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 할말 다한 시장사람들
  • 김당 기자 ()
  • 승인 199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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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없는 방문 맞아 물가·전세값 인상 등 생활苦 ‘따지듯이’ 토로

자연스런 현장 확인에 호감 … 격려금 받아 기념수건 돌리기도

 최근 盧泰愚대통령이 시장 나들이에 나선 것과 그가 시장에서 겪은 ‘사건’이 화제에 오르고 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장바구니 물가를 직접 체감하려고 나선 것이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노대통령의 시장나들이가 유난히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받은 까닭은, 예와 달리 그날의 거동이 불시에 그것도 거의 꾸밈없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짜여진 각본대로의 전시행정이나 ‘쇼’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5월11일 오후 4시쯤 盧대통령이 탄 승용차가 通仁시장(서울 종로구 통인동) 입구에 멎었다. 흰 점퍼 차림을 한 대통령을 맨처음 맞이한 사람은 임시 시장대표 李憲九씨(54·경기쌀집주인)였다. 전국양곡상연합회 종로지부장이자 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인 이씨가 대통령이 시장에 들를 것이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불과 40분 전이었다. 이씨는 구청장에게서 전화로 “각하가 들르시니 시장대표 자격으로 안내하되 같은 업종이 중복되지 않게 고루 모셔라”하는 전갈을 받았었다. 맨먼저 대통령은 시장 입구의 과일전 효자상회(주인 김종예·62)에 들러 “외국산 과일이 있느냐? 수박, 참외값은 얼마냐?”고 물었고 김씨는 “수박은 7천~8천원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한 부인이 “부동산값이 너무 올랐어요” 하고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고 대통령은 “부동산에 대해서는 이미 선전포고를 했으니 반드시 잡겠다”고 설득했다.

 이어 채소가게로 간 대통령이 주인 전수영(43)씨에게 요즘 채소값과 비닐하우스산인지 자연산인지를 묻자 전씨는 “아직은 90%가 비닐온상에서 나온 것이고 값도 조금 비싸지만 야채값은 물가와 별 관련이 없고 기후나 일기에 영향이 많다”고 대답했고 대통은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고 되받았다. (야채가게 주인은 그후 기자가 취재하는 도중에 가정부인들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했는데 그 내용인즉, 2천원씩 받던 통배추와 1천원씩 받던 얼갈이배추 한단값을 왜 대통령 앞에선 값을 내려 말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전씨는 그런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는데 야채금은 오전 오후가 틀릴 만큼 변화가 무쌍하다는 논리였다) 그때 길에 모인 주부들이 “공무원 가족인데 물가가 올라 생활비가 과거보다 두배 이상 든다”느니 “돈 만원 가지고는 김치 담그기도 어렵다”느니 하면서 물가고를 잡아줄 것을 호소하는 바람에 대통령은 곤혹스러워하는 듯했다.

“전세금 꿔달라” 떼썼다가 곤욕
 그런데 예상 밖으로 더 곤혹스런 ‘사건’이 엉뚱하게 터졌다. 한 젊은 여자가 대통령에게 다가가 “전세값이 너무 올라 큰일이다”고 말하자 대통령은 “얼마에 사느냐”고 물었고 그 여자가 “방 2개에 1천만원인데 가을에 2백만원 올려달라고 한다”며 “전세값은 자꾸 올라가지요, 어린애는 커가지요, 우리 같은 서민들은 어떻게 사느냐”면서 느닷없이 “전세보증금 3천만원만 빌려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대통령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여자는 상가 지하 영남떡집 주인인 이승수(63)씨의 딸 김상온(35)씨인데 김씨는 그 한마디로 여간 곤욕을 치른 게 아니었다. 시장상인들은 “가정으로 치면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대통령께 방자하게 그럴 수가 있느냐” “1~2백도 아니고 어떻게 3천만원을 빌려달라고 할 수가 있느냐”면서 이구동성으로 김씨의 ‘당돌한’ 행동을 나무랐다. 게다가 김씨는 세들어 사는 주인집에서도 궁지에 몰렸다. 그날밤에 파출소에서 와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후환’을 두려워한 집주인은 집주인대로 김씨를 닥달했기 때문이다. 집주인의 걱정은 “보증금을 올려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 세금이라도 많이 나오면 어떡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어 대통령은 싸전 맞은 편 길바닥에 푸성귀를 놓고 파는 이흥옥할머니(82)에게 “고생이 많다”는 말을 하며 두릅 한접시 1천5백원어치를 비닐봉지에 담아 사갔다. 셈은 대통령이 직접 했는데 지갑에서 2천원을 꺼내 지불했다. 또 푸줏간에 들른 대통령에게 주인 정해청씨(35·성풍정육점)는 “수입쇠고기는 파는 데가 따로 있고 한우값은 7천5백원이다. 사람들은 조금 먹더라도 한우만 찾는다”고 대답했다.

 20분 동안 장바구니 물가를 체감한 대통령은 돌아가는 길에 시장입구에서 상인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대통령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셔’누구보다도 그날 일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이헌구씨는 “무엇보다도 전과 달리 사전 통지나 통제없이 자연스런 분위기 속에서 현장확인을 하고 간 점이 상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고 했다. 한편 비서관은 그날 격려금으로 1백만원을 내놓았다. 상인들은 그돈으로 ‘노태우대통령 통인시장 방문기념’이란 글귀를 새긴 수건(개당 4천5백원) 2백20장을 만들어 노점상까지 포함, 고루 나누어 가졌다.

 그날 대통령이 행차한 50m쯤 되는 시장길을 되짚어본 결과는 청와대쪽에서 보자면 ‘대성공’이었고 대통령을 맞은 시장사람들쪽에서도 ‘대만족’이었다.

 5월12일자 조석간 신문들은 대개 1면 톱기사로 특명사정반관련 기사를 싣는 한편, 가십란에서는 대통령의 동정을 다루었다. 텔레비전 9시뉴스에서도 소상하게 다뤘음은 물론이다. 비교적 대통령의 동정을 사진과 함께 소상하게 보도하는〈ㅈ일보〉그날치를 살표보면, 1면에서는 ‘대통령 特命司正班 설치 청와대 투기-공직자 비리 전담조사’라는 제목기사를 크게 실어 별명과 달리 ‘물’이 아님을 부각시킨 반면, 2면에는 노대통령이 시장에서 두릅 한봉지를 사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물가동향을 살피고 있다”는 사진설명을 싣고 4면에는 ‘노대통령, 市場서 物價항의 진땀’이라는 제목의 가십기사를 실어 ‘여전히 물’임을 대비시켜 보여주었다.

‘이미지 정치’ 위한 민정시찰
 요컨대 재벌기업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 점잖게, 그리고 아무 탈없이 그동안 사들인 땅을 내놓게 하고 특명으로 사정반을 띄워 고위공직자들을 잡도리하여 서릿발 이미지를 보여주는가 하면 시장에서 떼를 쓰는 보통사람들에게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그래서 예전의 청와대 주인들과는 뭔가 다른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 언론전문학자들의 주장이다.《대통령과 여론조작》이라는 저서를 낸 바 있는 강준만교수(전북대 신방과)는 이른바 이미지 정치의 천재로 레이건를 꼽으면서 “노대통령도 보통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애쓰는 점이 레이건과 닮았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레이건이 대통령 재임중에 해외작전 중 숨진 미군 병사들의 장례식에 꼭 참석하여 희생자들 가족과 뜨겁게 포옹하며 눈물을 비치는 일이 많았는데 이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사람들의 감동의 클수록, 알고 보면 대통령이 저지른 불필요한 도발적 군사행위에 대한 책임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이 강교수의 지적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닮았을까? 노대통령은 보도에서처럼 시장에서 진짜 진땀을 흘렸을까? 사람들의 기억만으로는 미덥잖아 텔레비전 화면으로 대통령의 표정과 동정을 꼼꼼히 취재해 그릴 요량으로 방송프로그램을 판매하는 정동 MBC 7층 사업국 프로그램판매부를 찾았다. 그러나 그쪽에서 하는 말은 “대통령 동정을 담은 프로그램은 일절 팔지 못하게 되어 있거니와 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녹화기가 널리 보급되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얼마든지 텔레비전에 나타난 대통령의 표정과 버릇까지 낱낱이 녹화해서 슬로우모션으로 ‘연구’할 수 있었을텐데 굳이 판매나 대여를 못하게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레이건과 닮은 점과 진땀이 사실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보통사람은 아님을 확인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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