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재벌정책 바꾼다
  • 김방희기자 ()
  • 승인 199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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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에서 지원으로… 기획원의 신산업정책 전면수정 주도



 청와대를 중심으로 정부의 대재벌정책을 수정하기 위한 논의가 계속돼왔으며, 이 논의에서 합의된 부분은 이미 정부정책으로 채택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논의에 참석했던 관계자들은 “청와대 비서실의 연락을 받고 5월 중순 첫 모임을 가진 이래 몇 차례 더 모였으며, 재벌정책을 수정하기 위한 최종보고서를 작성중”이라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 3월 이후 재계와 언론계를 더들썩하게 했던 ‘신산업정책’ 논란이 재계의 반발로 무산된 후에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시사저널》137호 참조).

 그동안 신산업정책이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재벌 규제 위주로 시안들을 낸 반면, 이 모임의 최종 보고서는 재벌에 대해 이미 실시하고 있는 여신관리제도와 앞으로 실시될 상호지급보증 등의 규제정책을 실질적으로 폐지하고 지원 정책이 중심이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논의에는 재계를 대표해서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 관계자들이 참여해왔다. 만일 논의 결과가 정책으로 채택될 경우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아래 실질적으로는 재벌에 대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것이어서 경제력 집중을 조장한다는 반발이 일어날 것도 예상된다.

 이 논의로 청와대비서실이 경제기획원을 대신해서 재벌정책에 관한 작업을 주도하는 계기를 잡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경제비서관들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이 주도한 재벌규제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울 뿐만 아니라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아왔다. 청와대는 문어발식으로 다각화한 재벌들을 전문화시켜 국제경쟁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대재벌정책의 요체라고 본 반면 경제기획원은 대기업집단의 소유를 분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왔다.

 이 회의를 주도한 청와대 관계자는 자기가 기획원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기획원의 작업은 쓸데없는 잡음만을 불러일으켰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참석자들은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재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대재벌대책을 세워야 한다는데 합의했다고 전했다.

 청와대가 주도하는 재벌대책은 주로 업종전문화로 요약되며 전문화시키는 방안도 강제적인 방안보다는 각 재벌그룹이 전문 업종에 전력투구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대책을 세우겠다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다. 지난 7월23일 盧泰愚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30대그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이제는 기업이 자기 판단에 따라 업종을 전문화해 집중투자하고 경쟁력이 없는 분야에서는 스스로 빠져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재계의 목소리가 수용됐다는 점으로도 정부의 재벌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모임에는 청와대 한국개발연구원(KDI) 산업연구원(KIET) 은행감독원 관계자들이 각각 2명씩 참여했고,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KERI)에서도 2명이 참여했다. 4월 초순께 신산업정책에 대해서 재계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청와대는 중지를 모아보자는 취지에서 전경련 고위 관계자를 통해 재계의 참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경제연구원 소속 참여자들은 기업의 경쟁을 막는 요소들을 철폐하고 정부가 불필요한 규제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알려졌지만, 한국경제연구원쪽은 이 논의에 자신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참석자들은 그룹식 경영을 탈피하게 만들고, 부실한 기업의 도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하며, 재벌이 여신을 독점하는 현상을 줄이기 위해 재벌그룹 계열사 간에 빚보증을 서주는 상호지급보증을 금지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외국의 경우 상호지급보증 자체가 거의 없고, 한국의 재벌과 가장 비슷한 일본 기업집단도 각 기업별로 신용대출이나 담보대출을 하고 있다는 점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30대 그룹 76개 주력기업의 상호지급보증은 이미 지난 91년 8월 동결된 상태이고, 나머지 기업의 상호지급보증도 올해 6월 수준에서 7월부터 동결됐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공정거래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청와대가 주도한 회의에서 나온 것 중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도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송熙秊 원장은 7월 3일 전경련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국 금융산업의 과제와 발전 방향’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주인 없는 은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금융전업자본의 소유집중을 어느 정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 금융시장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금융기관의 도산이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금융기관의 도산이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금융기관 소유규제는 완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재벌과 은행 간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청와대 논의의 흐름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앞으로 경제정책의 공격을 뒤바꿀 수도 있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 차원의 재벌대책’내용을 간추려본다.

 

재벌의 전문화 : 우리나라 재벌은 여러 업종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어 수십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으나 단일 업종의 세계적인 대기업과 비교할 때 경쟁력은 매우 낮다. 예를 들어 미국의 자동차회사인 제너럴모터스(GM)나 전기중공업체인 제너럴일렉트릭(GE)의 매출액은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그룹보다 훨씬 크다. 일본 기업과 견주어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국경제가 개방되면서 국제적인 경쟁이 치열해지면 재벌은 과거와 같이 무리한 다각화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기업들이 커지기만 하면 얻을 수 있던 부동산 투자이익 같은 불로 소득이 점차 줄어들고 있어 스스로 전문화를 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정부는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해 출자규제제도, 여신관리제도와 각종 진입규제를 실시하고 있다. 출자규제제도는 재벌그룹 계열사 간의 직접적인 상호출자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계열사간 상호출자 총액을 규제하고 있다. 여신관리제도를 통해서는 신용대출을 규제하고 투자와 부동산 구입을 제한하고 있다. 91년 8월부터는 30대 재벌그룹이 3개 이내의 주력업체를 정하도록 하고, 주력업체에 대해서는 여신규제를 풀어주고 있다.

 이 제도들로 재벌을 전문화시키기는 힘들다. 재벌의 전문화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주력업체가 아니라 주력업종에 대해 여신규제를 풀어주어야 한다. 업체는 한 회사인 데 반해 업종은 생산기술이나 판매과정상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여러 업체들이다. 자동차회사의 경우 현행규정에 따라 주력업체로 인정된 자동차 회사만 여신한도관리에서 제외된다. 앞으로는 자동차회사, 자동차부품업체 등도 여신한도 관리에서 제외시킬 필요가 있다.

 주력업종에 대해서는 현행 출자규제초치(독과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3장9조)와 앞으로 실시될 상호지급보증 축소조치(공정거래법 개정작업 추진중)에서 제외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력업종에 대한 비주력업종의 출자나 빚보증에 대해서는 그 상한선을 높여주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정부는 재벌이 언론사업 소비성서비스업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규제하거나 진출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

 업종전문화정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불필요한 개입을 삼가고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 중복투자나 과잉투자라는 이유로 신규진입을 규제하는 것과,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재벌의 참여를 막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삼성중공업의 상용차시장 진출과 중소기업고유업종 해제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재벌과 금융의 관계 재정립 :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관계는 한나라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느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오랫동안 관치금융의 그늘 아래서 주인 없는 경영을 해온 한국 은행들은 심각한 경쟁력의 위기를 맞고 있다.

 만일 재벌이 은행을 가질 때 생기는 경제력 집중문제만 해결 할 수 있다면 재벌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다. 은행업에 진출한 재벌들은 자신의 은행경영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고 은행의 경쟁력도 높아지게 된다. 다만, 이 경우도 전문화 개념을 도입하여 산업재벌과 금융재벌을 특화시켜 나가야 한다.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제2금융권에 대한 진입규제도 점차 완화해나가야 한다.

 재벌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다면 은행도 재벌을 소유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은행 뿐만 아니라 각종 금융기관이 재벌의 지분을 많이 가진다면 재벌기업의 소유분산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 신산업정책 구상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빚었던 ‘부채-지분 교환’방안은 기업 재무구조를 충실하게 하고, 금융비용을 줄여 기업의 수익성이 올라가게 하므로 기업과 은행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부채-지분 교환방안의 내용에 대해서는 본지 128호 참조).

재벌의 소유 · 경영구조 개선 : 30대 재벌의 내부지분율(동일인, 친족, 계열회사가 가진 지분)은 46% 정도로 80년대 초반에 비해 다소 개선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높다. 이런 소유집중은 신축적인 경영구조를 불가능하게 하고 재벌=특정가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재벌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삼화시킨다. 따라서 정부개입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보는 일부의 시각 때문에 재벌의 소유분산에 대한 논의까지 중단해서는 안된다. 소유분산을 위해서는 기업공개 요건을 강화하고 상속 · 증여세제를 엄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상호지급보증을 단계적으로 축소하여 그룹집중식 경영구조를 타파하고 재벌그룹의 도산도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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