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정당 지지확산 낙관한다”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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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聯推 공동대표 李佑宰씨/만원 지하철 타고 출근, ‘깨끗한 돈’마련 위해 분주

재야신당을 추진하는 민중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이하 民聯推)의 움직임이 부쩍 바빠지고 있다. 올 4월 ‘진보정당 추진을 위한 준비모임’에서 확대 개편된 民聯推는 지난 5월12일 장충단 공원에서 첫 대중집회인 시국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국민대중들과 첫 상견례를 치렀다. 그런가 하면 재야세력의 한시적 공동투쟁체인 ‘국민연합’에 참여해 “노태우 정권 퇴진과 민자당 해체”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렇듯 民聯推가 내부 정비기를 거쳐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李佑宰(54) 공동대표의 이름도 신문지상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신당의 ‘얼굴마담’격인 그는 같은 공동대표인 白基琓씨나 高永?변호사는 물론, 치열한 투사 경력으로 매스컴을 장식해온 張琪杓 조직국장이나 李富榮 집행위원장에 견주어 대중들에겐 생소한 인물이다. ‘이우재’는 누구인가. 그의 24시를 추적해본다. 이우재 개인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이우재를 통해 民聯推라는 숲을 스케치하기 위해서이다.

수의사·대학강사 거쳐 농민운동가로
 그는 농민운동권에서는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농민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예산농고 시절부터 농민운동에 뜻을 두고 서울대 수의학과와 건국대 농업경제학과 대학원과정을 거쳐 수의사, 대학강사, 연구소장, 기독교단체 실무자, 농촌교육가, 강연연사 등 여러 직업을 편력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농촌사회 실무간사로 일하던 79년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사건’으로 좌경세력으로 몰려 옹골차게 3년4개월의 刑을 살기도 했다. 그러나 ‘농촌과 농민’ 문제는 그의 일관된 의식의 기저를 이룬다. 단 하루도 그 일관된 영역을 일탈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정당대표라는 자신의 직함이 왠지 거북하고 쑥스럽기만 하다. 또 꼭두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정당생활에 익숙해지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그의 하루 일과는 6시쯤 일어나 전날의 뉴스를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8시에 독산동 집을 나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서교동에 자리잡은 당사로 출근한다. 가장 붐비는 시간에 지하철 객차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씨름하다 보면 때로는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지각은 엄두도 못낸다.

 ‘호인’이라는 평과 함께 ‘대표로선 너무 무르다’는 평을 함께 듣는 그가 ‘진보정당’ 대표 시절부터 보기 드물게 고집을 부린 일이 ‘출근 정확히 지키기’이기 때문이다. “야당은 밤8시 이후 다들 술 마시러 나가 사람을 찾을 수 없고, 운동권은 늦잠 자느라 오전에 얼굴도 볼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아침에 굼뜬 게 운동권의 생리, 재야신당도 그 대부분이 운동권 출신이어서 이런 악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는 이런 습성을 고치지 않고서는 거대한 제도정당에 맞서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이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며 ‘9시 출근’을 관철시켰다.

 그래서 民聯推 식구들은 9시면 어김없이 모여 그날의 일정과 역할 분담을 논의하는 ‘전체조회’를 한다. 저멀리 부평에서, 안산에서, 화곡동에서, 혹은 능곡에서 대중교통수단에 시달리며 출근한 이들 80여명은 회계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민중정당 건설에 뜻을 같이한 무보수 실무자들이다. 능력과 헌신의 결의를 갖춘 무보수 실무자들이 가난한 정당의 살림에 큰 보탬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명색이 당인 만큼 운동권 시절과 달라 돈이 들어갈 데가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사무실 임대료만도 월1백20만원. 거기다 당 운영에 드는 경상비용을 합치면 월1천5백만원이 필요하다.

“정부대책은 아무래도 미봉책 같다”
 그러나 民聯推는 여느 정당들처럼 몇몇 보스만이 일부 재벌과 소수의 기득권층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돈줄을 장악하는 구태를 탈피해야 한다고 일찌감치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래서 정당운영자금을 정당원의 헌납과 후원자들의 헌금을 통해 공개적으로 조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우재대표에게 분담된 액수는 매월 자기분담금 20만원과 후원회비 60만원.

 생계수단이 막연한 다른 당원들과는 달리 그는 부인(김주숙 한신대교수)이 네자녀의 교육비는 물론 생활을 도맡아 책임지기 때문에 생활걱정은 덜할 편이다. 하지만 당에서 할당받은 분담금과 후원회비를 충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조회 뒤 하루의 대부분을 ‘민연추’ 내의 각종 회의나 대외행사에 참여하는 일과 사람들을 만나 당의 성격과 지향점에 대한 이해를 끌어내고 돈을 ‘얻어내는’ 일에 소비한다.

 요즘 그에겐 분담금 말고도 돈을 둘러싼 걱정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궁색한 정당이지만 명색이 대표인지라 당에서는 그에게 비서격인 보좌역 한사람을 붙여주었다. 연세대를 나온 그 보좌역은 낮에는 민연추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월부로 산 구형 스텔라 중고차를 끌고 나가 강남의 술취한 손님들을 모시는 속칭 ‘나가시’일로 생활비와 활동비를 해결한다. 요즈음 이우재씨는 보좌역의 극성스런 권유로 가끔씩 차를 얻어타는 호강을 한다. 그래서 보좌역의 차 월부금 4만3천원을 대신 갚아주는게 ‘도리’가 아닐까 싶어 자못 걱정스럽다.

 그는 최근 재벌의 부동산 투기와 공직자 및 정치인에 대한 정부의 일련의 조치를 ‘미봉책’이라고 본다. 재벌의 땅투기를 막을 수 있는 항시적이고 근본적인 조치를 제쳐두고 그 많은 비업무용 땅 가운데 쓸모없거나 처치곤란한 일부만을 내놓게 하고 다시 국민의 세금으로 사들이는 것은 아무래도 속임수 같다는 것이다. 또 정치인의 부정한 재산형성을 막으려면 매번 서너명의 정치인를 속죄양으로 삼을게 아니라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제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권통합에 대해선 신중론 펴
 아직도 그를 아끼는 농민들은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 때문에 그의 정당 참여를 못마땅해하거나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 농민들의 정치세력화가 일평생 소원이었기에 “이런저런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재야 신당에 참여했다. 이제까지는 노동자, 농민세력들이 정치적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보수야당에 그 역할을 위임해왔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들에게 기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보수야당의 속성이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들의 편에 확실히 설 수도 없거니와 이제는 민민운동세력들이 정치세력화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재야신당은 보수야당과 그 성격을 엄연히 달리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는 최근 범야권의 뜨거운 관심사인 ‘야권통합’에 대해서도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물론 그 역시 거대여당이 새로이 출범한 만큼 범야권도 대동단결과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는데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에 기반을 둔 민중 정당으로서의 성격과 대의를 분명하게 지키면서 창당을 한 뒤 연합이든 통합이든 거론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러나 운동권 일각에서는 재야정당화 세력들이 처음 참여한 13대 국회의원 선거와 영등포을구 선거의 저조한 결과를 놓고, 아직은 진보대중정당이 뿌리내리기엔 시기상조라는 비판론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하지만 이우재씨는 그 결과를 놓고 성급한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모든 정치여론조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7~8%의 진보적 성향의 표에서 출발해서 시간이 흐르면 좀더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장기적인 낙관론을 갖고 있다.

 그는 그 역사적 실례로 독일의 社民黨이 5%의 미미한 지지에서 출발해서 지금과 같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경위를 예로 든다. ‘정치를 바꿔 놓는 새로운 정치’가 하루 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그의 느긋한 태도는 사생활에서도 엿보인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목공일. 집안한구석을 차지한 찌그러진 밥상도, 울퉁불퉁한 책상도 모두 그가 만든 수제품이다. 그런데 그의 취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던 아내와 자녀들을 기겁하게 만든 것이 다락방 계단 만들기였다. 20만원의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시작된 이 공사는 그의 진두지휘 아래 온 집안 식구들이 일요일마다 동원된 끝에 무려 6개월이나 끌었다. 겨우 만들어 놓으면 각도가 틀리고, 또 만들어놓으면 못이 빠지고 하는 우여곡절 끝에, 약간 가파르긴 하지만 결국 계단을 완성해냈다.

 이처럼 낙관적인 그도 당황할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은 현상황에선 진보정당의 출현이 민주세력의 분열을 낳고 정국을 保革구도로 끌고가려는 정권의 들러리를 서주는 결과를 낳지 않겠느냐는 ‘현실적’인 지적과 부딪힐 때다. 그러나 그는 현 정권의 의도가 무엇이든 주어진 여건을 탄력적으로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합법적인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당한 요구와 올바른 세력을 항상 비합법의 좁은 공간에 처박아 두려는 것은 30년간의 군사독재 기간 동안의 암울한 경험에서 비롯된 ‘운동권의 비관주의’라는 것이다.

 지자제실시前 6월 창당이라는 ‘진보정당’시절의 마스터플랜은 民聯推로의 개편으로 다소 행보가 늦어졌다. 그러나 民聯推는 빠른 시일내에 조직책을 선정하는 등 정당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다.

 民聯推가 ‘느긋한 목수’ 李佑宰씨의 낙관대로 과연 이 나라 정당사를 바꿔놓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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