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로 확인된 蘇 6·25 개입
  • (경희대 대학원장·정치학)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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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25일과 26일 양일에 걸쳐서,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에서는 특이한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한국전쟁 발발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참가자는 모두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하였거나 아니면 전쟁과 관련된 외교나 기타 활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교전 당사자였던 공산측과 자유진영 양측에서 온 인사들이었다. 한국전쟁에 관한 한 이렇게 양측의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 하여 지난날의 문제들을 토의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한국전쟁은 2차대전이 끝난지 5년 후에 일어난 세계전쟁이다. 미·소 두 초강대국을 포함하여, 세계의 강대국들이 모두 이 전쟁에 참여하였고, 거의 모든 나라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이 전쟁에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전쟁에 참여한 어떤 강대국도 자신이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유엔의 회원국으로서 유엔이 명한 국제적인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중공은 정부와는 상관이 없이 ‘의용군??을 보낸 것이었고, 소련은 처음부터 이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번 회의에서 그 당시 참전했던 소련 전투기 조종사의 증언으로 드러난 것은 작년까지도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소련군인들이 해외출정 군인으로 대우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 세계전쟁의 영향을 양대 세력권의 대결을 전세계화하고 군사화하는 것이었다. 이 체제는 그로부터 한 세대가 경과하고 나서도 근본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이 지속 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오랫동안 축척된 변화의 요인들이 빠르게 큰 변동들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을 때에, 이 거북스러운 과거는 어떻게 해서라도 먼저 한반도에서 처리되어야 마땅한 노릇이었다.

 회의를 통해서 추구된 것은, 첫째로 ‘사실의 확인??, 그리고 ??이해??와 ??화해??였다. 이것은 물론 한번의 회합으로 모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상당한 정도로, 적어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크게 소기의 성과가 있었다고 여긴다. 참여자들이 모두 처음에는 이 회의가 과거의 적대관계를 되풀이하는 비난과 욕설의 장소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의 확인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소련의 개입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전쟁 2년 전부터 북한에 공격용 중무기를 공급하고 북한군을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쟁 개시 6개월 전에는 훈련전문 고문관들도 대체하였고 이들이 남침작전계획을 작성하였다. 세부적이 소단위 작전지시도 소련고문관이 러시아어로 섰으며 이것을 통역관이 번역하고 원문을 사령관 입회하에 소각하였다. 공군 이외에도 레이다·통신·대공포화 등을 담당한 소련군 혼성부대가 북한에 주둔해 있었다. 휴전이 성립된 후에도 중립국 감시위원단 내에 폴란드나 체코군 제복을 입은 소련군 장교들이 배속되어서 이들이 위원단의 활동을 감시하였다.

 소련의 개입에 관해서는 모두가 합의를 하였지만, 그 성격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동유럽에서 온 인사들이나 전 인민군출신 일부 인사들은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주도로 일어난 것이라고 강조했고, 소련측 참여인사들은 대게 김일성이 주도한 전쟁을 스탈린이 승인 내지는 허락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이었다. 미국이나 서방측의 개입정도나 성격에 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이었으므로 큰 무제가 없었다. 전쟁 전 미국측의 정보미비 등의 문제가 제기되고 토의되었으나 특별히 새로운 사실이 드러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소련측에는 아직도 확인되어야 할 일이 많고 그것이 또 중대한 것이라는 데 합의가 있었다. 우선은 소련정부가 적어도 과거에 왜곡된 사실, 즉 북침을 주장했던 것은 공식 시정하고 사과하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의문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문서들을 공개하여야 한다는 것 등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소련측 참가자들도 동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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