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天地는 雪原이었다
  • 박상기 차장 ()
  • 승인 1990.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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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특파원 백두산 등정기/하늘 찌를 듯한 16개 거봉에 둘러싸여 장관

 5월에도 백두산은 눈을 이고 있었다. 산중턱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 대바늘처럼 곧게 솟은 전나무숲도 발목을 백설에 묻은 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樹林帶가 끊기는 2천m 이상부터는 적설량이 눈에 띄게 불어났다. 허리까지 잠기는 눈길을 헤치고 마침내 山頂에 이르자 눈앞에 펼쳐진 天地, 꽁공 얼어붙은 ‘하늘의 연못’은 깊이 모를 눈에 덮힌 대설원이었다.

6월초나 돼야 천지가 녹기 시작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도인 廷吉에서 백두산까지 오는 도중에 安圖縣의 야산을 붉게 물들인 진달래꽃, ‘아시아 최대의 과수원’이라는 和龍縣의 배꽃 물결을 보며 ‘北間道의 봄’을 만끽한 눈으로 만년설로 뒤덮힌 듯한 천지를 대하니 정말 기가 질렸다. 말하자면 ‘북간도의 봄’은 사방으로 몇백리씩 뻗어내린 백두산의 밑자락에서부터 천지를 향해 느릿느릿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6월초가 되어야 산정에 다달아 천지의 얼음을 녹인다고 하니, 봄의 발걸음이 느려도 보통 느린게 아니다.

  중국땅에서 백두산에 오르는 등정로는 크게 둘로 나뉜다(그림 참조). 그 하나는 <가>지점에서 二道白河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는 길로 은배호(小天地)·유황온천·장백폭포를 거쳐 천지의 물이 흘러내리는 ‘승차하’에 오르는 길이다. 겨울엔 장백폭포 곁의 암벽길이 눈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등정이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그림의 <가>지점에서 갈라져 구불구불 산길을 타고 올라 風?·기상대를 거쳐 天文峰에 오르는 길이다. 여름철에는 대형버스도 기상대 지점까지 올라가므로 별 어려움없이 천지를 볼 수 있다. 二道白河 루트에 비하면 풍광은 덜 수려하지만, 경사가 완만한 끝없는 고원을 오르면서 고도에 따라 전혀 다른 식물군들이 거대한 띠를 이룬 채 자라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또한 날시가 쾌청하다면 백두산의 줄기가 파도처럼 수백리나 굽이쳐 뻗어내린 장대한 장백산맥을 관망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길에서 아침 일찍 중국인 운전수 ‘미스터 風’이 모는 ‘북경지프로 6시간을 달려 二道白河鎭의 천지빈관에 도착한 첫날(5월7일)오후. 기자는 <나>지점에서부터 걸어서 장백폭포를 찾아갔다. 폭포밑의 龍沼는 물론 폭포의 양쪽 암벽이 수십길 되는 눈에 덮혀 있어 “흰 비단폭을 하늘에서 내려뜨린 것 같다”는 68m 높이의 폭포를 절반밖에 볼 수 없었다. 다만, 삼라만상이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폭포만 홀로 살아서 계곡을 뒤흔드는 굉음을 내고 있어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송화강·압록강·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는데 세 강 이름의 유래에 관한 이곳의 민담이 재미있다. 松花江은 강물이 소나무 숲사이로 흘러 솔꽃이 무더기로 떠가기 때문에 ‘솔꽃강’이라 불리었는데, 이를 한자어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압록강은 ‘앞누비강’이란 우리말 이름이 변음한 것이고, 두만강은 백두산물이 산밑으로 삼십리나 도망가서 흐른다고 하여 ‘도망강’이라 했다는 것이다.

  장백폭포밑 1㎞지점에는 ‘神水’라 불리는 온천수가 여러 곳에서 솟아나는데, 몹시 뜨거워 이 물에 계란을 삶아먹는다고 한다. 중국 측 안내책자 ≪美麗富饒的 延邊≫을 보니, 온천수의 평균온도는 60~70℃이고 가장 뜨거운 데는 82℃까지 오른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유황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각종 피부질환과 관절염, 신경통 등에 특효가 있어 관광철에는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그러나 온천탕 건물은 낡은 창고를 연상시켰고, 주위의 여관·상점 등도 문에 대못질을 해버려 사람의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었다. 또 부근에서 광천수가 솟는데 이 약수는 항상 8℃로 위병에 좋다고 한다.

눈위에 짐승의 핏자국
  다음날 새벽 5시, 천지등정은 단군할아버지에 대한 기도로 시작했다. 비닐봉지로 발을 감싼 것 말고는 아무런 雪山 등반 준비가 없는 형편이라 마치 손자가 할아버지께 떼쓰듯 “할아버님, 천지 좀 보도록 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도탓일까, 날씨는 아주 맑았으며 바람도 없었다. 미인의 미끈한 다리를 연상시키는 하얀 자작나무 숲길을 헤치며 무작정 올랐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눈위에 흩어져 있는 탄피와 붉으스레한 핏자국과 짐승의 똥무더기를 발견했다. 곰·사슴·맷돼지 등을 사냥한 흔적 같았다. 백두산에는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은데, 그중 산삼·貂皮(담비가죽)·녹용을 3賣로 친다. 이밖에도 이마에 ‘王’자 무늬가 있는 백두산 호랑이·검은 곰·꽃사슴·馬?·雪杉나무·자작나무 등이 천연 그대로 울울창창 우거져 있다.

  세시간을 걸어서 風口에 도착했다. 黑風口라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대협곡으로서 바람이 몰아치면 바위덩이조차 수백길 낭떠러지 밑으로 날아가버리는 위험천만한 곳이다. 지난해 한국인 등반객이 바람에 날려 사망한 곳도 이 지점이라고 한다. 다시 두시간 더 걸어 중국측의 천지 기상대에 도착했다. 혹시나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을까 했으나 자물통을 채운 썰렁한 건물뿐 아무도 없었다. 그들도 눈이 녹는 6월초가 되어야 근무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30분을 더 오르자 天池였다. 시간은 낮 10시 52분. 눈덮힌 천지, 거대한 銀盤을 빙 둘러싸고 톱날같은 봉우리들이 치솟아 있었다. 평범한 산봉우리들이 아니라 天池를 지키는 羅漢力士들처럼 위엄있고 강인한 모습들이었다. 해발 2천5백m 이상의 봉우리만도 16개. 그중 가장 높은 白頭峰(장군봉·병사봉이라고도 일컬음. 우리나라에서는 해발 2천7백44m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측 지도에는 2천7백49.6m로 기록되어 있다)을 비롯해 자하봉·고준봉·삼기봉·관면봉·와호봉·제운봉의 7개는 북한 경내에 있고 나머지 9개는 중국에 속한다.중국경내에선 白雲峰(2천6백91m)이 제일 높은데 기자가 오른데는 天文峰(2천6백70m)이므로 최정상은 아니다. 중국측에서 측정한 천지의 넓이는 21.41㎢, 둘레는 18.11㎞(水面만의 둘레는 13.11㎞), 수면높이 2천1백55m, 평균수심은 2백4m(최고수심 3백12.7m)이다. 둘레가 40리를 넘는 山頂湖水이고, 깊이로 따지면 웬만한 바다보다 더 깊다.

  장엄한 16羅漢이 우뚝 버텨서 지키는 이숭엄한 ‘하늘의 연못??을 바라보면 아무리 무딘 사람일지라도 절로 가슴이 서늘하여 옷깃을 여미게 될 것 같다. 중국의 上古書인《山海經》의〈大荒北經〉편에 ??大荒之中 有山名曰不成??(불함산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라 하였으니, 단군신화가 아니더라도 천지개벽이래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聖山이요 발원지임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上帝恒因有庶子曰雄 意慾下化人間  受天三印  □徒三千 降于太白山神檀樹下??
  하늘의 뜻으로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 한울님의 아들이 내려와 세상을 열었으니 그 민족이 ??朝鮮??이라??는 단군신화의 첫머리가 저절로 북받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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