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40주년을 맞는 오늘, 세계는 화해의 새질서를 세워가고 있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0.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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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간은 신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6·25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시사저널》은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주회, ‘한국전쟁 발발 40주년 기념 참가자 국제회의’를 문화방송과 공동후원하여 참전자들의 증언과 토론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5월25일~26일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열린 이 세미나에는 적이 되어 싸웠던
남북한과 미·소 등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미공개 秘事를 털어놓으면서
전쟁의 헛됨을 되새겼다. 아쉬움이 있다면 중국대표의 불참.
《시사저널》은 특별기획으로 네차례에 걸쳐 ‘독점’게재한다. 이번은 그 첫회분이다.
한반도 하늘에서 싸운
미?소 조종사 상봉

  “어서오십시오.”
  “반갑습니다.”
  6·25 당시 서로 적이었던 미·소양국의 조종사가 40년만에 만났다.

  한국전 당시 혈기왕성한 청년 조종사들이었던 이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서로를 대면하게 된 것이다. 제이콥 스마트(81)옹과 파블로비치 스몰체코프(77)옹은 다소 어색하긴 했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한국전이 격화일로로 치닫던 51년에서 그 이듬해까지 격전의 현장을 누볐던 산증인들이다. 이들 두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날의 전쟁터’를 다시 찾았을까? 또 당시 한국전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스마트씨가 임시거처로 쓴 경기도 광릉 소재 평화복지대학원 구내의 아파트를 찾은 스몰체코프씨는 통역으로 모스크바 공산쳥년대학 국제정치 교수인 韓마르크스 박사를 대동했다. 스마트씨는 지팡이에 의존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기억력만은 정확해 6·25 당시의 상황, 특히 미·소 공중전에 대해 또렷한 어조로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두사람은 2차대전 당시에는 연합군 소속으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동지’였으나 한국전쟁에서는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물론 서로의 직책상 공중전에서 격돌할 기회는 없었지만.

  한국전쟁 참전 초기에 스마트씨는 일본에 본부를 둔 미 극동공군의 작전참모로서 계급은 준장(후일 소장으로 진급)이었고 한국에 부임한 51년 12월경에는 이미 정전협상이 5개월째 진행중이었다.

  스몰체코프씨는 원래 모스크바의 모 공군사단에 근무했었으나 51년 2월경 중국내 소련 기지로 배치돼 약 1년간 여단장으로 근무했는데 당시 그의 부대에는 미그15기 75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조종사의 80%가 2차대전 당시 활약했던 베테랑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배속될 당시 “이미 소련 공군기가 한국전에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덧붙였다.

“소련 미그기가 미 전투기보다 성능 앞섰다”
  스몰체코프씨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스마트씨는 “당신은 어떻게 해서 6·25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느냐?”라고 물었다. 6·25 당시 중립을 표방하던 소련 정부가 돌연 한국전 참전 결정으로 돌아선 배경이 꽤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스몰체코프씨는 “북한에 대한 출격명령은 당시 스탈린 정권이 비밀리에 내린 경정”이라며 “우리같은 조종사는 왜 출격을 나가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스몰체코프씨는 그러나 “소련 공군의 참여는 미 공군기의 북한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적인 것이었지 미 공군과의 교전이 목표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출격 당시 상부로부터 “어떠한 상황에도 37선 이남을 넘지 말 것과 미군기와 해상전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이는 만일 38선 이남 또는 해상에서 소련기가 격추되어 조종사가 포로로 잡히거나 기체 잔해가 발견될 경우 미국측에 꼬투리를 잡힐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자신도 미그기를 몰고 미 공군기와 3차례에 걸쳐 공중전을 치렀다는 스몰체코프씨는 “미그15기가 미 공군의 주력인 F-86에 비해 고도와 속도 측면에서 훨씬 뛰어났다”며 “따라서 수적으로 미 공군기가 우세했지만 공중전에 있어 우리측이 훨씬 유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미 공군의 F-86세이버기가 소련기보다 우수했다는 통념을 깨는 것이다. 그는 “미그15기의 경우 유효사거리가 7백50~8백m로, 당시 F-86기의 1백50m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뛰어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당시 중국내 소련기지에 배치된 소련 공군 조종사들은 “중국 조종사 제복과 신발로 위장하고 교신도 조선어로 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나 말이 어려워 소련말이 튀어나왔는데 이는 미 공군측에 의해 곧 발각이 되고 말았다”고 당시의 비사를 소개했다. 스마트씨 역시 “미 공군이 소련 공군 참전 사실을 이미 알아챘다”며 그 증거로 “당시 소련기들은 조종술이나 전투력 면에서 북한이나 중국의 공군기와는 확연히 구분되었다”라고 말했다.

  스몰체코프씨는 “나는 특히 미 공군 조종사들의 인도주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며 그 구체적 사례로 미 공군 조종사들은 격추된 소련 전투기의 조종사들이 낙하산을 타고 탈출하는 것을 보아도 쏘지 않았다며 “이는 2차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조종사들이 했던 행동과는 정반대였다”고 말했다.

“일어나선 안되었을 전쟁”
  그러나 스몰체코프씨는 당시 미 공군 조종사들이 소련 및 만주에 대한 越境금지 지시를 어긴 사실을 스마트씨에게 따졌다. 특히 그는 51년 미 F-86 전투기 2대가 만주의 소련기지에 출현, 마침 그 지역을 지나가던 민간인 비행기를 격추시킨 사실을 지적하고 “과연 그럴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스마트씨는 “그런 사례가 있었음을 시인한다”며 일례로 한 미군 조종사가 ‘우연히’ 중국국경을 넘어 적의 지상목표물을 공격한 바 있었으나 사건발생 직후 그 조종사는 직위해제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말하고 “이는 군 당국이 국경침범과 같은 일을 무척 심각히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얘기가 이쯤 되면서 두사람의 화제는 한국전 발발 주체로 옮겨졌다. 스마트씨는 당시 남한이 “대단히 제한적인 자원과 무기를 가진 상태에서 전쟁을 일으킬 만한 능력이 없었다”고 북한의 남침설을 주장한 반면 스몰체코프씨는 분명한 답변을 피했으나 스마트씨가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 한국전쟁이야말로 일어나서는 안되었을 전쟁”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두사람은 서로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있을까? 스마트씨가 “그때야 전쟁상황이어서 적이었으나 지금은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하자 스몰체코프씨도 “40년 전 敵將이었던 스마트 장군에 대해 어떠한 적개심도 갖고 있지 않으며 존경한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지난 66년 4성장군으로 예편한 스마트씨는 한국전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정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전역 후 한때 미 항공우주국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은퇴해 남캐롤라이나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만 둘인 스몰체코프씨는 지난 75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현재는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모스크바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대담을 마치며 스몰체코프씨는 “오래오래 살아 좀더 좋은 세상을 보길 바랍니다”라고 덕담을 건냈고 이에 스마트씨도 “너무 고맙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손을 내밀어 두사람은 다시금 ‘화해의 악수’를 굳게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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