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잔재 청산 없이 韓日관계 발전 어렵다
  • (한국방송통신대학 조교수·국제법) ()
  • 승인 199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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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은 피해자 국적 불문 다양한 보상책 마련

취임 첫해부터 거론되던 盧泰愚대통령의 일본방문이 2년여의 지연 끝에 실현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의에 대해 회의적 시선을 보내는 이가 적지 않다. 유럽대륙의 숙적 독일과 프랑스의 정상이 1년에도 몇차례씩 회동하여 새로운 유럽질서를 논의하는 이 개방시대에 처음도 아닌 한국대통령의 방일에는 전제조건도 많고 반대도 많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양국이 식민통치의 가해자와 피해자였다는 과거 역사 자체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가 외견상 종료된 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청산되지 않은 遺産이 아직도 우리 주변에 엄존하고 있으며, 그 상처의 치유에 舊가해자가 아직도 소극적이라는 사실에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4반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미 양국은 상호 포기할 수 없는 교역상대로 발전했으며 양국 국민은 서로에 대한 최대 방문집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상징적 의미를 지닌 과거사에 대한 사죄발언의 주체와 그 내용에 대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또다시 민감한 반응이 일어난 것은 한·일관계의 현주소가 아직도 성숙된 동반관계에는 이르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물론 한·일간의 과거청산 문제는 65년 국교정상화에 즈음하여 체결된 기본관계조약 등 5개 조약을 통해 표면상 정리된 바 있다. 그러나 식민지배관계의 법적 청산을 목표로 하였던 조약들의 해석이나 실천에 있어서 양국은 그간 상당한 견해차를 노정시켜 왔다. 이에 대하여는 좀더 명확한 의사를 협정속에 반영시키지 못한 우리의 책임 역시 지적을 면할 수 없기도 하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청산의 책임자가 의무를 교묘히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추궁되어야 한다.

 최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제일교포 법적지위문제만 보아도 전후 일본은 이를 책임자의 입장에서 근원적인 해결을 꾀하기 보다는 회피적이고 對症的인 자세로만 시종하여 왔다. 재일교포라는 존재는 식민지배 자체에서 연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와 더불어 일방적으로 그들을 외국인이라고 단정하고 갖가지 통제책을 폈다.

 65년 법적지위협정 역시 처우개선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여서 현재 재협의중임은 익히 알려져 있다. 동일한 역사적 경위를 갖고 있는 그들의 거주자격도 협정영주자, 일반 및 특별영주자, 특정재류자, 특별재류자, 法126호者 등 갈래갈래 구분되어 있다. 똑같이 일본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한 가족내에서도 가족끼리 법적지위가 서로 다른가 하면, 先代보다 일본에서의 정착성이 더욱 강한 後代의 법적 지위가 더 불안정한 경우도 있다.

 일본은 자국이 세계 유일의 원폭피해자임을 내세우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자의 약 1할이 韓人이었다는 사실에는 침묵하고 있으며, 피폭을 기념하기 위하여 히로시마 시내에 조성된 평화공원에는 한인위령비 조차 세워놓지 않고 있다. 귀국한 在韓피폭자는 관심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채 그들에 대한 보상문제는 청구권협정의 그늘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면책 근거 될 수 없어
 거의 전원이 징용노동자였던 在사할린 韓人은 종전후 일본에 의하여 귀환이 거부된 채 40년이 넘도록 가족상봉조차 봉쇄되어 왔다. 근래 일부 귀환이 가능해진 사람들에 대하여 일본은 용돈조의 위로금만을 지급하며, 법적으로는 더이상 책임질 것이 없다는 태도이다. 또한 日帝에 의해 전쟁터로 끌려나갔던 군인·군속에 대한 원호보상도 한국인이란 이유로 외면하고 있다.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여러 요구에 대하여 일본은 항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와 더불어 그들은 더이상 일본인이 아니며 보상 문제는 65년의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마무리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모든 권리, 權原,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샌프란시스코조약 제2조1항의 취지를 얼마나 겸허하게 수용하여 왔는가?

 본래 샌프란시스코조약은 전승국이 패전일본의 책임을 추궁하는 강화조약으로서, 침략에 의한 일본의 영토적 취득을 淸·日전쟁 이전상태로 원상회복시킨다는 것을 근본 의도로 하였다. 즉 이는 日帝의 과오를 시정시키려는 조항이었지, 과거에 대한 책임해제의 근거로 해석될 수 있는 조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교묘히 면책의 방편으로만 활용하여왔다. 또한 65년 청구권협정을 보더라도 당시 양국은 원칙적으로 自國 거주자의 권리관계만을 해결시키기로 합의하였지, 일본이나 사할린 거주자의 권리까지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사할린 韓人이나 재일한국인의 전쟁보상요구는 앞으로 추궁되어야 할 문제이다.

 한·일 양국이 태평양시대의 주요 동반자로서 협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미결의 과거사가 우선 정리되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식민관계의 법적 청산은 아직도 우리에게는 未完의 외교현안이다. 사과의 말한마디조차 인색한 일본의 태도는 전후 독일이 나치의 과오에 대하여 피해자의 국적을 막론하고 갖가지 보상책을 마련하는 한편, 전쟁 당시 강제노동력을 사용하였던 私기업에까지 보상금을 지불하는 자세와는 큰 차이가 있다. 전후 일본이 전범 재판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통하여 과거 침략주의에 대한 사면을 국제사회로부터 받았던 양 자처한다면, 일제침략정책의 최대 희생자는 35년간 被식민의 辛苦를 겪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호도하는 셈이다.

 오늘날 일본이 자신의 경제력에 걸맞는 국제적 위상을 정립하려 한다면, 우선 인접 이웃의 상처를 치유할 책임에 보다 철저하여야 한다. 북방 4개 도서 문제가 일·소관계 증진에 걸림돌이듯이, 식민관계 잔재의 청산 여부는 한·일관계 발전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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