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예순에 뜻세워 팔순에 결실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0.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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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장승 연구 집대성 《벅수와 장승》펴낸 金斗河옹

눈은 퉁방울눈, 코는 주먹코, 우는 아이 겁주는 찢어진 입매. 마을 어귀 우뚝 선 장승할배의 얼굴에는 모진 풍상에도 닳지 않은 익살끼와 투박함이 배어 있다. 무명의 손길에 깎이고 다듬어져 수백년 세월을 지켜온 그 장승들은 바로 우리네 조상들이 살았던 질박한 삶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孫晋泰의《長生考》이후 학계에서조차 도외시되어온 장승에 관한 연구를 집성해 화제가 되고 있는 金斗河(80)옹,《벅수와 장승》(집문당 펴냄 1천2백30면)은 그가 지난 20년간 전국의 산간벽촌을 누비며 열과 혼을 쏟아부은 노작이다. 2백자 원고지 5천매분량의 이 반대한 저서에는 전국 3백여곳에 널려 있는 8백여기의 현존 장승들에 관한 해설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고 7백여권의 한문서적을 섭렵해 발굴해낸 문헌자료 1백25개 항목이 정리돼 있다. 또 장승관련 지명 1천1백74개소도 일일이 소개되어 있다.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흔히 ‘장승’이라 불리는 것은 ‘장승’과 ‘벅수’로 구분된다. 장승이란 신라·고려 때 왕의 장수를 빌기 위해 승려들이 절 입구에 세웠던 長生碑에서 유래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官道 10리마다 세운 이정표인 路表장승을 의미한다.
 
장승과 벅수의 의미구분 있어야
 반면 벅수란 빈농들이 질병, 특히 두창을 창궐시키는 마마귀신을 쫓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어귀에 세운 일종의 수호신이다. 본디 法首라는 한자말이 음운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법수’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한양○리’처럼 이정표가 되는 말만 기록된 것이 장승이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주장군?당장군이나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 같은 이름을 몸통에 새긴 것은 벅수이다. 예컨대 판소리 <변강쇠전> 중에 게으름뱅이 강쇠가 장승을 뽑아다 장작으로 패어 쓰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때의 장승이 다름아닌 벅수라는 것이다.

 그는 이번 집필중 특히 일본 학계에 보고된바 있는 ‘蛾眉山下橋’라고 새겨진 벅수가 마마귀신을 쫓기 위해 세워진 ‘우리 것’임을 규명하는 데 가장 애를 먹었다고 한다. 丁若鏞의 《痲科會通》을 보면 고대 중국의 아미산에 살던 선녀가 마마를 다스리던 방법이 나온다. 金옹은 조선말기에 이르러 우리나라에도 마마의 전염을 막기위한 기복책으로 지명이 아미산으로 바뀐 예가 80여 군데나 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를 토대로 이 벅수가 당시 홍수로 떠내려간 ‘우리 것’임을 규명한 것이다. 그는 또 法首라는 말이 개국신화에 나오는 단군仙人의 이름임을《太白逸史》의 기술에서 찾아내기까지 오랫동안 고심했다고 털어놓는다.

 그가 ‘역마살 보따리’인 배낭 하나를 걸머지고 전국의 산야를 떠돌게 된 인연은 지난 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에서 ‘牛步會’라는 산악회를 만들어 문화재 탐사활동을 벌이던 시절 전남 영암군 쌍계사 옛절터에서 만난  한쌍의 돌장승은 그의 삶을 바꿔 놓았다.
 “움푹 패이고 모지라진 채 세월의 ‘바위옷’을 입은 그 얼굴…그것은 이미 ‘돌’이 아니라 어떤 ‘靈’으로서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주조장 경영과 유자망어업, 교원생활과 피혁사업, 극장·기원·다방경영 등 숱한 직업을 거치며 인생의 부침을 겪어온 그였기에 그날 돌장승의 모습에서 자신을 본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후 서울로 올라온 김옹은 독학으로 본격적인 장승연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민속학에 대한 연구가 국문학이나 역사학의 보조수단 정도에 머물고 있는 현실에서 오직 끈기 하나로 모든 어려움을 헤쳐온 것이다.

학계에서도 못한 일 독학으로 이뤄
 초기엔 털털거리는 시골버스에 올라 ‘약장수’노릇도 많이 했다. 승객들에게 장승 사진을 펼쳐들고 목청을 돋우다 보면 간혹 운좋게도 인근에 있는 장승을 귀띔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하산하다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겪기도 하고 마을의 수호신을 만졌다고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을 뻔한 일도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장서를 뒤지다가 늦은 밤 도서관에서 내쫓기기도 부지기수. 이렇게 “운동회날 눈 가리고 달려가 대막대로 양철통 때리듯” 시작한 연구가 처음 2~3년 예정에서 10년, 그리고 다시 20년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林東權교수(중앙대·국문학)는 “학계에서도 해내지 못한 일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최초의 본격 장승연구서로 집성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장승과 벅수의 어원이나 기원, 기충신앙적 의의 규명 부분에 대해서도 金斗河說을 인정해야 한다”고 높은 평가를 내린다.

 한동안 그 수가 줄어들며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장승이 근년 들어 부쩍 여기 저기서 눈길을 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그간 학술지나 대중지의 지면을 통해 꾸준히 장승을 알리는 데 앞장서온 한 사람으로서 그는 대단한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폭발적으로 부활되는 이때 우리 예술가들이 왜 장승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현대 예술가들의 예술혼이 담긴 멋진 장승을 보는 것이 간절한 소망입니다.”

 요즘 그는 《벅수와 장승》의 대중용 축약판을 구상하고 있다. 사진 중심으로 장승을 감상할 수 있도록 꾸며볼 계획이다. 책상설합에 가득찬 수천장의 독서카드를 내보이며 다음 집필의 포부를 펼치는 그의 얼굴엔 ‘팔순 청년’의 뜨거운 의욕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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