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맞는 일본 “6년전 수법 재현”
  • 도쿄·채명석통신원 ()
  • 승인 199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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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 극우세력의 잇딴 망언에 분노

지난 5월14일 아침, 〈산케이신문〉조간을 펼쳐든 대부분의 제일교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신문의 ‘正論’이라는 기고란에 어처구니없는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이름깨나 알려진 논객인 上智大의 와타나베(渡部昇一)교수가 기고한 그 글은 재일교포 및 한국에 대한 모멸찬 비난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궤변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재일한국인은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다고 주장하는데 이미 그 이전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건너와 살고 있었다. 관동대지진 때 대량 학살이 일어났던 것은 그것을 증명한다. 언젠가 오사카(大阪)의 경찰관계자가 ‘재일한국인은 일본이 싫으면 돌아가면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대다수의 일본인의 본심이고 또 국제적으로도 통용될 수 있는 正論이다. 히로히토(裕仁)국왕의 유감발언으로 사죄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한국측이 이 점을 계속 물고 늘어지면 한일합방은 일본만이 독자적인 의사가 아니라 열강간의 완전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서울올림픽 때 해방 및 6·25전쟁의 은인인 미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태도를 보면 일본은 한국과 우호관계를 갖되 거리를 둬야 한다.”

 비록 〈산케이신문〉이 일본언론을 대표할 정도의 권위있는 신문이 아니라는 점, 필자가 극우성향을 지닌 유사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글을 읽은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은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해 온종일 큰 고역을 치렀다고 한다. 이같이 반론의 여지조차 없는 ‘억지논리’가 ‘正論’으로 둔갑, 일간지를 장식하고 있는 일본의 요즘 분위기는 日王 사죄문제에 관한 완강한 일본측 태도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련도 폴란드에 카틴숲 학살 사죄했다”

 같은 날 오후, 이번에는 자민당의 한 지도급 인사가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경제면 등에) 협력하고 있다. 이 이상 더 무릎을 끓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우리의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이런 극우세력과 자민당내 수구세력의 견제와 압력이 盧泰愚대통령 방일의 초점으로 부상한 日王 사죄문제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요인이라는 것이 이곳 주일대사관 관계자의 지적이다.

 “盧대통령의 방일은 양국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큰 의의가 있다”고 5월8일 나카야마 외상은 말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된다”는 바이츠제커 서독대통령의 85년 8월 의회연설처럼, 어떻게 과거역사에 대한 명백한 청산없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인가.

 민단중앙본부 국제국 河政男차장은 이렇게 본다. “지금 일본의 분위기는 84년 9월의 全대통령 방일 직전과 똑같다. 즉 日王은 국정 기능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라는 헌법조항을 방패로 삼아 구체적인 對韓사죄 요구를 완강히 거부하는 일본즉 자세는 6년전의 수법 그대로이다.” 그는 또 “일본이 북방영토 반환 등 전후문제 청산을 요구하고 있는 유일한 상대국인 소련도 지난 4월 폴란드에 대해 ‘카틴숲 학살’을 공식 사죄했다”고 지적하고, “일본만이 세계적인 전후문제 청산 조류를 외면하고 있는 국제적인 고아”라며 일본측의 솔직하고도 명백한 對韓사죄를 촉구했다.

 지난 84년 히로히토 日王의 “불행한 과거에 대한 유감 표명” 이래, 일본측은 오히려 미래지향과는 거리가 먼 과거회귀성향을 보여 온 것이 사실이다. 나카소네(中會根康弘)전 총리는 85년 8월15일 1급 전법들이 안치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전후 총리로서는 최초로 공식 참배, 우리나라와 중국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86년 9월에는 “한일합방은 한국측에도 책임의 일부가 있다”는 후지오(藤尾正行) 문부상의 망언이 튀어나왔고, 88년 5월에는 “일본의 대륙진출에는 침략의도가 없었다”는 오쿠노(奧野誠亮) 국토청장관의 망언이 의도적으로 행해졌다. 또 문부성은 금년 4월부터는 학교행사에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의무화, 일본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런 의도적 對韓 망언이나, 일본국내에서 과거회귀성향이 지속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으로는 일본이 패망한 후, 자체내 전후문제 청산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전후 서독이 나치협력자를 공직에서 철저하게 배제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경우는 1946년 美점령군사령부의 ‘공직추방령’에 의해 전쟁협력자를 일시적으로 배제한 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미·소간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그것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것이 전후 이스라엘에 대한 사죄를 거듭하고 피 점령국이었던 오스트리아 국민에게도 국적 선택권을 부여한 서독과 전후 45년이 지난 지금도 아시아제국과의 전후청산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차이점이다.

 일본이 지리적으로 ‘영원한 이웃’ 한국에게 ‘참된 이웃’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면 盧대통령 방일에 있어서 양국 사이의 최대쟁점이 되고 있는 對韓 사죄문제에 한층 전진적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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