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흔들릴 때마다 단행된 ‘숙정’
  • 김재태 기자 ()
  • 승인 199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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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正은 傳家의 寶刀인가. 3공화국에서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권은 통치권의 수위조절이 필요하거나 국가적 대사에 직면할 때마다 이 칼을 휘둘러왔다. 칼을 빼드는 명분은 항상 ‘공직사회의 기강확립을 위해서’였으며 ‘정권안보를 위한 조치’임을 공공연히 밝히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정부의 이번 사정작업도, 통치권 차원에서 행사되고 ‘투망식’ ‘할당식’ 비리조사를 배제한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상이한 양상을 띨 것으로 예상되긴 하지만 그 내용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가 지난 15일 사정장관회의를 통해 확정한 공직자 부조리 중점단속 대상항목은 대부분은 그동안 사정조치가 있을 때마다 제기됐던 사항들이다.

 청와대에 대통령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처음 설치된 것은 지난 71년 7월 故 朴正熙 대통령이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이다. 이때 기존의 민원비서실과 정보비서실을 통합, 현재와 같은 민정수석보좌관실을 신설하고 통치 차원의 사정활동 발판을 마련했다.

 朴전대통령은 72년 10월 유신 이후 긴급초치 발동 등으로 계속 강압정치를 펴면서 ‘서정쇄신’의 명목으로 대대적인 숙정을 단행했다. 74년 2월 차관급 3명을 포함, 공무원, 국영기업체 임직원 등 6백27명을 숙정한 데 이어 75년 3월부터는 청와대사정보좌관실 지휘로 서정쇄신 방관자 및 감독자, 청탁·부정, 무사안일, 호화주택 소지자 등 공직부정 12개항을 설정하고 본격적인 공직자 부조리 척결작업에 들어가 77년까지 2년간 6만여명의 공무원을 적발, 징계했다.

 당시 사회에선 민주회복국민회의 등을 중심으로 한 재야의 유신헌법 반대, 개헌서명운동이 계속되는 등 반체제활동이 잇따랐다. 또한 70년대 중반 세인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던 소위 ‘민청학련사건(74.4)’ ‘인혁당사건(74.5)’과 동아·조선일보 기자 해직사태를 둘러싼 언론수호운동도 이 무렵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박정권은 이후 78년에 7천4백77명, 79년에 7천3백49을 징계하는 등 숙정정치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공직자 사정의 가장 큰 회오리는 비상계엄하에서 이른바 신군부의 집권음모가 가시화되던 80년 7월에 몰아쳤다. 6월6일 내무부가 직무태만공무원 21명을 자체 적발한 것을 시발로 7월9일 고위직 공무원 2백32명, 7월15일 3급이하직 4천7백60명이 하루아침에 공직을 떠났다. 건국 이래 최대규모의 희생자를 낳은 이 숙정선풍은 사회 전반에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시켰다.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사회정화분과위(위원장 金滿基 중앙정보부 감찰실장)는 숙정작업을 주도하면서 대외적으로 “국민들 사이에 만연된 불신풍조는 권력형 부조리와 공직을 이용한 축재의 장본인들이 국가지도층에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으나 기업인은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정치적 의도가 배후에 깔려 있음을 드러냈다.

 이같은 미증유의 숙정바람은 공직자 대량해직에 그치지 않고 11월에 정치인 8백11명의 정치활동규제조치로 이어지면서 제5공화국 출범 정지작업의 예정된 순서를 밟았다. 제5공화국 들어서도 사정의 회오리는 끊이지 않아 학원안정법 제정을 놓고 대학가의 시위가 계속되던 85년 9월 공직자기강 쇄신운동,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비난여론이 비등하던 86년 7월 공무원 기강확립지시, 87년 6·10항쟁과 건국대 점거농성 대학생 무더기 구속사태에 뒤이은 12월 “국가안보·사회안정 차원”의 공무원비리조사 등으로 나타났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88년 서울올림픽개최를 전후하여 “제5공비리 관련, 부정부태 공직자 내사” 발표, 학원소요·노사분규로 들끓던 89년 1월의 공직자 기강점검 암행감사 10개반 편성 등이 나왔다. 이어 부산 동의대사건, 서울교대 휴교령 등으로 소란했던 89년 5월에는 고위공직자 암행점검이 있었고 전교조 결성, 임수경양 방북사건, 서경원의원 구속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공안정국상황에서 89년 9월 청와대 사정팀에 의한 고위공직자 1백여명 정밀내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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