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청산하지 않는 일본
  • 도쿄 · 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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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통령 방문에 예전과 달리 ‘차분’… 일본인에게 과거사와 현실 문제는 별개

김영삼 대통령의 방일을 맞는 일본의 분위기가 예전과 달리 차분하다. 전두환 · 노태우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처럼 삼엄한 경비 태세도 별로 띄지 않는다. ‘일본이 싫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우익들의 반한 구호도 들을 수 없다.

 한 · 일 관계가 이제 ‘성숙한 관계’로 들어섰기 때문인가, 아니면 새로운 마찰을 눈앞에둔 한 순간의 정적인가.

 지난 2월말 <산케이 신문>은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서울 지국장이 쓴 ‘역사의 파괴’라는 칼럼을 1면에 실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총독부 청사였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 해체된다는 소식이다. 68년 전에 지은 그 건물은 지금가지 서울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의 단골 코스였다. 단지 총독부 청사였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광복 49년이 지난 지금 백악의 석조 건물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총독부 청사로 쓰인 것은 19년밖에 되지 않고 한국의 정부 청사로 쓰인 것은 그 2배가 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 기자회견에서 서울 시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역사의 파괴가 아니냐고. 그랬더니 다섯 신문이 필자의 발언을 파렴치한 망언이라고 물고 늘어졌다. 반일적인 기사가 한국 언론의 주요한 레퍼토리이고, 역사에 까다로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반응이나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이 날 <산케이 신문>의 사회면 머리 기사는 박동선씨 관련 기사였다. 코리아 게이트의 주인공이었던 박씨가 일본인 재산가를 명예영사로 임명시켜 주겠다고 속여 2천5백만엔을 사취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 지폐 위조범이 체포됐다는 기사도 사진과 함께 크게 취급했다. <산케이 신문>은 반공이 사시라고 할만큼 북한 · 중국 등에 대한 비판 기사를 많이 실어 주목을 끌어온 신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의 역대 군사 정권은 이 신문사와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 신문은 한 · 일 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한국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서온 신문이기도 하다. 교과서 파동 때도 그랬고 일왕 사죄 발언, 정신대 문제가 거론될 때도 그랬다. 따지고 보면 ‘혐한 감정’도 이 신문이 부추긴 결과다. 앞서의 구로다씨는 정신대 문제에 관한 한국측 주장을 잘 반격했다는 이유로 재작년 일본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본 우에다 상’을 받기도 했다.

정신대 문제가 경제에 영향 준 것 없다
 김영삼 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산케이 신문>이 이처럼 ‘역사의 파괴’쯤에서 한국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있다고 해서 2, 3년 전의 혐한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작년 11얼 경주회담에서 호소카와 총리가 창씨 개명 등을 거론하며 식민지 지배를 솔직하게 사죄했다고 해서 미래지향적인 한 · 일 관계가 구축되었다고 보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경주 회담에서 호소카와 총리가 밝힌 사죄발언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한 신문은 <아사히 신문>뿐이었다. 다른 신문들은 외무성 발표를 그대로 옮겨싣는 데 그쳤다. 호소카와 총리의 ‘솔직한 표현’을 경계한 외무성이 창씨 개명 발언 부분을 빼고 발표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과거사 문제와 현실 문제를 분리한 뒤부터 한 · 일 간의 수레바퀴가 잘 맞물려 굴러가고 있다고 보는 것은 한국측의 일방적인 해석이다. 과거사 문제를 양보했다고 해서 경제 협력이 금방 잘 될 것도 아니다.

 정신대 문제로 한·일 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3년 전, 일본의 장기신용은행 종합연구소 다케우치 히로시(竹內宏) 이사장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양국 경제인이 힘을 합쳐 무언가 해보려고 하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손’이 방해를 놓는다.”

 한국 경제인들도 당시 과거사 문제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크게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정신대 문제로 인해 한·일 간의 무역 역조가 더 심해지고 기술 이전 및 직접 투자가 격감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한국의 붕괴’나 ‘한국경제의 침목’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일본 기업의 국제적 네트워크에 참가하지 않는 한 더 성장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시 말해서 일본 기업의 하청 회사가 두드러지는 지금, 상황은 그때와는 사뭇 다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결코 스스로 무언가를 청산하고 해결하는 나라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도쿄 · 蔡明錫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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