쿤사한국계 요원 문충일씨 망명호소
  • 방콕.정희상 기자 ()
  • 승인 199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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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평생 끝없는 탈출 이젠 숨을 곳 없다

《시사저널》취재진은 지난 1월10일부터 1주일 동안 태국?미얀마 국경 지대에 자리잡은 마약왕국 쿤사 진영에 잠입해 마약 생산?공급 실태를 생생하게 취재하고, 쿤사 지역에서 한국계 인물이 활동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추적했다. 이 내용은 《시사저널》제224? 225호 커버 스토리‘쿤사 마약왕국 1천km 횡단’으로 보도됐다. 당시 《시사저널》이 확인 보도한 쿤사 진영의 한국계 인물은 문충일씨(57)였으며, 취재진이 현장에서 그와 만나려 시도했으나 문씨 부인이‘가족과 취재진 모두 위험해진다’고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 보도가 나간 이후 《시사저널》에는 국내외 여러 정보기관과 언론사로부터 확인 방문과 전화가 잇따랐다. 그 가운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 한 통화가 끼여 있었다. 취재진이 쿤사진영에서 문충일에 부인을 만나고 돌아온 후 문씨 가족은 정보 누설 혐의를 받고 위험에 처해 끝내 쿤사 지역을 탈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온 사람은 국내에 거주하는 장○○씨(38?영화업)였다. 장씨는 자신과 문충일씨와의 관계에 대해 《시사저널》이 보도한 대로 ‘한국에서 문씨를 돕기 위해 돈을 보내준 사람’이라고 밝혔다. 장씨를 만난 결과 문충일씨는 쿤사 지역에서 공개 사살 위협에 직면해 가족을 이끌고 태국 남부의 한 작은 도시에 은신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쿤사측은 피신한 문충일씨 일가족을 찾아내기 위해 태국 전역을 샅샅이 뒤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 국민이 도와주지 않으면 문씨 가족의 목숨은 시간문제라는 것이었다.

‘쿤사의 대문’공개하면 죽는다
 《시사저널》은 문충일씨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할 겸 생명의 위협에 처해 있다는 그의 가족을 보호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2월25일 태국으로 취재진을 급파했다. 
 기자는 방콕에 도착해서 문충일씨와 가족을 만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가 쿤사 지역을 탈출한 후 쿤사측은 발칵 뒤집혔다. 방콕 역시 그의 가족에게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쿤사의 살인 청부업자와 비밀요원 들이 방콕 시내 암흑가를 주름잡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쉽사리 은신처를 벗어날 수 없었던 문씨와 가족이 방콕에 들어와 기자와 만나기까지는 그를 숨겨주고 있는 장씨의 도움이 컸다. 이런 사정 때문에 기자는 도착한 후 만 하루가 지나서야 방콕 시내 한 호텔에서 그와 가족을 처음 대면할 수 있었다.

 부인(이순선씨?46)과 아들(문 철?20)딸 (문미령?13)을 데리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타난 문씨는 울음부터 터뜨렸다. 그는“30년 동안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사지를 전전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고국의 기자를 보니 설움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입을 연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네 사람 모두 입술이 바짝 마른 것으로 보아 이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의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방콕의 호텔도 결코 안전한 지역이 못되었기 때문에 문씨 가족과 기자는 관광객으로 위장하기로 하고 한국인 단체 관광단 틈에 끼여 파타야?푸켓 등 태국 남부 관광지를 전전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쿤사측에서 문씨와 가족을 죽이려 하는 이유는, 그가 비밀스런 마약 관련 내부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씨는 마약과 전쟁의 소굴인 쿤사 지역에서 4년반 동안 교사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특히 최근 2년 동안 그가 머물렀던 미얀마?태국 국경지대의 메수야는 쿤사가 거주하는 호몽과 인접해 있어서‘쿤사의 대문’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쿤사가 세운 이곳 중국인 학교는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무기 보급창으로 쓰였다. 메수야 부락 역시 세계 각지로 빠져나가는 헤로인 공급 기지이고 부락민들 대부분은 마약 중개상이라는 것이다. 문씨는 그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세계 각국의 마약 중개상들 면면과 거래 방법, 무기 조달 방법 등을 낱낱이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지역의 비밀은 우리밖에 모릅니다. 외부 세계에서는 쿤사와 호몽과 골든 트라이앵글에 대해서는 얘기를 많이 하지만 쿤사의 생명줄이고 마약?무기 거래의 총본산인 메수야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이모든 것을 밝히면 전 죽습니다. 그가 한국계이면서도 쿤사 지역 요충지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쿤사의 심복인 지역사령관(교장)의 절대적 신임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얀마 정부의 봉쇄로 문맹률이 높고, 이렇다 할 교재도 없는 쿤사 지역에서 문씨와 같은 지식인은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쿤사 지역 중국인 부락 아이들을 모아 중학교 과정까지 책임지고 지도를 해줄 뿐 아니라 대만과 서신을 교환해 갖가지 교과서를 보급한 것도 문씨 가족의 성가를 높였다. 게다가 그는 메수야에서 쿤사 지역 외의 다른 곳으로 나가는 여러 축하문?홍보문 따위를 쓰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중국인 지역 사령관의 신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다.

2월 초순 쿤사 지역 빠져나와
 그러나 그도 최근 들어서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꿈꾸며 기구한 삶을 살아온 그는 귀국 (망명)방법을 알아보느라 태국에 거주하는 몇몇 한국인과 서울의 후원자를 접촉했다. 이 사실을 안 쿤사측이 ‘정보 누설’혐의로 문씨를 추궁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와중에서 공교롭게도《시사저널》취재진이 문씨의 정체를 보도했고, 이는 그와 가족의 탈출을 재촉한 계기가 됐다.

 “《시사저널》기자들이 아내를 만나고 간 뒤 교장이 얼굴을 붉히며 대노했습니다. 교장은 쿤사의 지역 사령관으로 그곳에서 절대권한을 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사람 목숨 없어지는 것은 식은죽 먹기입니다. 더구나 전시라서 우리가 탈출하기 전에도 교장에게 의심받은 그 지역 사람 28명이 사살당했습니다.”
 문층일씨와 가족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2월 초순께 쿤사 지역을 몰래 빠져나왔다. 사선을 넘은 문씨 가족의 모험은 아이들이 태국어를 약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녀들이 의사소통을 해 태국 북부 메흥손 공항에서 치앙마이행 비행기표를 산 뒤 곧바로 은신처까지 들어왔던 것이다.

 탈출후 문씨 일가족은 여관을 전전하다 쿤사 지역에서 수백km 떨어진 한 소도시에 은신처를 구해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태국은 어느 곳에든 쿤사의 영향력이 미친다. 더구나 방콕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국계 중에는 쿤사의 정보 요원과 무기 공 취재진이 문씨의 정체급자가 수두룩하기 때문에 제3국으로 가지 않을 경우 이들은 언제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운명이다. 탈출후 쿤사 요원들이 태국 북부 도시부터 샅샅이 뒤지고 내려오는 현재문씨와 가족은 한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안타깝게 구명의 손길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문씨와 가족에게는 국적이 없다. 때문에 문씨 일가족은 한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정치적인 긴급 피난(또는 망명)을 요청하고 있다. 이들이 한국계이면서도 마약의소굴인 쿤사 지역에 들어가 살수밖에 없었고, 결국 거기에서조차 사지에 내몰려 고국에 구명을 요청한 것은 민족 분단이 안겨준 기구한 운명 탓이다.

세살 때 만주로 이주…어머니는 자결
 문충일씨는 38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그때 문씨의 부친은 서울 피어선 성경학교에 다녔는데 문씨가 세 살 나던 해에 일제의 박해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고향에서 상당한 재력을 자랑하던 문씨의 부친은 만주에서도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3형제 중 막내였던 문씨는 여덟 살 나던 해에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 직전 그의 부친은 혼자 서울로 도피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을 밀어내고 세력을 확장하던 공산당이 이 지역‘유산 계급’을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아버님은 위급한 상황에서 가족에게 훗날 데리러 오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완전히 공산화할 기미가 보이자 두 형님은 가족에게 후환을 막기 위해 중국 팔로군 (항일 공산군)에 자원입대 했습니다.”

 두 형의 팔로군 입대로 문씨 가족은 군속예우를 받아 계급 투쟁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우연한 계기에 문씨 부친이 서울로 도피한 사실이 발각되어 가정이 파탄된 것이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형님들마저 팔로군에 입대했다가 나중에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되어 가버린 뒤 만주에는 저와 어머님 단둘이서 살게 됐습니다. 가세가 기울자 제 학비조차 델 수 없었지요. 저는 56년에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 중학교를 졸업한 뒤 57년에 고등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2학년까지 마친 뒤 도저히 학비를 댈 수 없어 그만둘 상황이 되니까 59년께 어머니가 당서기를 찾아가 선처를 호소했어요. 그 자리에서 당서기는 ‘당신 남편이 서울로 도망간 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문제삼지 않았는데 무슨 염치로 찾아왔는가. 더구나 당신은 두 아들이 팔로군에 갔다고 자랑하는데 둘째는 미군에 포로로 잡혀갔다’고 호통을 친 것입니다. 어머니는 돌아오신 뒤 상심에 빠져 있다 끝내 자결하시고 말았습니다.”

 문씨는 싸늘하게 식은 어머니 시신 곁에 놓인 한장의 유서를 움켜쥔 채 학교를 그만두고 내몽고 자치주로 들어갔다. 유서에는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내몽고 자치주에서는 자유노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돈을 벌어 모친의 유언도 받들 겸 부친이 있는 서울로 밀항할 생각이었다.

동포의 밀고로 ‘반혁명죄’10년 옥살이
 그는 내몽고에서 서울로 가는 계획에 동참할 동지 세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이들 중국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계급적인 가정이 큰 타격을 입었던 사람들이라 쉽게 의기가 투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밀 계획은 60년 5월 단오날 물거품이 돼버렸다.
“술자리가 끝난 뒤 같은 한국계 박○○씨가 탈출 계획을 경찰에 밀고해 우리는 붙잡혀 갔습니다. 수첩?일기장?편지에 적힌 내용이 근거가 되어 우리는 반혁명죄에 걸렸고, 제가 주모자로 10년형을, 나머지 세 사람은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내몽고 시구이투지 인민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감옥에 수감돼 꼬박 10년을 살고 70년에 출감했다. 출옥 후에도 정치권 박탈 5년이 따라붙었고, ‘적대 계급’으로서 평생 수용소에 수감돼 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기약 없는 수용소 생활 속에서 문씨는 가까스로 결혼을 했다. 서른 여섯 살 난 노총각, 그것도 수용소에 갇혀 있는 문씨에게 선뜻 시집오겠다고 나선 처녀는 목단강시에 사는 한국계 이순선씨였다. 함경북도 단천이 고향인 이씨도 일제 때 만주로 피신한 부모를 따라 들어왔다고 한다. 

 수용소에 살림을 차리고 아들 철이 태어나자 문씨의 서울로 향한 꿈은 더욱 간절해졌다. 중국에 있는 한 죽는 날까지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할텐데, 그 운명을 아들에게까지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약 없는 그의 수용소 생활에 변화가 일어난 때는 79년. 모택동이 사망한 뒤 등장한 등소평 정권이 문씨의 수용소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이다. 등소평의 개방 정책 덕분에 사면을 받은 문씨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때가 처음으로 ‘살맛 나는 시절’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서울과의 질긴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중국에 사는 한국계는 자유롭게 서울에서 보내는 극동방송과KBS 방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극동방송을 통해 알게 된 서울 유관지 목사님께 편지를 써서 아버님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어요. 그것이 인연이 돼서 유목사님은 제게 특별히 관심을 갖고 답장을 보내오셨습니다.《백범일지》와 신문, 잡지류도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그 뒤 문씨는 서울의 여러 목사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기독교계에서는 중국 동포 선교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문충일씨와 같은 존재는 선교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국내 기독교계에서 많은 분이 저를 돕겠다고 나셨습니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와도 연결돼 여러 차례 편지 왕래가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천안문 사태 후 검거 피해 중국 탈출
 문씨는 80년대 초반에 조용기 목사의 소개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선교사로 일하는 이성현 목사를 알게 됐고, 이목사가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문씨를 만나면서 그는 중국내 교회 개척자로 변해갔다. 물론 교회를 짓는 비용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댔지만 문씨는 손수 목단강시 인근 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개혁?개방 정책의 불안정성으로 말미암아 문충일씨의 선교 활동은 그를 중국에서 버티기 힘들게 만들었다. 

 “89년 1월에 호주 시드니교회 강영식 집사가 저를 찾아와 북경에서 만났어요. 강집사는 제가 세운 중국내 한국계 교회와 시드니교회가 자매결연을 하자고 제의했는데 중국 정부는 그런 것을 철저히 금했습니다. 실정법 위반이라 난감하다고 하니까 우리끼리만 알고있자고 해서 자매결연을 하고,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북경 당국이알아내고 저를 불법행위자로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잠시 피신해 있다가 그 해 6월에 6?4 참안(천안문 사태)을 맞았습니다.”
 문충일씨는 천안문 사태 때 북경에 가서 동료 기독교인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했다고 한다. 정부에 철저한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였기 때문에 문씨는 적극 가담했다. 신문과 유인물을 시민에게 돌리는 일도 맡았다.

 그러나 천안문 사태는 문씨와 가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죽고 천안문 사태가 평정되자 북경 당국은 배후 조종 세력으로 외국인과 연락이 있었던 기독교인들을 점찍어 대대적으로 검거한 것이다. 문충일씨가 그 대상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그때는 잡히면 바로 처형되기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밤을 틈타 미얀마 국경을 넘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밀입국자로 잡히면 10년형 이상을 살아야 하므로 다시 쿤사가 지배하는 샨 주로 갔습니다.
 그와 쿤사 지역의 인연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89년 9월의 일이었다. 문씨 일가족이 처음에 들어간 곳은 샨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라시우였다. 중국 운남성과 인접한 라시우는 한개 군 정도의 면적인데, 60?70년대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던 아편왕 로싱한(羅星漢)의 거점이라고 한다. 문씨 가족이 이곳에 들어갔을 때는 로싱한이 2선으로 물러나고 펑자성 (彭家聲) 이 활약하고 있었다.

아편 소굴서 위장생활
 문씨는 이곳에서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살길이 막막해 하루는 라시우에 있는 중국인 정치단체 ‘문화회’를 찾아가 취직을 부탁했습니다. 문화 회장이 아편대왕 로싱한씨였는데 사장 얘기를 듣고는 지식층이 없어서 애를 먹고 있는데 잘됐다며 선뜻 중국인 학교 교사로 채용해줬습니다.”

 그는 아편 소굴인 이곳에서 중국인으로 위장해 교사 생활을 하면서 미얀마 북부 지역 아편군벌 실상과, 세계를 상대로 한 마약 공급 실테를 자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쿤사 조직이 라시우까지 뻗쳐 있었기 때문에 쿤사의 실상도 접했다. 2년여가 지난92년 4월 그는 마침내 현지에서 사귄 쿤사진영 교사들 덕분에 쿤사가 사는 호몽 인근 메수야로 영입되어 갈 수 있었다. 

“메수야에 있는 학교 교장이 쿤사의 심복이었는데 저를 데려가면서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3년만 같이 일한다는 것과, 가족이 같이 들어올 경우 그 뒤 진로는 반드시 쿤사측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 말은 가족과 함께 군사 지역에서 살려면 호몽에 배치되어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말과도 같았습니다. 불안했지만 이곳까지 와서 가족과 헤어질 수 없어서 그러마고 약속했습니다.”

 문씨가 가족을 데리고 쿤사 지역에 살면서 학교를 잘 꾸려 나가니까 그에 대한 쿤사측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갔다고 한다. 게다가 문씨가 거주하는 지역이 쿤사의 마약?무기를 수급하는 관문이라서 문씨는 자연히 쿤사진영의 많은 비밀을 알게 됐고, 그에 따라 문씨를 잡아두기 위한 혜택 (집?급료)도 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문씨가 한국어를 잘한다는 점 때문에 쿤사측은 한국에 헤로인 판매루트를 개척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상당량의 한국쪽 마약 관련 정보를 주기도 했다(30쪽 인터뷰 참조).

 30년에 걸친 방랑 끝에 또다시 쿤사지역을 도망쳐 피난길에 나선 문충일씨. 황혼기예 접어든 문씨의 이번 방랑은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어떤 길보다도 가혹하고 위험한 길임이 분명하다. 문씨 일가족은 지금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세계적 마약 군벌에게 쫓기고 있다.
“저는 한국인으로서 평생 조국을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지금도 갈 곳 없이 쫓기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 법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당장 우리 가족이 위태롭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디 한국에 들어가 살게해주십시요.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우리가족을 살려주십시오.”

 장장 12시간에 걸친 문씨와의 대담은 처절한 절규로 막을 내렸다. 문씨의 아들 철군은 “다른 분들 같으면 위험에 닥칠 때 가족을 버리고 혼자 피했겠지만 한국에 들어가시겠다며 평생 가족을 데리고 다니신 아버지를 존경한다”라고 말했다. 딸 미령양은 불안한 듯 눈망울만 굴리다 한국에 가게 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서툰 한국말로“중학교에 다니고 싶어요”라고 대답했다.
 문씨 일가족은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에 몸부림치며 한국 정부와 국민을 상대로 구명을 호소하고 있다. 《시사저널》을 통해 정부와 국민에게 드리는 피난 요청서를 보내고, 태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 이제는 우리 정부와 국민이 사지에서 보내오는 문씨 일가족의 애끊는 절규에 화답해야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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