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21세기가 두렵다
  • 도쿄.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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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유망 산업 ‘멀티 미디어’약점…자동차.반도체도 미국에 밀려

미국의 칼럼니스트 로버트 새뮤얼슨은 작년말‘저팬 애스 넘버 투’라는 글에서 일본 경제의 침몰과 미국경제의 부활을 예고해 큰 화제를 모았다. 그는 일본의 경제적 실패로 ‘일본 모델’은 더 이상 참고할 가치가 없다고 지적하고, 미국이야말로 세계 최대 또는 최고의 생산성을 다음세기에도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타임》역시 작년말‘디트로이트는 드디어 이륙 단계’라는 커버스토리를 싣고, 미국 자동차 산업의 부활을 예고했다. 이 잡지의 인터뷰에 응한 크라이슬러 자동차의 홍보부장은“앞으로 일본은 참고는 될지언정 모델이 될 수 없다”라고 장담했다.

 몇년 전만 해도 일제 자동차에게 밀려 허덕이던 크라이슬러가 이처럼 큰소리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제조공정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신무기‘네온’을 개발했기 때문이다.‘일제 자동차 킬러’라는 별명이 붙은 이 차의 가격은 대당 8천9백75달러. 이는 같은 2천cc급 자동차인 일제 혼다의‘시빅’이나 도요타의‘카로라’에 비해 2천달러나 싼값이다. 4천여 개의 생산 공정을 새로 짜고 개발 기간을 31개월로 단축한 결과다.

 미국 언론은 또, 일본의 독무대로 알려져 온 반도체 제조 부문에서도 미?일 간에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정보기기 시장조사 회사 데이터 퀘스트가 작년말 세계 반도체 시장의 나라별 점유율을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미국 반도체 기업이 점유율 41.9%를 기록함으로써 8년 만에 수위자리를 탈환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의 시장 점유율은 한국?대만 등의 약진으로 41.4%에 그쳐, 85년 이후 고수해온‘넘버 원’자리에서‘넘버 투’로 밀려났다 <니흔 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이 통계에는 작년부터 외부 판매를 본격화한 IBM의 실적이 포함돼 있지 않아 미국과 일본의 실제 격차는 더 크게 벌어져 있다고 한다.

일, 미국의 반도체 식민지 될까 걱정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들은 이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이 또다시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예측하고 ‘반도체 산업의 사우디화’현상을 크게 염려했다. 즉 초소형 연산장치(MPU) 개발 경쟁에서 크게 뒤떨어진 일본 기업은 앞으로 원유와 같이 부가가치가 적은 컴퓨터밖에 양산할 능력이 없게 돼 단순한 미국의 하청 기업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자, 이번에는 일본이 따라올 차례다’이것은 작년 11월 <뉴욕 타임스>에 실린 특집 기사의 제목이다. 미?일 역전은 21세기의 가장 유망한 성장 산업이라는 멀티 미디어 분야에서 더욱 심각하다.

 일본 우정성의 에가와 방송행정국장은 최근 고화질 텔레비전 (HDTV) 개발에서 NHK의 하이비전 방식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해 일본 가전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NHK의 하이비전 텔레비전은 주사선이 1만1천25개로 현재의 텔레비전 방송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따라서 여배우가 완벽한 분장을 하더라도 주름살을 감출 수 없을 만큼 화면이 선명하다.

 NHK는 도쿄올림픽이 열린 64년부터 이텔 레비전 개발에 착수해 89년 시험 방송에 성공했다. 그동안 기술 개발에 쏟아부은 돈만해도 1백90억엔에 이른다. NHK는 오는 97년 새로운 방송위성 BS-4가 발사되면 현재 9시간씩 시험 방송하고 있는 하이비전 방송을24시간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
 또한 일본의 가전업계도 이 하이비전 방식으로 세계의 텔레비전 시장을 석권한다는 원대한 야망을 불태워 왔다. 소니는 이 텔레비전을 개발하는 데 5백억엔을 투입했고, 히타치는 1천억엔, 일본 가전업계 전체로 보면1조엔 이상을 투자했다.

 그러나 4년전 미국의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사가 디지털 송신 방식의 고화질 텔레비전을 개발하면서 일본의 우위는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미국이 개발중인 차세대 텔레비전ATV의 송신 방식이 디지털 방식으로 결정됐고, 유럽연합(EU)도 작년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할 방침을 굳혔기 때문이다.

 일본 우정성은 이러한 각국의 움직임에 따라 NHK 하이비전 방식의 세계 규격화가 실패했다고 보고, 고립을 피하기 위해 그 계획을 재검토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고화질 텔레비전 개발 경쟁에서 일본의 패배를 우정성이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이 더 문제"
 일본 우정성의 고민은 또 있다. NHK의 하이비전 방식, 즉 아날로그방식이 멀티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 
 멀티 미디어란 컴퓨터?텔레비전?통신망 등을 연결한 미래의 새로운 복합 산업이다. 앞으로 기술 진보에 따라서는 그 규모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으로 기대되는 성장 산업이다.

 텔레비전은 멀티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 단순한 영상 수상기가 아니라 컴퓨터?광파이버와 연결되어 영상?데이터?문자 등 방대한 정보를 하나의 채널로 수신하는 단말기 구실을 하게 된다. 때문에 갖가지 정보를 세분하여 가공할 수 있는 디지털 방식이 절대 유리할 것은 뻔한 이치다. 그래서 컴퓨터를 비롯한 정보 통신기기들도 디지털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멀티 미디어 시대의 주역은 미국이다’라는 미국 언론들의 주장도 최근 들어 부쩍 눈에 띈다. 그 근거는 일본의 정보통신망 정비가 미국보다 10년은 낙후되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미국은 멀터 미디어 시대에 대비하여 현재‘정보 하이웨이' 구상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인구의 10% 이상이 가입되어 있는 케이블 텔레비전의 동축(同軸) 케이블을 이용하여 각지의 연구 기관에 설치되어 있는 슈퍼컴퓨터를 초고속 통신망으로 연결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미국 정부는 이를 위해 작년에 이미 약 10억달러를 투입했으며, 2015년까지 완성할 방침이다.

 미국의 정보 하이웨이 구상을 뒤쫓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의 ‘차세대 통신망 계획'이다. 전화 회선에 비해 천배가 넘는 정보를 송?수신할 수 있는 광파이버로 일본 전국을 연결한다는 계획인데, 우정성과 일본전신전화(NTT)의 주도권 싸움으로 별 진전이 없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판단이다. 게다가 우정성의 계획대로 이 구상이 추진된다 하더라도 2015년 시점에서는 전국의 80%밖에 연결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일본의 침몰과 미국의 부활을 지적하는 미국 언론들의 보도를 일본인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일본의 주간지 《주간 신조》는 최근 미국언론들의‘가혹한 일본 공격'을 소개하고, 각계의 전문가를 동원해‘일본은 결코 침몰하지 않았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 기사는, 36개월째로 접어든 장기 불황과 엔고 현상으로 일본 기업의 경쟁력이 일시 후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1천3백억달러에 달하는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점을 들어 '일본의 낙일을 점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주장했다.

 NHK 하이비전 방식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힌 우정성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NHK와 가전업계는 하이비전 방송만이 현재 실용화한 유일한 고화질 텔레비전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디지털 방송은 빨라야 2000년에야 개발이 끝나기 때문에 '일본의 패배'를 선언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입을 모은다. 또한 하이비전 수상기에 간단한 어댑터만 설치하면 디지털 방식으로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한 하이비전 방식을 계속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21세기의 산업 판도를 뒤바꾸어 놓게 될 멀티 미디어 얘기가 나오면 모두가 함구무언이다. 일본 최대의 전신?전화 회사인 일본전신전화의 사장조차 이 분야에서 일본이 크게뒤져 있다는 데 대해 대꾸를 못한다. 

 그는 최근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멀티 미디어 개발 경쟁에서 3~4년 낙후되어 있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하고, 일본의 경제인들 사이에 "더이상 미국을 추격할 수 없다는 패배감이 팽배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이 주장하는 미?일 역전은 바로 스승이 과거의 제자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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