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핑 막으려던 칼질이 ‘덤핑’
  • 김상익 기자 ()
  • 승인 1991.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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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구제, 듀폰 등에 반덤핑관세 4%로 낮게 부과…정부 스스로 권위 떨어뜨려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 옆 ‘올드 이그제큐티브 빌딩’에는 미 연방정부의 예산을 담당하는 예산총국(OMB)이 있다. 예산총국 회의실 벽에는 각종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중 부시 미 대통령이 칼라힐스 무역대표부(USTR)대표에게 칼을 건네주는 사진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액자에는 장난기 섞인 사진설명이 붙어 있다. “이 칼을 잘 사용하시오.”

미 무역대표부는 최근 한국정부가 한국듀폰 훽스트셀라니스 아사히케미칼 등 3개 미국 및 일본회사의 홀리아세탈수지 3개 품목에 대해 덤핑판정을 내리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으름장을 놓듯 칼자루를 흔들어보인 것이다.

이같은 압력을 의식한 탓인지 7월23일 재무부 관계심의위원회(위원장 ooo 재무부차관)는 국내산업 보호를 위한 가장 강력한 조처를 최초로 발동했디만 최저 20.6%세서 최고 1백7.6%까지 덤핑률이 확인된 이들 제품에 대해 불과 4%상당의 반덤핑관세만을 물리는 데 그쳐 “정부가 너무 미국의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선진국에서 남발되는 반덤핑제소
한국상품은 지난 10여년간 미국 유럽공동체(EC) 등 세계 주요시장에서 반덤핑관세라는 가혹한 칼날을 맞고 휘청거렸다. 지난 85년 미국으로부터 무려 64.8%의 반덤핑관세를 두들겨맞은 한국산 앨볌은 그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78년부터 91년 3월말까지 한국상품은 미국에서 63건의 반덤핑제소를 당했다. 이중 반덤핑관세가 부과되고, 수출물량을 규제키로 협정을 맺거나 특허권 침해로 인한 수입 배제명령을 받는 등 어떤 형태로든 규제를 받은 것은 20건으로 제소건수의 31.7%에 불과하다(57쪽 표 참조). 반면 무혐의?무피해 판정을 받거나 제소가 기간된 사안은 27건(42.8%)이어서 반덤핑제소가 남발돼 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국 기업이나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무역협회 통상협력부 OOO씨는 “우리는 83년 미국에서 한국산 컬러텔레비전이 반덤핑제소를 당했을 때 비로소 덤핑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85년 앨범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반덤핑제도가 중소기업을 도산시킬 수도 있는 무서운 법이라는 것을 때달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89년 아크릴스웨터가 덤핑판정을 받았을 때는 업계가 힘을 모아 변호사를 대는 등 다소 적극적인 대응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상품이 해외시장에서 어려움을 겪는 동안 한국은 86년 2월 반덤핑관세 제도에 대한 국제협약인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반덤핑협약’에 가입했다. 또 87년 7월에는 ‘수입에 의한 산업영향 조사제도’를 도입했다. 수입개방 시대를 맞아 수입급증이나 외국기업의 덤핑공세로 인한 국내산업의 피해를 막아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됐던 것이다. 상공부 소속 무역위원회(위원장 OOO 고려대 교수)가 설치된 것도 이때다.

이 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밑에 무역조사실을 두고 있다. 무역조사실은 조사총괄과 산업피해조사 1?2과 불공정수출입조사과로 업무가 나뉘어 있다.

무역위원회 위원 중 상임위원은 OOO 무역조사실장 1명뿐이며 전체 인원은 50명이다. 상임위원 6명, 전체인원 4백50명인 미국국제무역위원회(USITC)와는 비교가 안될 뿐더러, 미국이나 캐나다의 경우 대통령 또는 재무부 산하 독립 규제위원회인 데 반해 우리의 무역위원회는 상공부 소속 준독립 행정위원회라는 약점을 안고 있다. 이번의 반덤핑관세 부과결정에 앞서 미국측은 “국내산업 육성기관인 상공부가 무역위원회를 관장하는 것은 공정성을 잃을 우려가 많다”고 지적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수입 때문에 발생하는 산업피해는 △수입급증에 따른 산업피해와 △덤핑수입에 의한 산업피해 두가지로 대별된다. 먼저 특정한 물품의 수입이 급격히 늘어 국내산업이 실질적인 피해를 받거나 그럴 우려가 있을 때 무역위원회는 이해관계자 또는 담당 행정기관장의 신청을 받아 조사를 실시, 산업피해 유무를 판정한 뒤 조사결과에 따라  수입수량 제한, 관세율 조정 등의 구제조처를 건의할 수 있다.

정당하게 빼어든 칼. 제대로 휘둘렀어야
덤핑에 의한 산업피해 구제절차는 좀 다르다. 이해관계자 또는 해당 산업을 관장하는 주무부 장관이 재부주장관에게 반덤핑제소를 하게 되어 있다.재무부장관은 그로부터 3개월 안에 예비조사와 관세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사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덤핑판정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은 덤핑률과 덤핑으로 인해 국내산업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었느냐 하는 것이다. 폐수?하수처리촉진제 등을 생산하는 이양화학의 경우(89년 10월 제소, 91년 2월 기각)처럼 덤핑 사실이 확인된다 하더라도 산업피해가 없다고 판정되면 반덤핑제소는 기각된다. 덤핑률 산정은 관세청에서 하며, 산업피해 유무 결정은 무역위원회가 맡는다.

조사를 통해 덤핑 및 산업피해 사실이 인정될 경우 재무부 관세심의위원회는 반덤핑관세부과 여부를 심의하고, 최종적으로 재무부장관이 반덤핑관세를 물린다. 무역위원회는 91년 3월까지 모두 20건의 조사를 실시했는데92건은 조사중) 이중 반덤핑제소에 의한 조사는 4건이었다. 반면 우리나라 상품에 대한 선진국의 수입규제는 거의 대부분이 덤핑을 이유로 한 것이다.

정부의 이번 조처는 덤핑수입에 의한 국내산업의 피해를 구제하는 첫 조처였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니지만, 반덤핑관세가 4%에 그친 데 대한 국내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우선 반덤핑관세 부과로 마땅히 혜택을 받아야 할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쪽은 “적어도 40%의 반덤핑관세가 매겨질 것으로 기대 했었다”면서 “그나마 달러화 아닌 원화 기준이어서 최근의 환율인상 추세를 감안하면 효과가 거의 없다”고 반발했다.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의 OOO 의원(신민)도 “앞으로 시장개방이 확대되면 이와 유사한 사안이 속출할 텐데 저율의 반덤핑관세를 부과,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다.

한편 한국듀폰측은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은 급속한 시장점유율 증가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사업확장과 가격인하 경쟁 때문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격”이라면서 “따라서 반덤핑관세 부과 조처는 부당하며, 듀폰은 덤핑 때문이 아리나 정책 때문에 희생됐다”고 주장했다. 이 일로 ‘자존심이 상한’미국 정부도 덤핑판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계속 문제삼고 있어, 자칫 또다른 무역마찰을 부를지 모른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아무튼 4% 관세 부과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것으로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공정한 절차를 밟아 빼어든 칼이라면 당당하게 휘둘렀어야지, ‘큰 나라’를 의식한 나머지 어설프게 사용함으로써 정부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리는 처사를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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