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넘은 戰士들 “할말 아직 많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0.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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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제약상 할말을 다하진 못했지만 이번 세미나가 6·25의 성격 규명에 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정전회담 당시 북한측 부대표였던 李相朝씨의 소감이다.

  이번 6·25 세미나에 참석한 인사들은 할말도 많았고 따라서 그만큼 토론도 진지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짜여진 촘촘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칠순을 넘은 참가자들은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는 열의를 보였다. 또한 회의 중간의 휴식시간에는 삼삼오오 모여 당시를 회고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6·25의 성격규명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번 세미나는 8개분과로 나뉘어 각 분과별 주제 발표와 회의참석자 20명 전원이 참가한 종합 토론회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특히 ‘미·소 공중전’을 다룬 7분과와 한국전의 성격 및 원인을 분석한 8분과는 사안의 성격상 참가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8분과 토론에 참가한 韓마르크스 박사 (제네바회담 소련측 통역관)는 “전쟁 발발은 金日成과 스탈린의 개인적 성향과도 관계가 깊다”며 “설령 전쟁준비가 갖춰어졌다 해도 전쟁개시 결정은 사람이 내리는 만큼 이들 두사람의 성향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에 앞서 주최측이 24일 성북동 ㄷ음식점에서 베푼 만찬에서는 당시 참전한 사람들간의 반가운 해후가 곳곳에서 있었다.

  특히 인민군 6사단 소속이었다가 후일 빨치산의 ‘외팔이 대장’으로 알려졌던 최태환씨가 당시 토벌대장이었던 金點坤씨(현 경희대교수, 6·25 당시 국군 제12연대장)와 40년만에 만나 감회를 나눴다. 특히 최씨의 인민군 6사단과 김씨의 국군 12연대는 6·25 당일 전선에서 최초로 접전을 벌였던 부대였다.

  또 인민군 장교였다가 종전후 지금까지 무국적자로 남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주영복(66)씨는 동생 영식(62)씨와 감격의 해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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