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흘러가지 않는다
  • 김훈(사회부장) ()
  • 승인 1994.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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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은 '과거'가 현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호소하지만, 그것은 족쇄가 아니라 자신의 숙명이다. "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과거'가 현정부의 발목을 옥죄고 있는 질곡의고통을 호소했다. 대통령의 호소는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했지만, 그 호소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제기해야 옳았지, 대통령이 국민에게 할말은 아닌 듯싶었다. 대통령이 말하는 과거라는 것이 대통령 자신과 단절된 시간 속의 과거가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의 현재이며, 현정권이 그 저주할 과거의 태 속에서 수태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 고통스런 과거를 말할 때 그것이 자신의 정부를 일방적으로 옥죄는 족쇄가 아니라 자신의 한 본질적 숙명이라는 인식을 가져야할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싸움은 그 숙명과의 싸움이라야 옳은 것이지, 그 과거를 과거로 외면하고 떨쳐버리기 위한 싸움이라면 정의로운 싸움이 될 수 없다. 지금 과거로 흘러 가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국제사면위원회가 김영삼 대통령 취임 1주년에 즈음하여 한국의 인권 실태를 평가한 보고서를 통해‘한국의 현정부는 과거에 자행된 악을 시정하려는 의지에서 실패했다'고 지적한 현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같은 평가는 인권 분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터이다.

잇달아 터지는부패 사건은 현 정권의 근본과 관련
 농협 회장 구속사건으로 곪아터진 농협의 구조적 비리나 국회 돈봉투 사건, 그리고 국민이거두어준 성금을 지방자치단체의 장들이 유용한 사건은 부패의 과거와 현재가 유구한 전통으로 묶여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전통은 현정권의 근본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농협이 농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인 돈을 민자당 국회의원들에게 선거 자금으로 제공했다는 놀라운 폭로가 사법적 결론에도 달하기를 기대하는 국민은 지금 거의 없다. 국회 돈봉투 사건이나 지방 행정기관의 성금 유용 사건이 어떠한 결론으로 끝장났는가를 국민들은 익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 사법적 결론이란 대체로 '유용은 했으나 착복은 없었다'는 식으로, 무기력하고도 너그러운 것이었다. 그 사법적 결론이란 첫째로 돈이 흘러가서는 안될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둘째로 정부는 그 사실에 대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는 무기력과 무의지를 천명한 것이었다.

 구속된 농협회장은 "농협은 이익 단체인 만큼 이익 단체로서의 행동 원칙이 있다"는 요지의발언을했다. 그 이익 단체의 행동칙위에 여당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이익이 실려 있었다면 농민들이 설 곳은 전혀 없는 것이다. 농협은 그 와중에서도 '신토불이' 현수막을 높이 걸고쌀수입 개방에 반대하기 위해 해외에 사람을 보내 국제시위에 참가하기도 했는데, 그 시위야말로 국민에 대한 배반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농협은 지난 오랜 세월 동안 농민을 상대로 이자 놀이나 하는 국책 금융기관에 불과하다는비판을 모면할 수 없었고, 농협이 그처럼 반농민적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로 농협 내부의 민주화가 달성되어 있지 않은 점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지난 89년 법률이 개정되면서 농협은 전국의 조합장과 중앙회장을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하게 되었다. 직선제 도입으로농협이 획득한 정치적 위상이 중앙 정치권에 대한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민주적 절차라는 것에조차 회의를 금할 수 없다.

일련의 개혁이 정치 흥행에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지금, 과거와 연결된 비리의 분출보다도 더욱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은 그 비리에 대한 정부의 자세이다. 새 정부 초기부터 시행된 일련의 '개혁' 정책은 과거의 몇몇 악들을선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으나, 현실의 구조를 개선하고 삶의질적 수준을 높이는 데까지는 아직 어림도 없어 보인다. 또 정부의 이른바 '사정'이라는 개혁 행위도 그 뿌리가 현정권의 본질 쪽으로 접근해가는 단계에서 늘 중단되거나 희석되어온 사실도 국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과거와의 단절이란 인간의 현실 속에서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떠한 과거도 도마뱀꼬리 끊어지듯이 인간의 역사로부터 떨어져나가지는 않는다. 또 김영삼 대통령의 정부는 자신의 한 숙명을 이루고 있는 그 과거를 칼로 치듯이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과거를 '현재'로 인식하고 맞대결 함으로써만 이 문민 대통령의 정부는 비로소 과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의 숙명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취임 초기에 90%를 웃돌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도는 취임 1주년이 지난 지금 60% 정도로내려 앉았다고 한다. 대통령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정상적인 자리로 돌아와 오히려 마음 편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마음 편함은 취임 초기에 60%정도의 지지를 얻었다가 1주년 후에 인기가 더 올라가는 경우보다 마음 편할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 90에서 60으로 하락한 현상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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