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흉내내지 말라”
  • 채명석(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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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일 사망한 혼다자동차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면 ‘경영자의 귀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남을 흉내내지 말고 관청에 기대지 말라. 그리고 세계를 지향하라.” 독특한 ‘혼다 주의’로 그는 도쿄 남쪽 하마마쓰 마을의 한 작은 공장을 불과 십수년 만에 ‘세계의 혼다’로 키워냈다. 그가 사망한 후 일본 언론들이 그에게 바친 추도사만 보아도 그의 팔십넷 평생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후 경영자 중 최후의 영웅이 사라졌다’. <일본경제신문>은 이러한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재작년 4월에 사망한 ‘경영의 귀재’ 마쓰시타 고노스케에 뒤이은 그의 죽음으로 일본의 전후 경영사 속에 이제 ‘큰 별들의 시대’는 막을 내린 거나 다름없다.”

  반듯한 양복보다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즐겨 입던 국졸의 서민적 경영자, 혈육보다 회사 안의 젊은 인재를 후계자로 고른 無慾의 경영자, 기술자 정신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거슬러 보면 일본 언론의 평가에 지나침이 없는 것 같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자동차를 처음 본 혼다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업인 대장간 일을 팽개치고 도쿄의 자동차공장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6년간의 수련 끝에 1급 정비공이 된 그가 고향 근처의 하마마쓰에 분가한 것은 22세 때. 그의 재능은 이때부터 활개를 폈다. 그가 발명한 피스톤 링이 일본을 석권하면서 혼다의 기술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독창적 기술개발로 세계 석권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자 그는 자동차정비회사를 도요타자동차에 팔아넘기고 그 돈으로 46년에 혼다기술연구소를 차렸다.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디어로 세계 제일이 되기를 꿈꿔가며 기술개발에 미친 나머지 2~3일 동안 잠을 잃는 날들이 계속됐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바로 자전거에 보조엔진을 붙인 모터바이크였다.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자 본격적으로 모터사이클 생산에 뛰어들어 창업 13년만에 혼다오토바이는 세계 오토바이 경주장을 휩쓸었다. “남을 흉내내지 말라”는 평소의 신념이 그러한 대성공으로 이어진 것이다.

  혼다가 63년 경트럭과 소형 스포츠카를 생산했을 때 통산성은 도요타나 닛산과의 합병을 종용했다. 미국차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혼다자동차의 규모로는 어림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혼다는 통산성의 열화 같은 성화를 독창적인 기술개발로 물리쳤다. 70년대초 미국이 배기가스 규제법(머스키 법)을 제정하자 혼다는 일본차 중에서 제일 먼저 CVCC 저공해엔진으로 이 기준을 통과해 통산성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교통체증 유발 우려 “장례식 생략하라”
  혼다의 족적이 여기서 멈췄다면 일본에서는 흔해빠진 ‘기술자 출신 경영자’쯤으로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지난 73년 66세에 돌연 사장직을 내놓았다. 자동차엔진 냉각방식을 둘러싼 사내 기술논쟁에서 젊은이들에게 밀릴 정도로 자신의 머리가 퇴화됐다는 것이 그의 사임변이었다.

  그리고 후계자로는 45세의 회사내 기술자를 지명했다. “회사를 일가의 사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평소 그의 지론에 따라 혼다는 기술에 미친 자신을 대신해 회사경영을 맡아온 후지사와 다케오와 함께 자식들을 절대로 회사에 넣지 않는다는 굳은 약속을 맺고 똑같은 날짜에 미련없이 회사를 떠났다.

  회장이나 명예회장이라는 직함마저 거부한 그에게 후진들은 ‘창업자 최고고문’이라는 낯선 직함을 작명해주었다. 그러나 은퇴 후 재계활동과 사회사업에 전념한 그는 회사에 얼굴 내밀기를 꺼렸다. 후임 사장 취임파티에도 젊은 사장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이유로 일부러 참석하지 않았고, 만년에는 본사의 최고고문실을 자진해서 폐쇄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개발은 99% 이상의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기술자로서의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고, 최대의 여한은 “자기 이름을 회사에 붙인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또 스즈키라는 도시가 혼다시로 이름을 바꾸겠다고 제의하자 “사기업 이름을 도시에 붙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죽어서도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싫어해 “장례식을 절대로 치르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화장한 재를 뿌려달라”는 말을 남겼다. 자동차, 그리고 오토바이와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거창한 장례식으로 교통통제와 체증을 유발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무역적자 확대, 재벌의 기업집중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경제현실에 비추어 혼다의 발자취는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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