 그린피스는 아시아에 유독 쓰레기를 내다파는 대표적인 ‘악질국’으로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호주 핀란드 캐나다 등 7개국을 꼽았다. 이들 중 독일은 세계 최대의 유독 쓰레기 수출국으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유독 쓰레기 생산국이자 주된 수출국으로 지목됐다. 특히 우리와 관련해 눈여겨 볼 만한 나라는 캐나다 호주 영국 미국 등 4개국이다. 호주는 92년과 93년에 걸쳐 한국을 포함한 12개 아시아 나라에 플라스틱 쓰레기 수백t을 수출했다. 또 93년 1~9월 한국을 포함한 6개국에 3천6백38t의 주석 쓰레기를 수출했다. 캐나다도 92년에 납과 주석을 함유한 산업재 3천2백t을 한국 등 3개국에 수출했다. 또 영국은 92년에 납 쓰레기 5백78t을 한국 등 6개국에 수출했으며, 미국은 다량의 납 쓰레기를 한국 등 5개국에 수출했다. 특히 미국은 92년에 7천t이나 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한국 등 11개국에 수출했다.

 이처럼 서방의 무차별적인 ‘유독 쓰레기 수출 공략’이 갈수록 심해지자 지난해 동남아국가연합(ASEAN)은 유독 쓰레기 수입을 금하자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프리카 국가들이 89년 채택한 바마코협약과 같은 강력한 규제 장치가 나오지 않는 한 서방의 아시아 공략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린피스의 퍼킷 조정관은 “쓰레기가 아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피해 당사국 대표들이 오는 3월 제네바 회의에 참석해 선진국의 쓰레기 수출 금지를 확약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세계 1백3개국이 이미 유해 쓰레기 수입을 금했음을 상기시키고 “지금이야말로 모든 피해 당사국들이 제네바회의에 참석해 선진 산업국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시아 각국이 하루빨리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는 한 멀지 않아 아시아 지역은 거대한 유독 쓰레기 매립지로 변할지 모른다.
卞昌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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