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박사’ 좋아하다 상아탑 금간다.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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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제 유명무실해 ‘가짜 학위’ 등 부작용 우려 … “박사 실명제 실시해야”



 교수 공개 채용 때만 되면 국내 박사들은 절망한다. 해외 유학 박사의 빛나는 학위증 앞에서 이들이 내민 학위 증명서는 휴지 조각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내 박사들은 각 대학 당국의 해외 박사 선호 경향을 ‘근로기준법상 성차별과 같은 부당 노동행위와 다름없다’며 분개하기도 한다. 반면 유학파에게 학위 증명서는 교수 자리는 물론, 학문적 권위와 명예를 얻는 데 단연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자체에서 교수감을 배출하기 어려운 대학일수록 심하다. 재단 비리로 홍역을 않은 뒤 시립 대학으로 전환해 면모를 일신한 인천대와, 요즘 대학 운영의 모법을 보인다고 칭찬을 받는 홍익대의 최근 교수공채 결과에서도 해외 박사 편애 현상은 두드러진다.

 인천대는 지난 1월25일 국내 대학으로서는 드물게 교수 공채 합격자 명단을 신문 광고 형식으로 공개했다. 어느 대학이건 교수인사에 관한 사항은 대외 공개를 꺼리는 터라 이 대학의 교수 합격자 발표는 일단 참신하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인천대의 교수채용 내용에는 마냥 박수를 보낼 수 없는 구석이 있다. 인천대는 총 지원자 5백53명 가운데 합격자 22명 전원을 미국·프랑스·호주등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른바 ‘외제 박사’로 채웠다.

5만명 넘은 유학생…박사신고는 고작 5천건
 홍익대도 해외 박사를 선호한다는 면에서 인천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홍익대는 최근 교수 15명을 뽑아 94년도 교수 공채 작업을 마쳤는데, 합격자는 역시 미국 출신을 비롯한 외제 박사 일색이었다. 이번 교수 채용작업을 지휘했던 이 대학 임해철 교무부처장은 “해외 특히 미국 박사들은 출신 대학 순위가 정확히 나와 있어 교수 임용에 따른 시비를 없앨 수 있다”라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국내출신 박사들도 "홍대에는 미국 박사, 그 중에서도 상위대 출신이 아니면 지원 서류도 내밀지 못한다. 이런 관행은 홍대 내부의 약속으로 굳어 있다. 이런 식이라면 국내파 박사가 설땅은 도대체 어디인가“라고 항변한다.

 인천대 관계자에 따르면, 인천대는 이번교수 채용 때 지원자들에게 기회를 더 주기위해 원서 접수 기간을 한달로 늘려 잡았다. 한편 홍익대는 심사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지원자의 출신 고등학교 성적까지 보았다고 한다. 이처럼 비교적 공정하게 지원자들을 심사하는 대학들의 해외 박사 선호가 이 정도라면, 그 밖의 다른 대학은 어떤 정도인지 불을 보듯 뻔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누구나 해외에 나갈 수 있게끔 문호가 개방되면서 해외 유학생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교육부의 추정에 따르면 92년 현재 해외 유학생 수는 외국 대학에서 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경우 3만여명, 비학위 과정에 둥록한 사람까지 합하면 5만명을 훨씬 넘는다. 반면 교육법 시행령에 따라 해외 박사가 당국에 신고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신고된 건수는 고작 5천여 건이다.

 문제는 해외 박사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며 그에 따른 부작용이 더욱 많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다. 국내 학계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해외 박사들의 대량 유입으로 학문의 대외 종속이 심화되고 있다는 걱정이 나온다. “해외박사들 박사들 대부분은 선진국에 유학해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그 나라 학문 풍토에 젖어, 귀국하고 난 뒤에도 ‘한국은 그것밖에 안된다’는 식으로 선진국 예찬론자가 되기 일쑤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국내 대학의 해외 유학파 편애증이 근거가 분명하지 않거나, 함량미달인 해외 박사들의 국내 유입을 부채질해 자칫 고등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고, 대학의 학문 연구 분위기를 크게 해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최근 몇년 사이 동아대·국제대·상지대에서 일어난 ‘가짜 해외 박사 시비’는 그러한 가능성을 더욱 짙게 한다.

 가짜 박사 문제는 지난 92년 교육부가 90년4월 사립학교법을 개정한 뒤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교수 현황을 국회에 보고하면서 처음 제기됐다. 당시 교육부가 국회에 낸 국정 감사자료에, 국제대에 교수로 재직했던 박○○씨의 박사 학위가 가짜임이 밝혀져 재임용에서 탈락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도 가짜 박사 시비는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92년 10월에는 당시 상지대 교수로 있던 황○○씨와 신○○씨가 가짜라는 사실이 국회의원에 의해 폭로됐다. 또 93년 5월 한 일간지에는 동아대 교수 가운데 4명이 미국의 유령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딴 것으로 밝혀졌다는 보도가 나갔다. 당시 동아대 학생회측에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표면에 드러났던 이 사건은, 동아대 당국에서 “미국에는 실존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대학이 있어 오해가 생긴 듯하나 해당 교수들이 학위를 취득한 대학이 유령 대학은 아니다”라고 얼버무리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대학에서 해외 박사들이 각광 받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80년대 후반부 고등교육 시장이 양적으로 확대되면서 박사가 넘치게 되었다. 교육부 국립교육평가원에서 나온 교육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91년 현재 한국의 대학원 학생 수는 9만1천3백4명이었다. 지난 65년의 3천8백꼴명에 비하면 무려 23.8배가 늘어난 것이다. 그 바람에 교수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해외 유학 박사들은 그들의 실력에 대해 아무런 평가도 받지 않고 들어오기만 하면 교수 자리를 보장 받는 상황이 계속될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교육당국에서도 이제껏  해외 박사들을 전혀 관리해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교육부의 위임을 받아 학술진흥재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해외 박사 신고 제도는 가짜박사를 걸러낼 수 있는, 현재로서는 거의 유일한 안전판이다. 해외에서 학위를 딴 박사들은 귀국해서 6개월 이내에 학술진흥재단에 학위증과 학위 논문을 제출해 신고하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해외 박사 신고제는 이 제도가 성립된 배경이나 운영 면에서 볼 때 미흡하기 짝이 없다.

 해외 박사 신고제는 원래 해외 유학생이 드물었던 시절, 교육부가 고급 두뇌와 해외인재 현황을 쉽게 파악해 국가 발전에 이용하려고 고안한 제도였다. 유학생이 급증하고 있는 오늘날, 이 제도는 유명무실하다. 이제는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 너무 많아 단순한 신고제만으로는 현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더욱이 해외 유학생 가운데는 신고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거나, 알면서 신고를 피하는 사람도 많다. 학술진흥재단 정보보급실의 박대현씨는 “미신고자 가운데 규정을 몰라 신고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라고 밝힌다.

 나라마다 다른 대학원 제도와 박사 학위 수여 제도는 해외 박사들의 질적 수준을 평가하기 더욱 힘들게 한다. 외국에서는 박사 과정을 수료함과 동시에 논문 제출 여부와는 상관 없이 학위를 주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즉 외국에서는 박사 학위를 주느냐 마느냐 판단할 때 논문의 비중이 그리 크게 작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대교협서 해외 박사학위 관린 자료집 내
 해외 박사들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려는 작업은 최근에 들어와서야 겨우 준비 단계에 접어들었다. 여기에 가짜 박사의 국내 유입 가능성을 없애겠다는 또 하나의 목적이 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교협·회장 김희집)가 곧 펴낼 자료집 《세계 각국의 박사 학위 수여 대학에 관한 조사 연구》도 따지고 보면 ‘가짜 박사를 감별하고, 박사 학위도 금융실명제처럼 실명제로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하는 책자이다.

 교육부 의뢰를 받아 약 7개월에 걸쳐 작업을 벌인 끝에 완성한 이 자료집은 1천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에, 23개국 1천8백78개 대학(원)의 소재지, 학생 수, 교수 수, 박사학위과정 개설학과, 평가인정을 받았는지 여부 같은 정보를 담았다. 특히 자료집 서론 부분에 나라별· 대학별 학위 수여 제도를 상세하게 소개해, 해외 박사를 평가할 때 학위 수여 제도의 상이함에서 오는 혼란을 방지할 수 있게끔 했다(위 표 참조).

 작업을 맡은 대교협측은 올 1월말에 자료집 인쇄를 마친 후 대학과 공공기관에 배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자료집은 2월 중순으로 접어든 현재까지 전체 내용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대교협 고등교육연구소 이현청 소장은 “원래 5백부를 찍어내 연구소가 돌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료집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각 언론사, 안기부와 수사기관에서 까지 자료를 달라고 달려들자, 자료집이 불순한 목적으로 쓰이지나 않을까 우려한 교육부가 방침을 바꾸었다”라고 말한다.

 국내 대학 출신 박사 중에는 해외 박사의 질적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해외 박사의 논문에도 국내 박사의 경우처럼 등록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특히 논문만으로 연구 내용과 질적 수준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인문·시회 과학 분야는, 등록제말고도 번역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국내대학은, 교육법 시행령에 따라 학위 수여 예정일 30일 전에 학위 수여자 명부와 해당자들의 논문 요지를 교육부에 제출해 등록하게끔 되어 있다.

 97년으로 예정된 교육시장 개방과 국내 고등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예상되는 학위 세분화 추세 등으로 미뤄볼 때 앞으로 해외 박사들이 더 많이 들어올 것은 분명하다. 국내박사와 해외 박사 간의 공정한 경쟁을 위해나 학문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도 이른바 ‘해외 박사 실명제’가 이뤄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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