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 ‘코 꿰인’ 사람들
  • 리흥환 기자 ()
  • 승인 199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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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 차관 이하 2만7천여명…새 정권마다 ‘자기 사람’심기 주력


 5공화국 말기, 국영기업체인 ㅎ공사의 사장으로 앉아 있던 ㅇ씨가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제출했다. 스스로 물러나는 형식이었지만 사실은 경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표를 제출하기 얼마 전 정부의 한 고위 인사가 그를 찾아왔다. 평소 안면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중요한 일 때문에 ㅇ씨를 찾아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 고위 인사는 이것저것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알맹이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더니 알쏭달쏭한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그 자리를 떴다. ㅇ씨는 고위 인사의 말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 후 정부의 다른 고위 인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다짜고짜 거친 말투로 “사람이 왜 그렇게 눈치가 없느냐?”고 ㅇ씨를 나무랐다. 힐난조였고 협박에 가까운 언사였다.

 그때서야 ㅇ씨는 먼젓번 찾아왔던 고위 인사의 모호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정확하게 해독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사장직을 빨리 내놓으라는 말이었는데, 눈치채지 못한 ㅇ씨는 ‘미련하게’눌러앉아 있었던 것이다. 국영 기업체 長에 대한 인사발령 구조를 잘 알지 못한 것이 ㅇ씨의 죄라면 죄였던 셈이다. ㅇ씨가 ㅎ공사의 사장 자리를 비워주자 국영기업체의 장에 대한 인사가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다. ㅇ씨는 그제서야 자신의 ‘무지’가 국영 기업체 장 인사의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후 공직을 떠났고 몇 해 동안은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정부 투자 · 출연 기관인 국영기업체의 이사장이나 사장에 대한 임면권은 대통령이 쥐고 있다. 현재 정부투자기관은 대한주택공사 한국관광공사 한국도로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토지개발공사 대한광업진흥공사 농수산물유통공사 국정교과서주식회사 등 모두 23개다. 이 기관들의 이사장과 사장직 46개는 대통령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정치 풍향 따라 공무원들 ‘줄서기’한창

 대통령이 임명하고 면직하는 자리는 이뿐만이 아니다. 행정 공무원 80여 만명 중에서 5급 이상인 2만 8천 여명의 임면권도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국립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교육 공무원,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공무원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새로운 대통령이 한 명 탄생되면 3만 명의 사람이 바뀐다는 말이 있다. ‘대통령의 사람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강력한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는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해서 라도 신임 대통령은 행정부처 요직에 이른바 ‘자기사람’을 배치하려 들 것이다. 집권당이 교체되면 그 정당에 소속된 국장급 이상 고위직 공무원이 일시에 바뀌는 미국의 獵官制야 말로 새 인물 물갈이의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나라도 대통령 중심제의 권력구조이긴 하지만 엽관제가 아닌 직업공무원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고위직 공무원들의 신분은 일단 법적으로 보장된다. 하지만 과거 사례로 볼 때 실제로 신임 대통령이 새 정권에 ‘자기 사람’을 들여앉히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으며, 설령 부당한 인사가 행해지더라도 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의 영을 거역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장 · 차관과 1급 이상 관리관 등 정무직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고위 공무원들이 집권여당의 대통령후보인 金泳三 대표최고위원 주변에 모여드는 현상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경제부처의 한 3급 공무원은 공무원들의 ‘줄서기’가 피부로 느껴진다면서 “고위 정무직 공무원들이 정치바람에 편승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행정부처의 기강이 말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김영삼 대표의 한 측근은 다소 다른 의견을 보였다. 이 측근 인사는 “행정공무원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다는 사실은 직업공무원제가 정착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하지만 2~3급 등 고위 공무원 대부분은 정권교체기인 지금도 일을 잘 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넘기려고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자기 자리와는 상관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총무처 통계에 따르면 91년 말 현재 대통령은 장관급 46명, 차관급 83명, 1급 2백57명, 2급 6백70명, 3급 5백42명, 4급 5천2백21명, 5급 2만2천8백78명 등 총 2만7천여명에 대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다. 행정기관에 소속된 5급 이상의 공무원은 소속 장관의 제청으로 총무처 장관의 협의를 거치고 국무총리를 경유하여 대통령이 임면한다는 국가공무원법(32조 임용권)에 따른 것이다. 부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2급이나 3급에 해당하는 ‘국장’이상의 신규 임명이나 승진 등은 대통령이 직접 결재하고, 그 이하는 각 부처 장관이 결재하는 선에서 끝난다. 3급 이상 간부에 대한 인사는 대통령이 직접 관할하는 형식이다.

 

대법원장 · 국회의장 인사에도 대통령 입김

 직급에 따른 이런 차이는 승진 임용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5급 공무원으로 승진하려면 객관적 기준인 승진시험을 치러야 하지만, 1~4급 공무원의 경우에는 ‘능력과 경력등을 고려하도록’(국가공무원법 40조) 되어 있다. 1급 공무원은 또한 신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이 형을 선고받거나 징계 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강제로 면직 당하지 않는다는 신분보장 항목을 명시하고 있으나, 1급 공무원의 경우에는 예외로 해놓았다.

 대통령이 5급 이상 공무원의 임면권을 자지도록 한 현행법에 따르면 구청 과장도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서울특별시에 계장이나 구청 과장, 경찰서 과장이 5급이다. 경찰청 과장이나 서울시 과장은 4급 직급이며, 서울시 국장이나 부구청장은 3급 공무원이다. 2급은 서울시의 국장이나 구청장이 되며, 지방경찰청에서는 차장이 2급이다. 장 · 차관과 더불어 정무직으로 통하는 1급은 서울시의 경우 관리관이나 기획실장, 또는 사업본부장직을 맡으며, 서울지방경찰청장이나 경찰청차장이 이에 해당한다.

 서울특별시에서 만든 간부급 공무원들의 주소록에는 5급 이상의 공무원 명단이 들어있다. 대통령이 임명권과 면직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서울시 본청에서는 인사과장 행정과장 총무과장 감사관 등 5급 이상 간부들이 이에 해당하며, 종합건설본부장 지하철건설본부장 상수도사업본부장 서울시립대학교총장 세종문화회관장 서울대공원관리사업소장 등도 같은 범주에 들어가 있다.

 또 동부병원장 아동병원장 정신병원장 서대문병원장 등 병원의 5급 이상 간부와, 서울시내 14개 소방서의 서장 및 간부와 청와대 소방대장에 대한 임면권 역시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행정부처에서 4급직은 ‘공무원의 꽃’으로 일컬어진다. 서울시의 과장급이다. 행정부 내에서는 “행정을 통솔하려면 4급을 잘 심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행정에 ‘도통’한 직급이 바로 4급이다. 평균 15년 정도 근무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이른바 ‘전천후 특공대’역할을 맡는데, 4급 자리에 오르기는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다. “4급부터는 윗사람 마음먹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총무처 자료(91년 초 현재)에 따르면 행정 · 입법 · 사법부를 통틀어 81만8천1백21명인 전체 공무원의 0.63%(5천2백21명)가 4급으로 분류되어 있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다. 3권 분립 원칙에 따른다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장인 국회의장과 대법원장에 대한 인사는 대통령의 권한 밖이다. 헌법 104조는 국회의 동의를 얻는다는 단서를 달아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임명하도록 규정해놓았다. 국회의장은 국회의원들이 뽑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국회의장이나 대법원장의 인사에 대통령의 입김이 직접 미친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많지 않다.

 국무위원이 임명되는 관례만 보더라도 대통령의 인사권이 얼마나 초법적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각 부처의 장관인 국무위원을 대통령이 임명하려면 먼저 국무총리의 제청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국무총리가 일차적인 국무위원 선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국무총리의 제청이라는 형식조차 밟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대통령은 행정부에 한해 5급이상의 공무원에 대해서만 임면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대통령이 임면권을 행사하는 대상은 훨씬 폭넓다. 차기 정권의 주인이 누가 되든 새 인물은 등용되기 마련이다.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 중 한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차기 ‘대통령의 사람들’도 새 옷 입을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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