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자녀는 ‘교육미아’
  • 이성남 차장대우 ()
  • 승인 199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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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문화 차이로 부적응 심각…원인 분석 및 교육모형 연구 미진

  과학철학을 전공한 부친을 따라 생후7개월에 도미, 10여년 만에 귀국한 조현무군. 미국에서도 집에서는 일부러 한국말을 사용해왔지만, 1년6개월 전 귀국하여 5학년 반에 전학한 뒤에 느낀 좌절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담임이 수업 시간에 “넌 통역이 필요하겠구나”라고 했다는 말을 아들로부터 전해들으며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또 교사가 칠판에 설명한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을 때 “다 썼지?”하고 물으면 “아뇨”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바람에 현무군은 번번이 교사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어머니가 교사를 찾아가 “답답하실 때가 많지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교사는 “어쩌면 그렇게 느려요?”라고 면전에서 무안을 주었다. 아들이 ‘지진아’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어머니는 미국의 성적표를 내보였다. 미국에서 아이의 성적은 우수했다. 4학년 때 6학년 산수 과정을, 5학년 영어 과정을 공부했을 만큼 남보다 앞섰다. 그러나 귀국해서 처음 받아본 성적표는 52명 중에서 50등이었다.

자폐증 걸리거나 거리 쏘다니는 사례도
  최근 몇년 동안 귀국자녀들이 급증하면서 주위에서 이같은 상황을 흔히 보게 된다. 공무원·상사 주재원·언론인·은행원은 물론 70년대 말부터 줄지어 떠났던 해외 유학생들이 속속 귀국하면서 자녀 문제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교육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990년 3월부터 9월까지 6개월에 걸쳐 해외에서 귀국, 서울시내 국민학교에 전입학한 학생수는 1천4백92명이다. 이는 한 학급당 50명 기준으로 총 30학급에 다하는 수효이다. 해외 거주권별로 보아 3분의 2 이상이 영어권 지역에서 귀국한 (도표 참조) 이들은 서울시의 2백69개 국민학교에 분산, 재학중이다. 잠실 선수촌에 있는 아주초등학교 6학년의 한 반은 전체 54명 중에 12명이 귀국자녀인 경우도 있다.

  교과내용은 물론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부적응 현상도 많다. 실험용 흰쥐를 집에서 키워 한동안 이상한 아이로 취급받은 어린이, 실내화 대신에 그냥 신발을 신고 교실에 들어가겠다고 고집하는 아이, 말을 시작하기 전에 “아”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웃음거리가 되는 아이,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영어소설만 읽는 아이, 스스로 미국사람이라고 인식하면서 길거리에서도 영어로 말하는 아이, 당연히 수긍할 내용인데도 수업중에 이의를 달고 따지는 아이 등. 이들은 1년쯤 지나 우리말을 곧잘 하게 돼도 “암흑 대륙”을 “얼굴이 까매서”라고 설명하기 일쑤이다.

  이같은 갈등 속에서 부적응이 심한 아이는 자폐증에 걸리는 수도 있으며 아예 공부를 포기한 채 거리로 쏘다니는 청소년도 있다. 82년부터 6년여 동안 아프리카 일본 등지에서 근무했던 한 해외 공보관의 경우 고등학생인 아들이 심한 자폐증세를 보이며 적응하지 못하자 결국 해외 근무를 자원했다.

  교육환경 및 교육방식의 변화 속에서 학부모들조차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이들은 대개 갓 귀국해서는 ‘이상적인’ 교육 원론에 입각하여 학원에도 보내지 않고, 숙제할 때도 아이의 창의성 개발을 위해 백과사전을 찾아서 하도록 지도한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런 교육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른 아이들은 숙제를 할 때 전과의 모범답안을 베껴 쓴 뒤 남는 시간에 그 내용을 달달 왼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교육상황에서 귀국자녀 부모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을 끓을 수밖에 없다. 국민학교 입학부터 ‘상위권’ 열차를 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전체 학부모가 사로 잡혀 있는 데 반해 귀국자녀를 둔 부모들만은 애써 열외로 비켜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마음을 먹어야지 초조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밀어붙이다 학교에 안다니겠다고 떼를 쓰면 어쩌겠느냐.” 올 1월에 귀국하여 3학년, 1학년을 둔 주부 양희경씨(37·서울 강동구 잠실 우성아파트)의 말이다. 남편과 10여년의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3학년짜리 아이가 “공부가 어렵다”고 가끔 푸념하지만 학교 생활에는 그럭저럭 적응하는 것 같아 내심 안도하고 있다. 이곳 교육제도 및 교과과정, 교육환경이 다르지만 어차피 한국에서 대학을 갈 아이라면 의당 이곳 실정에 맞추어 노력해서 따라가야지 “학교에 불평할 게 무엇인가”라고 그는 말한다.

  귀국자녀의 적응속도는 해외 거주기간, 귀국시기,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다. 해외 거주기간이 길거나 귀국시기가 늦을수록, 또 성격이 수동적·소극적일수록 적응에 어려움이 많다. 특히 외국에서 부모가 자기 일에 바빠 아이들끼리만 집안에 놔 두었을 때는 적응도가 떨어지고 자칫 비뚤어진 성격이 되는 수도 있다.

  이들의 교우 관계를 보면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교우를 좋아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아이도 있다. 자신이 ‘특별한’ 아이라는 사실을 뽐내려는 아이일수록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적응이 늦어진다. 친구 앞에서 외국에서 가져온 학용품이나 장난감을 자랑하는 태도는 삼가고 친구들에게 배우겠다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일선 교사들은 조언한다. 이들은 또 과밀학급의 교육환경 및 개인차가 무시되는 획일성과 교사의 매질 등 규율의 엄격성에 공통적으로 불만을 나타내며 심한 경우 등교를 거부하기까지 한다.

  귀국 자녀의 적응 문제가 이처럼 심각한데도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국가 차원의 연구과제라기보다는 특권층의 배부른 소리쯤으로 간주되어온 까닭이 크다. 실제로 귀국자녀의 과반수 이상이 강남과 강동 지역에 편중되어 있으며, 적응 기간으로 활용할 법한 방학 기간에 자녀들을 동반하고 해외 여행을 떠나는 현상 등에서 이들이 특권층이라는 인식은 좀더 확연해진다. 또 힘겨운 적응 훈련을 통해 고국을 찾아주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손쉽게 외국인학교 입학을 결정짓는 ‘삐딱한’ 교육관을 가진 부모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수층에 대한 반감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는 이같은 풍조 때문에 애꿎게 귀국자녀들이 희생되고 있음을 간과하기 쉽다. 설상가상으로 “영어를 잘하니까 얼마나 좋은가”하는 주위의 시선은 이들이 안고 있는 열등감이나 소외감을 희석시키기 십상이다. 영어 조기 교육을 시킨답시고 ‘진짜 외국인’을 찾아 용산 미국부대까지 아이들을 실어나르는 학부모들에게는 “영어를 우리말처럼” 구사하는 이들이 마냥 부럽기만 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부설 재외국민교육원은 교육부의 위임을 받아 89년 4월 서울 시내 초중고등학교에 재학중인 귀국자녀 7천3백여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1천5백34명이 국어능력·교과학습·생활에서 부적응 현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았다(도표 참조). 재외국민교육원에서는 부적응 요인이 있다고 판단되는 자녀들을 대상으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특별적응 과정교육을 무료로 실시, 올 여름까지 총 6백34명이 참가했다. 그러나 성적 향상보다는 적응교육 과정으로 짜여진 이 프로그램의 참여도는 의외로 낮다. 올해만 해도 2백여명의 수용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신청자는 국민학생 56명, 중학생 34명, 한국어반 13명 등 1백여명만이 참여하고 있다. 학부모들이 학교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레슨 과외 가정교사를 우선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동숭동까지 아이들을 실어날라야 하는 일 또한 학부모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낯선 상황에서 방어하지 못하는” 아이를 지하철·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혼자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완충교육 프로그램 미흡
  귀국 자녀의 적응을 돕는 또 하나의 완충 교육 프로그램으로 서울 YNCA 지구촌 클럽 활동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영어권에서 귀국한 국민학생 3학년부터 6학년까지 60여명이 참여하고 있는데 특정교재 없이 교사와 영어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훈련을 통해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동안 귀국자녀의 부적응 요인은 무엇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모형은 무엇인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재외국민교육원을 중심으로 부분적인 연구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은 일선 학교 교사들에게 맡겨져 있는 실정이다. 재외국민교육원의 이임주 교무과장은 귀국자녀들을 따로 모아 지도하는 것보다 국내 어린이들 속에서 교육시키는 혼합영입방식이 적응에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업무량이 폭주하는 일선 교사가 귀국자녀 특별지도 책임을 전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서울 양전 국민학교 2학년 담임인 심재규 교사는 귀국자녀를 특별지도하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귀국자녀를 따로 개별접촉하여 특별 지도할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한 학급당 평균 60여명을 지도해야 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전체 아이에게도 고루 손길이 못미치는 실정. 이같은 교육 현실에서는 귀국 자녀 특별지도가 “기껏해야 일기쓰기 받아쓰기 읽기 등에서 한번쯤 더 신경을 쓰는”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국가에서는 해외인력 송출 및 외화 수입 증감에는 민감해도 진출인력에 동반한 자녀들의 교육 문제는 각 가정에 떠맡기고 있었던 셈이다. 최근 92학년도부터 서울사범대학 부속국민학교에 특별학급 개설 등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일단 바람직한 현상이다. 귀국자녀를 위한 특별학급 운영이 특수층에게 주는 또 하나의 혜택으로 인식돼 위화감을 초래해서는 안되겠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낯선 교육 환경에 내던져져 좌절감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은 더 큰 국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초보 단계에 있는 귀국자녀의 적응 교육체제 확립은 장차 국제 사회와 호흡하는 국가 발전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자녀 교육 때문에 해외근무를 꺼리는 현상이 각계에 이미 만연해 있지 않은가. “아예 가서 살라면 모를까 두 번 다시 이 고역을 치르지는 못하겠다”는 것이 귀국자녀를 둔 학부모의 공통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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