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 동포 뿌리내린 중국 속 ‘朝鮮’
  • 연변·박상기 차장 ()
  • 승인 1990.06.1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만여㎢의 연변자치주, 개방물결타고 自營商 크게 늘어

일송정 푸른 솔은/늙어늙어 갔어도/한줄기 海蘭江은/천년 두고 흐른다

  우리의 애창 가곡 ‘선구자’는 민족의 수난과 극복의 근대사를 함께 담은 노래다. 해란강은 백두산 자락이 흘러내린 和龍縣의 야산을 감아들다가 龍井市를 거쳐서 두만강으로 흘러드는 ‘북간도의 젖줄’이다. 이강가에 자리잡은 초가마을들, 울담장 너머로 환하게 핀 살구꽃·복숭아꽃, 논을 쟁기질하는 농부들, 빨래터에서 방망이를 두드리는 저고리·치마 차림의 아낙네들, 그리고 수줍고 어리무던 해보이는 그들의 표정과 말씨…. 우리 한국에선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 ‘고향의 봄’을 이곳에서 다시 보는 듯했다.

 ‘선구자’의 2절에 나오는 龍井泉(용드레 우물)은 우리의 북간도 流民史가 절절히 서린 곳이다. 용정시내 해란강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龍井地名起源之井泉’ 기념비에는 이샘을 “1879년부터 1880년간에 조선이민 장인식, 박인언이 발견하였다. 이민들은 우물가에다 용드레를 세웠는데 용정 지명은 여기서부터 나왔다”고 새겨져 있다.

  북간도 이민은 19세기 중엽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 淸朝는 封禁策, 조선은 越江罪로 엄히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구한말·일제강점으로 이어진 민족수난기를 거치면서 그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함경도·평안도 사람만이 아니라 강원·충청·경상·전라도의 流民들도 수천리길을 걸어 만주에 들어왔다. 1919년의 통계에 벌써 43만명에 이르고, 그들의 정착지도 지금의 길림성·흑룡강서·요녕성뿐 아니라 소련경내로 확대되어갔다. 하지만, 해란강가에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대촌락인 용정촌은 8·15 전까지 북간도 조선족의 교두보요 경제·교육·문화활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중심이 자치주의 수도인 延吉로 옮겨져 연길이 용정보다 훨씬 크고 활기찼다. 연길시의 총인구는 25만명, 그중 조선족이 14만만명.

  1952년 9월3일에 설정된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총면적은 4만2천7백㎢로 남한의 절반에 조금 못미치며, 총인구 1백97만명 중 80만명이 우리 교포인 조선족들이다. 주정부가 잇는 연길을 비롯, 용정·도문·훈춘·돈화의 5개시와 화룡·안도·왕청현 등으로 나뉘어 있다. 2백만명으로 추산되는 재중 조선족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사는 탓으로, 자치주는 어느 지역보다 우리 민족의 풍습·식생활·영농법·가옥구조 등을 잘 보존하고 있다. 또한 <연변일보>·연변인민방송국 조선말조·연변텔레비전방송국 조선말 프로그램·<연변소년보>·<연변문예> 등의 우리말 언론매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고, 종합대학인 연변대학과 연변농학원·의학원 등의 대학교육기관도 갖추고 있다.

  연변은 두만강·백두산을 경계로 북한과 맞닿아 있어 상호내왕이 빈번하다고 한다. 양국 관리들의 공적인 내왕 외에 친지방문·상품교역으로 민간인들도 어렵잖게 오고가는 듯했다. 연길에는 북한측이 투자해서 운영하는 ‘두만강호텔’이 있기도 하다. 특히 중국에 私營業과 사유재산이 부분적으로나마 인정된 뒤부터는 교포들의 상업활동이 왕성해져 교류가 더 빈번하다는 것이다. 연길시의 자유시장인 ‘西市場’은 중국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로 대부분의 상인들이 조선족이다. 1달러당 공식환율이 중국돈 4.59원인데, 서시장에서 조사한 상품가격은 다음과 같다. 쌀1㎏ 1.76원, 콩 1근(5백g)에 1.20원, 달걀 1개 0.40원, 쇠고기 1근 4.50원, 닭고기 1근 4.00원, 개고기 1근 2.80원, 북한산 북어 10마리 3.20원 등으로 식료품값은 비교적 헐하다. 그러나 어른 신사복 1벌 1백30원, 아이들용 색동옷 1벌 45원 등으로 의류품은 비싼 편이며, 카세트 녹음기·텔레비전·전자 주방용품 등은 너무 비싸 그들의 수입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한다(중국 노동자의 월급은 1백~2백원).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1시간쯤 달리면 도문시에 이른다. 1백~2백m폭의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함경북도 南陽市와 마주 대하고 있고, 강변의 ‘두만강 공원’은 도문시민들의 대표적 위락장소이다. 유람선 놀이·기념촬영 등을 즐기는 도문시민들에 비해 강건너 남양시쪽은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산중턱의 경사면에 흰 페인트칠을 한 돌로 쓴 ‘속도전’이란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어떠한 사람이나 배를 타는 기회를 빌어 조선측 인원들과 면담 또는 물품교역을 하거나 조선측을 향해 외치거나 물품을 던지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한면 ‘中朝邊境規定’에 따라 처벌한다는 ‘유람선승객준칙’이 한글과 중국어로 스여 있었다.

  자치주 어디를 가나 교포들은 부지런하고 아이들 교육에 지극하며, 한 동아리로 뭉쳐서 살고 있었다. 이웃의 관혼상제를 자신의 일로 여겨 함께 즐기고 같이 슬퍼하는 공동체 의식도 대단히 강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를 통틀어 수탈과 압제로 점철된 亡國流民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 형극의 세월조차도 朝鮮人의 얼과 心性을 앗아가지 못했음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