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장중 五大佯에 빠진 구원파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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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장과 17년간 관계…평신도 중심 복음운동, 기존교회 신도 상대로 교세 확장

오대양사건의 의혹이 하나 둘 벗겨지면서 세인의 관심은 宋在씨(여?45)를 연결고리로, 주식회사 세모의 OOO 사장(50)과 그의 장인 OOO목사(65)가 교주로 있는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로 옮겨지고 있다. 도대체 구원파는 어떤 종교단체일까.

먼저 89년 1월16일 전남경찰국 수사과에 사기혐의로 구속된 송여인의 피의자신문조서의 일부분을 살펴보자.

문 : 권신찬?유병언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답 : 나는 76년 9월부터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있는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에 나갔는데 권신찬은 그 교회 목사였고 유병언은 권신찬의 사위로서 가끔설교를 하였으나 사업을 하고 있어서 사장님으로 불렀습니다.….(중략)

문 :  그 교회 명칭이 기독교복음침례회가 아닌가요?

답 : 처음에는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라 하였는데 그 뒤에 명칭을 바꿨는지는 모르 겠습니다.(구원파측에서는 송여인이 구원파를 업고 사채를 끌어들인다고 판단, 83년 교단차원에서 송여인과 관계없음을 공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하의 ‘문답’은 송여인이 조달한 사채의 행방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어쨌거나 구원파는 송여인의 진술에 나타난 바와 같이 81년까지는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로, 그 이후에는 ‘기독교복음침례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교세를 확장해왔다.

구원파의 역사는 61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 딕욕, 데리 어릭, 화란인 선교사 길기수의 영향을 받은 권신찬 목사와 그의 사위 유병언씨를 중심으로 몇백명의 신도가 모여들어 형성된다. 이들에게 ‘구원파’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행위(십계명을 지키는 것)를 통해서 구원 받는게 아니라 구원을 통해서 행위한다”면서 단한번의 ‘회개’로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폈기 때문이다.

‘사상전환자’중심 전국 규모 수양회 개최
이에 대해서는 한때 유사장의 통역비서였지만, 이제는 구원파와 결별한 대전침례교 신학대학 OOO 교수처럼 “개인적 경험에의한 구원을 강조하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당이다”라고 주장하는측도 있다.

권신찬 목사는 62년 9월 장로교에서 금지하고 있는 ‘침례’(온 몸을 물에 담가 세례의식을 치르는 것)를 받음으로써 그해 12월 대한예수교장로회로부터 목사자격을 박탈당한다. 이렇게 장로교에서 떨어져나온 권목사는 63년 대구에, 65년 인천에 각각 교회를 세우고 목회활동을 시작한다.

이 당시 이들은 기존교회의 제도적 병폐를 비판하고 ‘평신도 중심’의 복음운동을 펴면서 기존교회의 신도들 사이에 급속하게 파고든다. 평신도 중심의 복음운동이라는 전통은 지금의 구원파 조직체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즉 △교사회 학생회 노인회 군선교회 등 직능별 연령별 평신도모임을 주측으로 하고 있고 △‘예배’라는 말 대신에 ‘모임’이라 부르고 △축도나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다든가 △직업 교역자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50여명의 순회전도인이 전국의 지교회를 돌며 회원들의 영적생활을 지도하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구원파의 ‘서울입성’은 66년 권목사가 극동방송에 방송목사로 부임, 방송선교 프로그램인 <은혜의 아침>을 맡은 후부터였다. 이때 “청취자들 중에 수천명의 사상전환자들이 생겨났다”고 구원파에서 발행한 <우리가 걸어온 길>은 밝히고 있다. 이때까지 ‘대외적 간판’을 내걸지 않았던 구원파는 73년부터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사상전환자’들을 중심으로 매년 전국적 규모의 수양회를 개최하며 교세를 확장해나간다.

기존교단, 권목사 선교프로 비판
구원파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74년경이다. 이른바 ‘극동방송 분규사건’때, 처음으로 개신교계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받았기 때문이다. 구원파가 이끄는 수양회에서 ‘사상이 전환된’일부 신자들이 각자의 교회에 돌아가 해당 교회의 신도들에게 “당신은 구원받으셨습니까” 라며 이의를 제기하자, 74년 2월 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 성결교회 감리교회 등 기존교단에서 극동방송에 권목사의 선교프로를 중지하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극동방송은 구원파측 직원 11명을 해고시킨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구원파가 대법원에 항소, 승소판결을 받아낸다. 결국 구원파와 기존교단의 힘겨루기는 타협 끝에 구원파가 극동방송을 떠나는 쪽으로 결말을 맺었다.

권목사와 함께 구원파를 이끌어왔던 유병언씨는 이당시 모임의 구심점을 상실했다고 판단, ‘공식적’으로는 구원파에서 손을 떼고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현재 세모측과 구원파측은 “이때 이후 종교적으로 전혀 상관없는 사이가 됐다. 더욱이 유병언씨는 80년 이후에는 어떤 강연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권목사는 <시사저널>과의 서명인터뷰를 통해 유병언 사장과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유사3장은 내 사위이지만 본 교단에 10년째 출입을 하지 않았다. 다만 서울 지교회나 지방 지교회 교인 중에 유사장이 경영하는 회사에 종업원 또는 간부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검찰이 오대양 사채의 행방을 추적한 결과, 여러 곳에서 세모와 구원파측의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세모의 주주인 OOO씨(의사)가 90년 7월까지 기독교복음침례회 총회장이었고 △세모 유사장의 현주소가 구원파의 대구 지교회인 대명중앙교회와 같고 △송여인이 88년 10월31일 전남 완도에 있는 권목사 차남집에서 세모개발실에 통화한 사실이 있고 △유사장이 삼각지교회와 권목사 차남소유의 주택 등 시가 61억 상당의 부동산을 은행에 근저당한 점으로 미루어 유사장과 구원파는 계속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국내 13만명. 해외 2만명 신도
이에 대해 구원파의 徐和男 선교부장은 “유사장이 우리 교단을 떠난 것은 분명하지만 권목사의 사위인 만큼 세모와 인간적 교류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밝혀진 세모와의 관계는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구원파가 오대양사건의 배후라는 언론의 보도 때문에 신도들이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받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들의 얘기를 종해보면 교인들 중에 유사장과 ‘경제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도, 교단 차원의 관계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들도 오대양사건의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워낙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검찰의 수사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속단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81년 1월 구원파는 “교세가 확장되다보니 더이상 평신도운동으로만 머물 수 없어서”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정식교단으로 등록한다. 83년초 구원파는 송여인이 이끄는 ‘통용파’는 ‘예수=유사장’이라는 뜻의 ‘이꼴파’, 유사장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재림파’와 ‘광주엄마모임’ ‘OO모임’으로 갈라지는데, 송여인은 ‘이꼴파’를 중심으로 사채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현재 구원파는 국내에 1백76개 지교회에 13만명의 신도, 해외에 60개 지교회에 약 2만명의 신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난 83년부터 미국 로스앤젤레스 호놀룰루 괌 뉴욕 워싱턴 등지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채널을 확보, 매주 일요일 아침 시간대에 권목사의 설교를 방송할 정도로 급격한 세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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