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시장 ‘좁은 문’에 美 야유
  • 표완수 경제부장 ()
  • 승인 1991.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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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외정책세미나 참가O/양국 긴장관계 학계서도 드러나

“일본에서 ‘쌀’은 하나의 농산물에 불과한 게 아니라고 한다. 쌀은 일본 국민의 일상생활과 관련, 깊은‘문화적?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과 똑같이 ‘자동차’는 우리 미국사회에서 뿌리깊은 문화적?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세미나에 참석한 1백여명의 청중이 일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자동차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자동차시장을 일본제 자동차들이 휩쓸고 있음에도 일본은 미국에 대해 자국의 쌀시장을 굳게 닫아놓고 있는 것을 한 미국인 학자는 그렇게 야유했다. 지난 봄 미국 메릴랜드대학 국제안보문제연구소(CISSM)가 학교 앞 ‘메릴랜드 인’에서 주최한 ‘동아시아와 미국, 미래의 전망’세미나에서 있었던 일화 한토막이다. 발언자는 브루킹스연구소의 에드워드 링컨 연구원.

시장개방 문제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미국?일본 사이의 팽팽한 긴방관계는 요즘 미국의 정계나 업계에서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곧잘 토론의 형태로 나타난다. 사실 그 며칠 전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식품전시회에 미국이 캘리포니아산 쌀 몇 부대를 ‘불법적’으로 전시했다가 적발되어 관련자들이 일본 관계당국에 의해 기소 위협을 받는 등 작은 소요가 있었다고 보도했었다.

기자가 6개월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 입안과정을 공부하면서 가장 두드러지게 느낀 것 중의 하나가 미국사람들의 ‘일본 의식’이었다. 학교에서는 강의시간마다 거의 매번 ‘일본 이야기’가 나왔다. 매주 금요일 실시된 ‘워싱턴 방문’은 연구생 20명이 단체로 워싱턴 D.C.의 미 연방정부기관?의회?민간연구소 등을 방문해 관계자들의 강의를 듣고 토론을 벌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거기서도 미국사람들의 ‘일본 의식’은 여실히 드러났다. 경제대국 일본의 향후 진로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일본시장의 폐쇄성에 대한 불만이 강의내용 곳곳에 배어 있는 것이다.

연구생들은 한국과 일본 외에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베트남 방글라데시 터키 호주 레바논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쿠바 아르헨티나에서 각 1명씩, 그리고 중국 인도 브라질에서 각 2명씩, 도합 20명이었다. 그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사람은 일본 통상산업성(MITI)소속의 니시무라 야스토시씨였다. 서른이 채 안된 젊은 나이에 깍듯이 예의를 갖출 줄 아는 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으나 부자나라 출신이라는 배경도 그의 인기와 무관치 않아 ‘일본 의식’현상이 연구생들 사이에도 퍼져 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등장하는 ‘런치 스피커’
미국사회의 도처에서 열리는 각종 세미나에는 ‘런치 스피커’(lunch speaker)가 곧 잘 등장한다. 먹으면서 떠들기를 좋아하는 미국사람들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그들의 자세가 엿보이는 발상이기도 하다. ‘런치 스피커’는 점심식사 시간에 특별히 초청된 연사로서 그는 대체로 일반 참석자들보다 식사를 약간 먼저 끝낸다. 그리고 특정 주제에 관한 강연을 한다. 참석자들은 계속 식사를 하면서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는데 강연이 끝나면 질문과 답변이 오간다. 메릴랜드대학의 윌리엄 커원 총장이 개막연석을 하고 하버드대학의 수전 파, 미시건대학의 케네드 리버덜 교수 등 미국의 저명한 아시아학자들이 참석했던 ‘동아시아와 미국…’세미나의 ‘런치 스피커’로는 미국무부 드세이 앤더슨 동아시아담당 부차관보가 출연해 기자와 북한?미국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걸프전쟁 기간에 미국 언론매체들은 군부의 검열을 받았다. 검열이 실시되기 전이나 검열 실시 이후의 신문 지면이 별 차이가 없어 기자로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학교 건물벽 곳곳에 낙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군부의 언론검열을 중단하라.” 학생들 10여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 모습도 가끔 보였다. 걸프전 기간에 메릴랜드대학에서는 학생시위가 여러차례 있었으나 학생 10여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는게 시위모습의 전부였다. 반면 걸프전에 관한 세미나에는 2백~3백명의 학생들이 몰려 열띤 토론을 벌였다.

장군도 줄서서 기다리는 미 국무부
미국 언론검열의 실상을 기자는 <볼티모어 선>외신부장 리차드 오마라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기사나 사진을 ‘넣어라’ ‘빼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기자들에게 샂전에 특정지역에는 들어가서 취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온다. 그러면 기자들도 대체로 협조를 잘 하는 편이다.”
“한국에서는 괜찮은 신문이라고 하면 발행부수가 1백만을 넘는다. <볼티모어 선>은 1백년이 훨씬 넘은 신문으로 한국에서도 구독자가 꽤 있는데 발행부수가 25만밖에 안된다니 놀랍다.”

“이상할 것 없다. 한국의 신문들은 대개 전국지 아닌가. <볼티모어 선>은 지방지이다. 미국에서는 일반독자들에게 지방지만으로 충분하다. 보통사람들로서 전국지를 읽어야 할 필요성은 거의 느끼지 못하며, 그 때문에 지방지 체제가 정착되어 있다. 한국처럼 부수가 많아질 필요성도 여지도 없다.”

국무부는 다른 부처보다 내방객들이 많다. 스펜스 리차드슨 한국과장을 인터뷰하기 위해 4월 하순 어느날 기자는 국무부에 들른 일이 있다. 출입증을 받기 위해 줄을 섰는데 놀랍게도 별둘짜리가 기자의 뒤에 줄을 서는 게 아닌가. 국무부 출입증이 따로 없으면 장군들도 줄을 서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방객들이 가장 많은 부처가 국무부인데 반해 출입이 가장 까다로운 부처는(아마도 한국과 마찬가지로)국방부이다. 만나볼 사람과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 반드시 관계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 ‘펜터건’안에서는 내방객 혼자 돌아다닐 수도 없다.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담당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하며 자판기에서 음료수 하나를 빼먹으려고 해도 직원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의회 기관의 출입이 행정부 기관보다 훨씬 수월했으며 분위기도 크게 차이가 났다. 의회예산실(CBO)을 방문, 로버트 라이샤워 실장(일본대사를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교수의 아들)을 만나는 데는 공항에서처럼 금속탐지기 하나만 통과하면 되었으나 대통령 직속인 예산관리실(OMB)의 윌리엄 디펜더퍼 부실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여권까지 제출해야 했다.

6개월 동안 아시아권 연구생들의 성실?근면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돋보였다. 여타지역 출신들은 곧잘 강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아시아권 출신들은 일반 강의나 세미나에 결코 빠지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아시아권 연구생들끼리 모이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사회의 장?단점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주제들이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국인 중국과 베트남에서 온 연구생들 외에도 방글라데시의 미자누르 라만 칸이 모스크바에서 7년을 수학, 석사학위를 받은 소련통이었는데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몰리는’것을 꺼려했다. 나이지리아의 교수 출신인 카요데 소레메쿤은 가끔 미국사회의 불평등, 특히 인종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으나 다른 연구생들로부터 오히려 그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냐는 반격을 받곤 했다.

돋보인 아시아인들의 성실성
메릴랜드대학 캠퍼스 안에는 서울 잠실의 롯데호텔 옥외 주차장 크기만한 주차장이 약 10개 정도 있다. 캠퍼스 사방에 퍼져 있는 대형 주차장들의 가로등이 대낮에도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시장개방 문제만이 미국의 이른바 ‘쌍둥이 적자’를 해결해줄 대안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궁금하게 여겼던 것 한가지를 덧붙인다. 오후 세미나가 끝난 다음 간혹 열리는 간단한 파티에는 음료수로 맥주가 제공되기도 했다. 얼마 안 있어 차를 몰고 퇴근길에 오를 교직원들이 거리낌없이 맥주를 마셔댄다. 음주운전이 철저하게 금지돼 있다는 나라에서 어찌 된 일인가. 한 교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맥주 한 두 캔 정도는 대개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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