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억류 5년 恨, 닷새동안 풀었다”
  • 안병찬 편집국장 ()
  • 승인 1990.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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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 10년만에 ‘사이공’ 찾은 전 주월領事 안희완씨 … 도착 직후 옛 대사관 자리 들러
  전국투자금융협회 총무부장 安熙完씨. 1938년생. 베트남어를 전공한 그는 바쁜 협회일에 쫓기면서도 열심히 베트남 자료를 수집하여 <베트남 편람> <베트남 경제동향> 따위 책자를 자비로 출판하고 있다. 이를 여기저기 무료로 보급하는 일을 그는 낙으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베트남에 한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곳과 떨어지지 못하고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지니고 있다. 안희완씨는 자비로 출판하는 여러 가지 베트남 자료에 자기경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전 주월 한국대사관 영사(67.8~68.8, 75.3.27~75.4.30) △주 라오스 한국대사관영사(74.8~75.3)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강사(68.10~74.7). 그에게는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경력 한가지가 더 있지만 경력난에 결코 써넣지는 않는다. △사이공(지금의 호치민시) 치화교육소(형무소) 투옥생활(75.6.18~80.4.16).

  안희완씨는 주 라오스 대사관에 근무하다가 75년 3월27일 주 베트남 대사관에 전속되었으나 불과 34일만에 사이공정권이 급속히 멸망하여 베트남이 사회주의화 통일을 달성했을 때 미처 그곳을 탈출하지 못하고 체포되어 억류생활을 한 인물이다. 그가 치화형무소에서 복역한 기간은 4년 10개월.

  그런 경력의 안희완씨가 5월 중순에 슬그머니 전국투자금융협회 총무부장 자리를 여러날 비웠다. 밖의 사람들한테는 그저 ‘해외연수’를 다녀오겠다는 정도로 얼버무리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5년 가깝게 영어의 생활을 겪은 베트남땅을 다시 밟았다. 그것도 홀홀 단신으로 10년만에 거길 찾아갔다.

  안희완씨가 베트남 방문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물론 그가 낙으로 삼던 일과 관련이 있다. 스스로 베트남 연구가가 되고자 하면서 현지방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패망 직전의 다급한 상황 떠올리며…
  베트남 방문을 실현하기 우해 그는 베트남말로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직접 하노이에 우송할 생각을 짜냈다.

  그는 베트남의 어떤 사람 앞으로 편지를 보냈는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경제개혁파 지도자의 한사람인 ‘웬 코 탁 부총리 겸 외무장관 앞’인 듯하다.

  하노이 당국의 회신은 3월23일 베트남상공회의소 소장 이름으로 안희완씨 사무실로 날아왔다. “베트남 경제를 연구하겠다는 귀하를 환영하는 바이니 우리 수도 하노이를 먼저 방문해주기 바란다.”

  마침내 그가 방콕의 돈 무앙 국제공항에서 하노이로 향하는 베트남항공기에 탄 것은 5월9일.

  왜 두렵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왜 가슴이 설레지 않았겠는가. 그때의 심정을 안희완씨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한이 맺혀서 거길 갔다. 옥살이 5년인데 왜 또 가겠나. 사이공강이 내다보이는 쿠롱호텔(마제스틱 호텔) 504호실에 도착해서 눈물도 많이 흘렀다. 5년간의 아픈 상처를 씻겠다는 생각으로, 옥살이 매 1년을 504호실의 하루씩과 바꾸겠다는 생각으로, 닷새 동안 거기 있었다.”

  아무튼 하노이 노이 바이 공항에 도착한 안희완씨는 피킷에 자기 이름을 써들고 기다리던 베트남상공회의소 직원을 만났고 하노이에서는 줄곧 그들의 일정에 따라 행동했다. 그가 방문한 기관은 베트남중앙경제연구원과 베트남 국회 직속기관인 세계경제원 두곳이다.

  ‘남주띤(남조선) 경제’를 학습할 목적에서 베트남중앙경제연구원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행한 <산업발전을 위한 전략>과 <한국 사유화정책에 관한 3평론>을 88년과 90년에 각각 베트남어로 번역 출간했다.

  베트남 국회 직속 세계경제원도 한국산업연구원(KIET) 무역부장이 쓴 <한국 통상 및 산업화에 있어서의 정부 역할>을 번역 출간했다.

  특히 중앙경제연구원의 도안 도우 원장은 “한국개발연구원과 상호교류를 하여 유대를 갖고 싶다”고 말하면서 안희완씨에게 중간역할을 간청했다.

  안희완씨는 도우 원장이 위 논문의 필자들인 具本湖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金喆壽 특허청장, 陳稔재무부차관, 黃仁政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부원장에게 보내는 편지와 자료를 한보따리 들고 돌아왔다.

  안희완씨가 하노이에서 느낀 점은 모든 분야에 투자개발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점이다. 그는 베트남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을 단계임을 느꼈다고 말한다.

  안희완씨가 하노이를 거쳐 호치민시(옛 사이공)에 도착해서 우선 한 일은 웬주거리 107번지에 있는 옛 한국대사관 자리를 찾아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국기 게양대 앞에 서서 사진을 한 장 찍는 것이었다. 그는 호치민시에서 무역상담역으로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교포 金日井씨의 안내로 게양대를 찾아갔다. 필자는 안희완씨가 왜 그 자리에 그렇게 서고 싶어 했는지 이유를 잘 알고 있다. 75년 4월28일. 사이공 최악의 날로 표현된 그날은 함락 이틀 전이었다. 특파원으로서 그날 아침 한국대사관에 들렀던 필자는 멸망의 특이한 증상 속에서 벌어진 태극기 최후 하강식을 목격했다.

  오전 9시께 미국대사관 1등서기관으로부터 2시간내에 한국대사관원 최후 철수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순간 대사관원들은 야단법석을 일으켰다.

  “국기를 내려야지, 국기를.” 金榮寬대사의 다급한 지시가 떨어졌다. 김대사, 李常薰참사관, 李大鎔공사와 함께 게양대로 달려가서 국기를 끌어내린 사람이 바로 안희완영사였다.
  천천히 그러나 순식간에 국기는 내려지고 특파원의 카메라셔터는 재빨리 찰칵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특파원은 최종 철수 과정에서 하강식 장면을 담은 필름을 분실했고 대신 등뒤에서 같은 장면을 찍은 김일정씨 부인 고송학여사(당시 대사관 타이피스트)의 사진 한 장을 입수할 수 있었다.

출판활동 통해 한· 베트남 잇는 다리 역할
  그 이틀 후, 4월30일 새벽3시 안희완영사, 이대용공사 등은 미국대사관에서 남지나해로 탈출하는 마지막 헬리콥터를 기다리며 우리들과 함께 섞여 있다가 뒤떨어지고 말았다.

  사이공 최후의 날로부터 5년이란 시간의 거리를 넘어서야 안희완영사는 이대용공사, 徐丙鎬영사와 함께 석방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치화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86년 4월11일 스웨덴 외무차관의 보호를 받아 호치민시를 떠난 안희완영사 일행은 같은날 저녁 7시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영양실조로 잇몸이 곪아 있었다.

  그들이 귀국한 다음해에 이대용공사(당시 한국화재보험협회 이사장)가 쓴 ≪사이공 억류기≫에는 치화형무소의 어려웠던 상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안희완영사가 관련된 다음 장면도 들어 있다.

  “감방크기는 약 2평. 나는 뜻밖에도 젊은 대학생 수감자로부터 안희완영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안영사는 민간인인 이상관, 김종옥과 함께 바로 이 감방에 있었는데 지난 9월21일(1975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간수가 와서 갑자기 짐을 싸게 한 후, 어디론지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9월21일이면, 남월 전지역에 24시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지고 화폐개혁을 실시한 날이었다.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갔을까….”

  “사이공 함락 후 약 2년간 치화형무소에서는 북을 쳐서 시각을 알렸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침 기상시부터 밤 취침시까지 종소리가 울려 시각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느 일요일, 안희완영사가 잘아는 모 간수가 일직을 했다. 안희완영사는 배구시합 후보선수가 되어 배구장에 나가 있었다.

  일직 간수는 AH동 제2층으로 와서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배구구경을 하는 척하면서 안희완영사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둘이서 마음놓고 대화한 것은 실로 2년 5개월만에 처음이었다.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술술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봐 안영사, 한국말이 술술나오지가 않아 참 이상하군’ 하였다. 그러나 약 15분쯤 지나서 불편함이 없어졌다. 안영사와 나는 그간의 옥중 경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7월15일(1978년) 이후 이날 아침까지 안희완영사, 서병호영사 등과 함께 기거하던 BC동에는 못 들어가고 C동 제3층 제11호 감방으로 이감되었다. 철창 4개를 너머 1백m쯤 떨어진 곳에 안희완영사가 있는 BC동 제4층 제6호 감방이 건너다보였다.

  9월25일 밤과 다음날 새벽, 나는 간수의 눈을 피해가며 안희완영사를 건너다보고 흰 러닝셔츠를 접어 오른손에 든 채 전등불 밑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썼다.

  ‘북괴 출현, 완강저항, 묵비.’

  이는 북괴 요원이 나타나 나를 심문했으며, 나는 그들 심문에 완강히 저항, 외교관 면책특권을 방패로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알리려는 것이었다. 안희완영사는 부채를 좌우로 흔들고서 옆으로 뛰어가 엎드리곤 했다….“

  이번 10년만의 외출에서 안희완씨가 5년동안 갇혀 있던 호치민시 치화형무소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은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9일간의 베트남방문을 끝내고 서울에 돌아온 안희완씨는 ‘새로운 한·월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베트남자료집’의 자비출간을 변함 없이 계속하겠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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