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은 노병들의 6·25 진실 밝히기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0.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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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당사국들의 ‘아전인수’격 해석 재검토 성과

“남북 군축 위해 중립국감시단 기능 강화”주장도
 “북한의 역사책도 마찬가지지만 남한의 공식적인 전쟁사도 왜곡되고 결정적인 대목이 빠져버린 반쪽의 진실이다.??

부르스 커밍스 지음
《한국전쟁의 기원 제2권》에서

 6·25 발발 40주년을 맞는 오늘의 국제정세는 2차대전 이후의 冷戰시대를 넘어 신데탕트시대의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6·25 戰 國’소련과의 국교수립도 임박한 듯하며 중국과의 수교교섭 역시 막후에서 진행되고 있다. 어제의 적이 국가이익 우선이란 냉혹한 국제사회의 순리에 따라 오늘은 친구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신데탕트로의 세계질서 재편 속에서 40년 전 냉전시대의 6?25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일단 6·25를 둘렀나 지금까지의 논쟁부터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한국전 직후부터 50년대 말까지 풍미했던 전통주의 학파의 ‘스탈린 主導說 ??이 있다. 스탈린이 미국과의 냉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金日成을 부추겨 남침하게 했다는 주장이다. 다음으로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안에 한국이 들어 있지 않다고 한 1949년의 애치슨 미국무장관의 발언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수정주의 학파의 견해다. 이 說은 1960년대 후반에 유행했다. 끝으로 70년대에 들어서 전쟁의 원인을 美?蘇의 냉전구조에서 찾기보다 한반도의 내부적 요인으로 돌리고자 한 신수정주의 학파의 주장이다. 이들은 1920년 이후 전개된 좌우익의 대결과 美?蘇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 및 그 연장선상에서의 남북한의 끊임없는 무력충돌 등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이 ??필요충분??요소들이 배태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란을 교전 당사국인 남북한은 물론 주요 참전국인 美·蘇·中의 시각이 커밍스 교수의 지적처럼 다분히 ‘아전인수격??으로 흘러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사저널》이 MBC와 공동으로 후원, 지난달 20·26일 양일간에 걸쳐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이 주최한 세미나도 6·25의 성격 및 발발원인에 대한 전반적인 재조명을 위한 것이었다. 이번 세미나는 기존의 ‘定說??과는 관계없이 6?25에 참전한 산 증인들이 참석했으며 그들의 입을 통해 한국전을 다시 해부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는 지적이다. 남북한 인사는 물론, 미국, 소련, 폴란드, 프랑스, 스웨덴, 헝가리측 인사 등 20명이 참석한 금번 ??한국전 발발 40주년 참가자 국제세미나??에서 특이할 사항은 6?25는 북한의 남침이라는 점과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왔던 소련의 역할이 보다 확연히 밝혀졌다는 점이다. 특히 소련군의 작전명령서 번역을 담당했던 전 인민군 장교 주영복씨의 증언으로 소련이 개전 훨씬 전부터 한국전에 깊숙이 개입해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남침은 스탈린의 조종에 의해 시작됐다??
 세미나 8개분과 가운데 전쟁중 소련·북한 관계를 집중 토의한 4분과와 금세기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美·蘇 공중전을 다룬 7분과는 참가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소련의 한국전 참전에 초점을 맞추고 시행된 4분과에서 인민군 전선사령부의 공병부 부장이었던 주영복씨는 “북한의 남침은 스탈린의 조종에 의해 시작됐다??며 ??1950년 2월경 스탈린은 와실레프스키 중장이 이R는 30명의 소련장교를 북한에 파견, 작전수립 및 전투지휘를 담당시켰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50년 6월18?19일 사이 이들이 대남작전 계획을 성안했다??고 말하고 ??나도 공병고문 돌긴 대좌가 작성한 공병부분의 작전명령서를 번역한 바 있다??고 폭로했다.

 당시 유엔주재 폴란드 대사였던 레반도프스크씨도 “6?25는 스탈린이 주도한 전쟁??이라고 못박고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소련이 한반도에서의 전략적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부동항 확보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당시 인민군 장교였던 허진씨는 ??스탈린이 남침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김일성과 소련측 군사고문관들의 종용에 스탈린이 설득당했다고 본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공중전을 다룬 7분과에서 당시 미그기 조종사였던 스몰체코프씨는 “미그 15기가 F-86기 보다 고도와 속도 등에서 월등 앞섰다??고 주장한 데 대해 당시 美극동군 작전참모였던 스마트씨도 별 이의를 달지 않음으로써, 한국전 당시 미공군의 F-86 세이버가 소련의 미그기보다 우세했다는 기존의 통념이 깨졌다.

 정전회담을 주제로 한 6분과에서는 전쟁포로문제를 두고 설전이 있었는데 주영복씨는 “당시 유엔군측의 포로 중 약 5만~6만여명이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북한에 인도된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북한측 부대표였던 李相朝씨는 ??2~3일이면 정전협정이 맺어질 것으로 쉽게 생각했으나 전쟁포로문제로 무려 2년 넘게 걸렸다??며 ??그 책임은 2만7천명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한 李承晩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측 대표였던 白善 씨는 ??당시 유엔군측에는 인민군 포로 13만명을 포함, 상당수의 포로가 있었으나 공산측 수중의 아군포로 중 일부는 자신들의 의사와는 반대로 공산군에 강제로 편입되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자료를 보면 유엔군측은 17만1천명의 전쟁포로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그중 5만명이 공산국으로 가기를 거부했는데 53년 4월에는 공산측 포로 6천6백70명과 유엔군측 포로 6백84명이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교환되었다.

 전쟁중 한미관계를 다룬 3분과에서 당시 미군사고문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맨씨는 “트루먼 대통령주변에서는 미국의 한국전 개입을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며 ??미군의 한국전 참전은 트루먼의 단독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제8분과에서 경희대 金點 교수(6·25 당시 12연대장)는 6·25가 “전쟁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반도의 분단에서 시작되었다??며 ??북한의 소비에트화 내지는 對南지향적 군사화가 전쟁발발의 原因??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싸고 팽창정책에 주안을 둔 소련에 비해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할 의사(애치슨 국무장관의 발언을 의미)까지 비춤으로써 양국의 이러한 ??비대칭적 정책??이 남침의  因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주장했다.
 金교수는 또 지난 40년간 중립국 감시단의 감시소홀로 남북한 모두 “무제한적 전력증강에 힘써왔다??며 ??향후 남북군축을 위해서도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사찰과 감시의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종전후 소련에 거주하고 있는 허진씨는 “지금 소련에서는 북침이란 말을 거의 안 쓴다??며 ??적어도 한국전쟁이 남북 쌍방에 모두 원인이 있었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허진씨의 이러한 주장은 70년대 중반부터 퇴색하기 시작한 이른바 남한의 ‘북침설??이 사실상 종언을 고한 것을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실제로 금년 4월20일에는 소련의 역사학자인 미하일 스미르노프가 모스크바 방송과의 대담에서 ??북의 군대가 6월28일 이미 서울을 점령했으며 이후 남한 영도의 90%를 차지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고 말해 6?25가 북에 의한 남침임을 시사한 바 있다.

이번 세미나를 주최한 경희대   一교수의 지적대로 참가자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화해한 측면에서는 성공했으나 이해의 측면에서 볼 때 아쉬운 점도 많았다. 전쟁의  因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6·25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단시간의 작업이라기 보다 두고 두고 재조명해야 할 ‘역사적??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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